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젊은 날

가나초코릿 광고 속 그녀

by 박계장

저녁을 먹고 소파에 앉았다. TV를 켰다. 유튜브에서 아무 영상이나 틀어놓고 있었는데, 화면을 넘기다 옛날 광고 모음이 눈에 들어왔다. 1982년이라는 자막이 떴다. 낡은 필름 특유의 색감이 흐릿하게 번졌다.


초콜릿 광고였다. 스물두 살쯤 되어 보이는 여배우가 웃고 있었다. 맑은 눈과 둥근 볼, 어깨 아래까지 내려온 웨이브 머리가 바람에 흩날렸다. 그녀는 초콜릿을 한 입 베어 물고는 카메라를 향해 환하게 웃었다. 원미경이었다. 나는 리모컨을 놓고 화면을 들여다봤다.


1982년. 그해 나는 열두 살이었다. 아마 이 광고를 TV에서 봤을 것이다. 하지만 기억나지 않는다. 당시 내게 스물두 살 여배우의 얼굴은 그저 멀고 환한 무언가였을 뿐, 구체적인 사람이 아니었다. 지금 다시 보니 다르게 보인다. 주름도 없고, 눈가의 잔선도 없고, 목의 처진 살도 없다. 그저 젊음이었다.


광고는 30초 만에 끝났다. 다음 광고가 이어졌지만 나는 되감기 버튼을 눌렀다. 다시 한 번 그녀의 얼굴을 보았다.


얼마 전 드라마 "미지의 서울"에서 원미경을 봤었다. 예순다섯 살의 그녀는 비슷한 또래 역할을 맡아 노년의 삶을 연기하고 있었다. 흰머리를 느슨하게 뒤로 묶고, 얼굴에는 세월이 그어놓은 선들이 가득했다. 웃을 때마다 눈가에 깊은 주름이 패였다. 나는 그 장면을 보면서 연기가 자연스럽다고 생각했다. 실제 나이와 배역의 나이가 비슷하니까.


그런데 지금 화면 속 스물두 살의 원미경을 보니, 예순다섯 살의 그녀가 아득하게 멀어졌다. 43년. 그 사이에 무엇이 있었을까. 수백 편의 작품, 수천 번의 촬영, 수만 번의 웃음과 눈물. 그리고 매일 아침 거울을 보며 조금씩 달라지는 얼굴을 확인하는 시간.


나는 다시 화면을 멈추고 그녀의 얼굴을 들여다봤다. 그러다 문득 내 나이를 계산했다. 쉰다섯. 1982년에 열두 살이었던 소년이 이제 중년을 넘어 노년을 바라보고 있다. 그때 나는 무엇을 하고 있었나. 학교에서 돌아와 만화책을 보거나 친구들과 골목에서 놀았을 것이다. 시간이 얼마나 흘러갈지, 내가 어떤 사람이 될지 전혀 생각하지 않았다. 열두 살에게 쉰다섯은 상상할 수 없는 먼 미래였다.


나도 매일 조금씩 달라지고 있다. 머리카락 사이로 흰머리가 섞이고, 눈가에 잔주름이 생기고, 손등의 피부가 얇아진다. 아침에 일어나면 허리가 뻐근하고, 계단을 오를 때 숨이 찬다. 어제와 오늘이 크게 다르지 않지만, 10년 전과 지금은 확연히 다르다. 20년 후의 내 모습을 상상하면 막연해진다. 일흔다섯. 그때의 나는 지금의 나를 어떻게 기억할까.


화면을 껐다. 시계를 보니 저녁 여덟 시가 넘어 있었다. 나는 소파에 그대로 앉아 있었다. 오늘이 앞으로 올 모든 날 중에서 가장 젊은 날이라는 말이 있다. 처음 들었을 때는 위로처럼 들렸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게 느껴진다. 위로가 아니라 사실이다. 내일은 오늘보다 조금 더 늙을 것이고, 모레는 내일보다 조금 더 늙을 것이다. 시간은 한 방향으로만 흐른다.


그렇다면 나는 오늘을 어떻게 살아야 할까. 1982년의 원미경이 43년 후의 자신을 본다면, 그 세월을 아깝다고 생각할까. 아니면 잘 살았다고 고개를 끄덕일까. 나는 20년 후의 나에게 무엇을 보여줄 수 있을까.


나는 일어나 창문을 열었다. 차가운 바람이 얼굴을 스쳤다. 차로에는 빨간 브레이크등이 줄지어 흐르고 있었다. 귀가하는 차들이 천천히 움직이고 있었다. 나는 창가에 서서 그 풍경을 한동안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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