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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부부 이야기(소설)

by 박계장

프롤로그 — 김해, 2003년 봄


놀이터 모래판에 오후 햇빛이 눌어붙어 있었다. 플라타너스 잎사귀는 봄이 시작됨을 알리는 듯 잔뜩 물기를 머금어 반짝였고, 그 사이로 아이들의 웃음이 튀었다가 곧장 자갈밭 돌멩이 소리처럼 흩어졌다.


토요일, 사무실에서 잔무를 처리하고 마트에 들러 아내가 사오라는 이런저런 식료품을 샀다. 주차장에 차를 대고 두 손에 비닐봉지 몇 개를 들고 집으로 향하는 동안 비닐 손잡이가 손가락 마디를 얇게 파고들었다. 그때였다. 포대기로 아이를 등에 업은 여자가 아파트 단지 게시판 앞에 멈춰 서 있었다. 포대기가 어울리지 않을 만큼 큰 키, 짧은 커트머리, 남색 점퍼, 곧은 허리. 오래전에 접어 둔 사진 한 장이 스스로 펼쳐졌다.


영숙이 엄마.


나는 속도를 늦추지도, 그렇다고 빨리 걷지도 않았다. 걸음과 걸음 사이 공기의 두께가 달라졌다. 우리는 같은 아파트 단지의 다른 동으로 스쳐 지나갔다.

그날 저녁, 아내와 아이들과 함께 부모님 댁에 들렀다. 주방에서는 된장찌개가 보글보글 끓고 있었고, 어머니가 가스레인지 앞에 서 있었다. 나는 그 이름을 꺼냈다.


"영숙이 엄마 봤어요, 우리 아파트에서."


어머니는 된장찌개 거품을 숟가락으로 걷어내다가 내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내도 마트에서 봤다 아이가, 박군하고 몇 년 전에 같이 왔다 카대."


박군. 입술에 얹은 두 글자가 오래된 서랍을 열었다. 아버지와 어머니를 비롯해 동네 사람들은, 결혼은 했지만 아이가 없던 그 젊은 부부를 남편은 '박군'이라 불렀고, 아내는 이름 그대로 '순이'라 불렀다. 그 호칭과 함께 마을 안 작은 슈퍼의 공기가 고스란히 되살아났다.


문을 열면 좁은 공간이 한눈에 들어왔다. 창고가 따로 없어 과자 박스들이 벽면에 차곡차곡 쌓여 있었고, 슈퍼 안 진열대에는 봉지라면과 과자 봉지들이 층층이 줄지어 늘어서 있었다. 벽면 선반에는 세제와 식용유, 참치캔 같은 식자재와 각종 생필품들이 빈틈없이 채워져 있었다.


슈퍼 한쪽에는 음료회사가 홍보용으로 들여놓은 유리문 냉장고가 있었다. 콜라와 사이다 로고가 붙은 그 안에는 우유와 캔음료, 맥주와 소주가 빼곡히 들어찼다. 성에가 하얗게 낀 아이스크림 냉동고까지 더해져, 가게 안은 늘 냉기와 달콤한 냄새가 함께 돌았다.


문이 열릴 때마다 출입문 위에 매달린 작은 종이 딸랑 하고 울렸다. 그 소리와 함께 안의 공기와 바깥 햇살이 순간 섞였다. 그 장면 속에서, 우리의 대저가 돌아왔다.


"그 사람들 얘기, 니 다 아나?"


"얼핏 들은 것도 같은데… 잘 모르지, 뭐."


어머니는 가스불을 한 칸 낮췄다. 국물이 보글보글 끓다 잠잠해지는 소리. 그 고요 속에서 이야기가 맺히기 시작했다.



1. 대저에서의 기억

1985년 겨울, 우리는 다시 대저동으로 돌아왔다. 초등학교 2학년 무렵 아버지의 일터를 따라 용호동으로 옮겼지만, 도시 변두리에서도 가난은 끈질기게 달라붙었다. 살림이 더 어려워져 야반도주하듯 다시 대저동으로 온 것이다.

나는 이듬해 봄, 고등학교에 진학했다. 주중에는 해운대에 있던 학교 기숙사에서 생활했고, 주말이면 집으로 돌아왔다. 그때 부모님은 대저에서 작은 슈퍼를 운영했다. 주말마다 집에 오면 나도 가게 일을 거들었다. 물건값을 계산하고, 외상 장부에 이름을 적고, 냉장고에 물건을 채워 넣는 동안, 나는 어른들의 세계를 곁눈질했다.


