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일상
일정표를 열어보면 빈칸은 거의 없었고, 메모장에는 해야 할 일들이 줄줄이 적혀 있었다.
#최신 기술 트렌드 리서치하기 #AI로 UX/UI 기획 업무 자동화하기 분석해 보기 같은 것들.
그런데 이상하게도 머리로만 해야지 생각하게 되고 실제로 한건 거의 없다.
시간이 없어서라기보다는, 손이 안 갔다.
할 일 목록을 보면 다 중요해 보였고, 덩어리가 컸다.
대충 시작해도 될 일처럼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더 미뤘다.
"최신 기술 트렌드 리서치하기"라고 적어두면, 그다음이 막혔다.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모르겠고, 어차피 한다면 제대로 해야 할 것 같았다. 기사만 몇 개 읽고 끝내기엔 부족해 보였고, 그렇다고 시간을 크게 내서 정리할 자신도 없었다.
"AI로 UX/UI 기획 업무 자동화하기" 도 비슷했다.
뭔가 공부를 더 해야 할 것 같았고, 결과물 같은 게 나와야 할 것 같았다. 그냥 궁금해서 가볍게 만져보는 선택지는 애초에 목록에 없었다.
지금 돌아보면 하기 싫었던 건 일이 아니었다.
일이 너무 크게 인식되는 상태 자체가 부담이었다.
할 수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시작하기 전에 이미 너무 많은 걸 요구받고 있는 느낌에 가까웠다.
그래서 목표를 바꿨다. 아니, 목표를 포기했다고 말하는 게 더 맞을지도 모르겠다.
최신 기술 트렌드 리서치하기-> 최신 유튜브 하나 보기
AI로 UX/UI 기획 업무 자동화하기 ->ChatGPT에 관련 질문 하나만 던져보기
기준을 “잘해보자”에서 “일단 닿아보자”로 낮췄다.
리서치의 완성도나 분석의 깊이는 잠시 치워두고, 그냥 그 주제 근처에 가는 baby step. 그정도로만.
유튜브 하나 본다고 리서치가 끝난 건 아니었다.
GPT랑 질문 몇 개 주고받았다고 해서 업무가 자동화된 것도 아니었다.
체크리스트에 굵은 표시를 할 만큼의 성과는 없었다.
그런데도 분명 달라진 게 있었다.
덜 무서워졌고, 다음에 뭘 하면 될지가 조금 보이고 구체적인 다음 행동을 계획하게 되었다.
무엇보다 “아예 안 하는 상태”에서는 벗어났다는 느낌이 남았다. 그 상태만으로도 하루를 마칠 때의 기분이 달랐다.
일이 줄어든 건 아니었다.
다만 일을 바라볼 때 느끼던 압박이 줄었다. 해야 할 일과 나 사이의 거리가 아주 조금 가까워진 느낌이었다.
baby step은 게으른 사람을 위한 요령도 아니고, 생산성을 극대화하는 기술도 아니다.
적어도 지금의 나에게는, 일이 너무 크게 느껴질 때 다시 움직이게 만드는 마음가짐을 갖게 해주는 것 같다.
요즘처럼 할 일이 많을수록, ‘잘하는 방법’을 찾기 전에 ‘시작할 수 있는 상태’를 먼저 만드는 게 더 중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 상태가 만들어지면, 그다음은 그때 가서 정해도 늦지 않은 것 같다.
아직도 할 일 목록은 길고, 다시 미뤄지는 날도 있다.
그래도 예전처럼 목록 앞에서 그대로 멈춰 서 있는 시간은 조금 줄어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