왜 나는 ‘애매한 일’을 미룰까

나의 일상

by 싸이진

부담갖지 않고 처리하는 일

급한 일은 결국 처리된다. 마감이 있고, 해야 할 행동이 이미 정해져 있기 때문이다.

언제까지 무엇을 하면 되는지가 분명한 일 앞에서는 생각보다 몸이 먼저 움직인다.

요즘 내게 그런 급한 일은 협력사 관리이다. 보안 관련 확인을 받고, 입소와 퇴소 가이드를 전달하는 일이다.

절차가 조금 복잡하더라도 확인해야 할 항목이 정리되어 있고 어디에서 항목을 확인해야 하는지, 보내야 할 대상도 분명하다. 보냈다는 기록이 남고, 할 일 목록에서 하나가 사라진다.

바쁜 와중에도 이 일은 이상하게 마음을 덜 쓰게 만든다.

복잡하게 고민하지 않아도 되고, 잘하고 있는지 스스로 묻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다. 이미 누군가 정해둔 틀 안에서 움직이는 일은 생각보다 수월하다.


몇 주째 제목만 있는 문서

그에 비해 애매한 일은 계속 남아 있다.

몇 주째 열지 않은 문서 하나가 있다. 파일 목록 속에서 가끔 눈에 들어오지만, 쉽게 클릭하지는 못한다.

제목은 ‘리서치 프로세스 가이드라인’. 리서치의 일정한 퀄리티를 위해서 전사가 참고할만한 가이드라인이 필요하다는 건 알고 있다. 언젠가는 누군가 참고해야 할 문서고, 지금 만들어두는 게 맞다는 생각도 든다.

하지만 문서를 열면 손이 멈춘다. 시작을 하려면 너무 부담스럽다는 마음이 앞서는게 사실이다. 이런 부담스러운 마음을 계속 가지고 있다가 퇴근할 때쯤 "아 진짜 오늘 시작할껄...왜 업무 시작하는 의지가 부족하지..."라며 자책하기 시작한다.

하지만 그 이유에 대해서 곰곰히 생각해보면 이런 업무들을 시작하지 못하는 이유는 하나인 것 같다.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 모르겠어서다.

이 가이드는 누구를 위한 걸까. 지금 단계에서 어디까지 정리하는 게 맞을까. 원칙만 적어야 할지, 예시까지 포함해야 할지. 너무 자세하면 부담이 되지 않을지, 너무 간단하면 의미가 없지는 않을지.

한 줄을 쓰려고 하면 질문이 먼저 쏟아진다. 행동보다 생각이 먼저 몰려오고, 생각은 쉽게 정리되지 않는다.


미루는 게 아니라, 아직 정해지지 않은 상태

그래서 나는 자꾸 급한 일로 돌아간다. 이미 정의가 끝난 일, 이미 형태가 갖춰진 일로 시선을 옮긴다.

보내고 나면 끝나는 일, 체크가 가능한 일 쪽으로.

애매한 일을 일부러 피한다기보다, 자동으로 명확한 일을 선택하는 쪽에 가깝다.

애매한 일을 미루는 이유는 의지가 부족해서라기보다, 아직 그 일을 어떻게 바라볼지 정하지 못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해야 할 행동이 아니라, 먼저 정리해야 할 기준이 남아 있는 상태다.

그래서 요즘은 제목만 있는 문서를 보면 하나의 작은 정의라도 남겨보려고 한다. 이 가이드라인이 어떤 역할을 해야 하는지, 가장 첫번째 챕터는 어떤 이야기가 와야 하는지...

아직 문장이 되지 않아도 괜찮은 질문 하나 정도면 충분하다.

어느 정도면 충분한지에 대한 감각이 조금만 또렷해지고, 내가 정한 방향이 내 안에서 자리 잡기 시작하면 언젠가는 지금의 협력사 관리처럼 마음을 덜 쓰는 일로 옮겨갈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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