그 당시 대저는 두 지명 사이에서 흔들리는 땅이었다. 행정구역은 이미 부산직할시 북구 대저동이었지만,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김해군 대저읍이었다. 지도가 바뀌었다고 사람들의 마음까지 하루아침에 달라지진 않았다. 여전히 많은 이들이 자신을 김해 사람이라 여겼고, 강 건너를 부산이라 불렀다.


마을의 대부분은 논과 밭이었다. 낙동강에서 뻗어 나온 수로는 구불구불 이어져 모내기철이면 이랑마다 물길을 불어넣었다. 해가 지면 개구리 울음소리가 사방에서 터져 집집마다 두드리듯 들려왔다. 봄이면 모내기, 가을이면 추수. 동네 어르신들은 여전히 "부산 간다"는 말을 썼고, 청년들은 강 건너 도시로 일을 나갔다. 행정구역상 부산이 되었어도, 사람들의 삶은 여전히 농촌 그대로였다.


슈퍼는 소문을 모으는 그물이었다. 그곳에서 나는 세 쌍의 부부를 알게 되었다.


택시

남편은 회사 소속 기사였다. 쉬는 날은 달력의 빨간 숫자와 무관했다. 아내는 키가 크고 서구형 미인이었고, 서울 말씨를 곱게 썼다. 결혼도 안 하고 남자와 살다가 아이만 두고 택시에게 온 사람이었다. 그 아이는 전 남편에게 두고 왔다는 얘기가 돌았다.


택시는 그녀의 과거를 잊지 못했다. 어머니 말로는, 술에 취하면 택시가 영숙이 엄마를 의심했다고 했다. "한번 그런 년이 또 안 그러겠나." 결혼도 안 하고 남자랑 살다가 아이만 두고 자기한테 왔다며, 또 다른 남자 만나서 어디론가 가버릴 거라고 했다. 전처도 그랬다고 했다. 전처 역시 남자를 만나 아이들을 두고 어디론가 가버렸다고. 여자들은 다 그렇다고. 그 불안이 술기운을 타고 폭언으로 터져 나왔다.


택시와의 사이에는 딸 영숙이를 낳았고, 전처 소생 딸과 아들까지, 모두 세 아이를 키웠다. 남편의 끊임없는 의심 속에서 영숙이 엄마는 점점 말이 줄어갔다.

박군

박군은 키가 작고 마른 체형이었고 인사성이 밝았다. 동네 어르신들에게 깍듯해서 칭찬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동네에 유일한 작은 규모의 자동차 부품 생산공장에서 현장관리자로 일했다. 박 군의 아내는 그보다 두 살 많았고, 말수가 적었다.


순이는 어린 시절 부모님이 돌아가신 후 친척 집을 떠돌다가 그 공장에서 박군을 만나 결혼했다. 외롭게 자란 탓인지 자식을 많이 낳고 싶어 했다. 그러나 아이가 생기지 않았다. 박 군보다 나이도 많아 조급함은 더했다. 순이는 언제나 수심 가득한 표정이었다. 남편과 달리 어두운 구석이 많았다. 사람들은 그녀를 이름 그대로 '순이'라 불렀다.


그럼에도 두 사람의 사이는 각별했다. 노을 지는 저녁 무렵이면 아이 없는 두 부부가 다정히 손을 잡고 동네를 산책하는 모습을 종종 볼 수 있었다. 동네 사람들은 그 모습이 보기 좋으면서도, 아이만 있었어도 얼마나 좋을까 싶어 안쓰럽다고 말했다.


청년회 총무

청년회 총무 부부는 동네에서 늘 눈에 띄었다. 남편은 토박이답게 마을 일에 앞장섰다. 정월 대보름이면 집집마다 돌며 지신밟기를 했고, 우리 집을 비롯해 가게를 하거나 살림이 넉넉한 집들을 찾아 기부금을 모았다. 그렇게 거둔 돈으로 농한기에 마을 어르신들 효도관광을 보내드리곤 했다. 아내는 곱상하고 앳된 얼굴에 웃음이 많은 사람이었다. 아이 둘을 키우면서 시부모와 남편의 농사일을 도우며 부지런히 살림을 꾸려 갔다.


밖에서 보면 더할 나위 없이 사이 좋은 부부 같았지만, 집 안 사정은 달랐다. 고부간의 갈등이 심했다. 시어머니는 밥상을 차리면 "간이 안 맞다" 하며 타박이었고, 빨래를 널면 "그렇게 널면 구김 간다" 며 핀잔을 주었다. 아이들이 조금만 떼를 써도 "엄마가 버릇을 못되게 들인다."며 며느리 탓이었다.


어느 날 청년회 총무 댁이 물건을 사러 슈퍼에 들렀다가 어머니께 하소연을 했다. "아줌마, 나 진짜 못 살겠어요. 어머니 때문에." 그러다 눈물을 쏟았다. 어머니는 "그래도 니 남편은 착하잖아. 조금만 참아라" 하고 위로 할 수 밖에 없었다.

세 쌍의 부부

세 쌍의 부부는 또래였다. 그 동네에서 비슷한 나이대가 드물다 보니 금세 가까워졌다. 남편들은 모두 청년회 회원이라 모임을 함께 했고, 그 인연이 아내들에게도 이어졌다.


처음에는 서로의 집을 오가며 술잔을 나누고 이야기를 나누며 정을 쌓았다. 그러다 자연스럽게 ‘부부 계’를 만들었다. 한 달에 한 번 돈을 모았고, 석 달에 한 번은 함께 여행을 떠났다. 집을 벗어나 길을 걷고, 음식을 나누는 동안 웃음이 이어졌고, 우정도 깊어졌다.


그러나 웃음이 깊어진 자리에 언제부턴가 알 수 없는 기운이 스며들기 시작했다.


어머니가 전해 들은 바로는, 어느 가을밤 부부 계 모임에서였다고 했다. 택시가 술이 과해 영숙이 엄마에게 험한 말을 던졌다.
“니, 어디 딴 놈 만나는 거 아이가.”
자리가 싸늘해졌다. 박군이 얼른 말렸다.
“아이고, 형님, 술이 과하다. 그만 드소.”


영숙이 엄마는 화장실에 간다며 자리를 떴고, 한참 동안 돌아오지 않았다. 박군이 밖으로 나갔다. 건물 뒤편, 어둠 속에서 그녀는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괜찮아요?” 박군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맨날 저래요. 저 인간, 술만 마시면.” 그녀의 목소리는 바람에 실린 연기처럼 낮게 흩어졌다. 가로등 불빛 아래, 눈가가 젖어 있었다


박군은 말없이 담배를 꺼내 물었다. 두 개의 불씨가 어둠 속에서 흔들렸고, 흩날린 연기는 잠시 얽히다 이내 흩어졌다. 그 짧은 순간, 눈길과 숨결이 스치며 알 수 없는 온기가 피어올랐다. 차가운 밤공기 속에서 일어난 그 미세한 떨림은, 훗날 더 큰 파문으로 번져갈 것임을 아무도 알지 못했다.

2. 1996년 가을, 나의 출발

나는 그해 가을 결혼을 했다. 북구 화명동에 신혼살림을 차렸다. 부모님은 여전히 대저에 계셨고, 이듬해 큰애가 태어났다. 맞벌이를 하던 우리는 주중에는 아이를 대저동의 부모님께 맡겨 두고 주말에 데리고 갔다.


슈퍼의 출입문이 여닫힐 때마다 들리는 종소리, 음료 냉장고의 불빛, 돈통이 열릴 때의 경쾌한 소리. 그 모든 것이 여전히 그 자리에 있었다.


그러나 사람들의 얼굴은 조금씩 달라지고 있었다. 누군가는 더 깊이 주름이 패고, 누군가는 한결 말수가 줄었다. 세 쌍의 부부도 여전히 대저에 있었으나, 그들의 웃음 속에 무언가 흔들리는 그림자가 있었다. 나는 그때 알지 못했다. 그 그림자가 곧 모든 것을 바꿔놓으리라는 것을.

3. 1999년, 부모님의 이주

부모님이 대저를 떠난 건 1999년이었다. 둘째 여동생이 시집을 가서 살고 있던 김해로 이사하셨다. 슈퍼의 셔터는 마지막으로 내려졌고, 낡은 간판은 떼어졌다. 가게를 정리하는 동안 어머니는 다 받지 못한 외상 장부를 넘기다 말고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IMF 한파로 경기는 얼어붙었고, 기업은 줄줄이 문을 닫았다. 그 여파는 동네 슈퍼라고 피해 갈 수 없었다. 게다가 강 건너에는 대형 마트가 몇 개나 들어섰다. 그들은 무료 셔틀버스를 강 건너 구석구석까지 보내 손님들을 실어 날랐다. 사람들은 마트의 무료 셔틀버스를 타고 부산에 볼일을 보러 나갔고 돌아오는 길에는 마트에 들러 장을 보는 것이 자연스러운 일이 되었다. 그렇게 우리 슈퍼의 손님은 하나둘 줄어들었고, 끝내 감당할 수 없는 빚만 남았다. 결국 부모님은 대저를 정리하고 김해로 이사할 수밖에 없었다.

4. 2000년 5월, 김해로

1997년 첫째 아이가 태어나고, 2000년 5월, 우리가 김해로 이사하던 날 둘째가 태어났다. 아이들을 돌봐 줄 부모님 곁으로, 우리도 김해로 이사한 것이다. 부모님의 아파트와 우리 집은 차로 5분 정도 거리였다.

어느 날 우리 아파트 단지 안에서 우연히 '영숙이 엄마'를 보게 됐다.


"그 사람들, 알제? 대저에 살던."


어머니가 조심스럽게 꺼낸 이름들. 박군, 영숙이 엄마, 청년회 총무.

슈퍼를 하던 때 간간이 들은 기억이 있다. "바람이 났다더라", "도망갔다 카더라", "아이를 두고 갔다더라". 나는 그 말들을 흘려들었다.


5. 2003년 봄, 진실의 조각들

첫째가 여섯 살, 둘째가 세 살이었다. 장을 보고 돌아오던 그날 오후, 나는 그녀를 보았다. 포대기로 아이를 업은 여자. 영숙이 엄마였다. 부모님 댁에서 그 이야기를 꺼내자, 어머니는 오래 참았던 이야기를 풀어놓기 시작했다. 된장찌개가 뽀글거리는 소리 사이로, 그들의 드라마 같은 사연이 펼쳐졌다.


"박군하고 영숙이 엄마가 바람이 났다 카더라. 그게 언제였나… 우리가 김해로 이사 온 그 해였나 보다. 영숙이도 두고 나온 모양이데."


"택시는요?" 내가 물었다. 영숙이 엄마는 택시의 아내였으니.


"운전도 안 하고 도망간 지 여자를 찾아 헤맸다 카데. 부산이고 마산이고, 서울까지. 영숙이하고 전처 자식 들 데리고 살면서 그 여자를 그리 찾아 다녔다 안하나."

어머니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그러다 쓰러졌단다. 간암으로, 몇 달 못 살고 죽었단다. 마흔도 안 됐는데."


나는 잠시 말을 잃었다. 술이 약해서 주정이 심한 것을 빼고는 딱히 나쁜 사람은 아니었다. 나이가 아까웠다.

"그런데 더 기가 막힌 건," 어머니가 이어갔다. "청년회 총무 마누라도 죽었다 카이. 농약 마시고."


"왜요?" 내가 놀라는 빛을 감추지 못하고 물었다.


어머니는 잠시 숨을 고르고 말을 이었다.


"청년회 총무가 선을 넘었다이가. 박군이 택시 댁하고 집을 나간 다음에 박군 마누라, 순이가 완전 넋이 나간 사람처럼 됐다 카이. 청년회 총무가 아는 처지로 자주 들여다보고 위로해 줬다 안카나."

어머니가 된장찌개를 저으며 말을 이었다.


"어느 날 밤에. 청년회 총무가 순이네 집에 소주 몇 병 들고 갔다데. 둘이 술을 마셨다는데 순이가 울기 시작했고, 청년회 총무가 어깨를 감싸고 위로를 해줬는데... 술기운에 그만 그리 된 모양이데. 그게 한두 번이 아이었단다. 그러다가 그기 동네에 소문이 나뿌제."

"그걸 청년회 총무 댁이 알았고요?"


"그렇지. 그 착한 사람이 어느 날 농약을 마신 기라. 시어머니한테 그리 시집을 살더만은. 저거 남편이 발견했을 때는 이미..."

퍼즐이 맞춰지기 시작했다. 어머니는 식탁에 된장찌개며 반찬들을 내려놓으며 말을 이었다.

"그런데 신기한 기 뭔지 아나? 박군 부부 안 있나, 그렇게 애를 갖고 싶어 해도 안되더만, 서로 짝을 바꾸니까 양쪽 다 애가 생긴 기라. 박군는 영숙이 엄마하고 딸을 낳았고, 순이는 청년회 총무하고 재혼해서 아들을 낳았다 카이."


"궁합이… 안 맞았던 모양이네요." 내가 말했다.


어머니는 창밖을 바라보았다. 봄볕이 커튼 사이로 비스듬히 들어왔다.


"사람 일이라는 게 참 얄굳다. 서로 얼마나 사랑했노, 박군 부부 말이다. 그런데 서로가 그리 원하던 애가 안생기니 둘 다 얼마나 괴로웠겠노. 그게 둘 사이를 갈라놓은 건가 싶기도 하고. 세 부부가 그리 잘 어불리 다니더만 얽히고 설켜서 이리 저리 마음이 맞더니 그래 된기지 뭐. 동네에 소문이 파다한데도 청년회 총무하고 순이는 지금 그 동네에서 같이 산단다."

6. 그 후의 조각들

며칠 뒤, 단지 슈퍼에서 영숙이 엄마와 다시 마주쳤다. 그녀는 우유와 식빵을 들고 있었고, 등에는 두세 살쯤 되어 보이는 딸아이가 매달려 있었다. 박군과의 사이에서 낳은 아이. 나는 라면 봉지를 들고 그녀 뒤에 섰다.

계산을 마치고 돌아서는 그녀와 눈이 마주쳤다. 오래전 대저동 슈퍼 계산대 앞에서 보았던 그 수줍은 웃음의 그림자가 잠깐 스쳤다. 우리는 아무 말 없이 고개를 숙였다. 인사는 쉽지만, 대화는 어렵다. 특히 과거가 대화에 끼어들 때는 더.


집에 돌아와 어머니에게 전화를 했다.

"영숙이는… 어떻게 됐대요?"

"모르겠다. 저거 외가에서 키웠다는데, 연락은 되는지 모르지."

"영숙이 엄마가 집을 나간 뒤에도 영숙이하고 배다른 두 남매와 사이가 그리 좋았다던데."

어머니가 덧붙였다.

"택시 죽고 나서, 영숙이는 저거 외가로, 전처 자식 둘은 어디 친척 집으로 갔다 카더라. 뿔뿔이 흩어진 기제. 영숙이 엄마가 갸를 찾았는지는 모르겠다. 하기사, 무슨 낯짝으로 아를 찾겠노."

에필로그 - 묻지 않은 이야기

마트 출입구 쪽에서 어머니와 영숙이 엄마가 마주쳤다. 두 사람은 잠시 발걸음을 멈추었다. 손에 쥔 비닐봉지가 흔들렸고, 등 뒤의 아이가 몸을 비비적거렸다.


영숙이 엄마의 눈가가 먼저 젖었다. 웃음인지 눈물인지 분간하기 어려운 빛이 번졌다. 세 남자와의 인연으로 떠돌던 세월이 그 얼굴에 깊게 새겨져 있었다. 사람들은 그녀를 두고 헤픈 여자라 손가락질했지만, 그녀에게도 사정은 있었다.


어릴 적 부모의 따뜻한 보살핌을 받지 못한 그녀는 일찍이 세상에 내던져졌다. 혼인도 없이 아이를 낳고 홀로 대처로 나와야 했고, 그 뒤 자신을 아껴주던 택시와 가정을 꾸미며 새 삶을 꿈꿨으나, 그의 의심과 폭력 앞에 오래 버티지 못했다. 결국 또 다른 인연을 붙잡아 타지를 떠돌며 살았다.


그렇게 단단히 버텨온 세월이었지만, 낯선 땅에서 우연히 마주친 어머니를 보는 순간, 마음 한구석이 무너져 내렸다. 어머니는 그녀에게 엄마 같던 존재였고, 그 앞에서만큼은 감출 수 없는 눈물이 번져 나왔다.


어머니는 한동안 아무 말 없이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짧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 끄덕임 속에는 굳이 묻지 않고도 다 아는 듯한 이해가 담겨 있었고, 말로 대신할 수 없는 위로가 배어 있었다. 그 순간, 지난 세월과 남겨진 상처, 아직 풀리지 않은 마음이 고요히 포개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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