빚으로 밥을 차리던 시절

비교하지 않았기에 충분했던 삶

by 박계장

아버지가 돈을 세고 있었다. 만 원짜리 지폐를 한 장 한 장 넘기며 입으로 숫자를 세었다. 십, 이십, 삼십. 숫자가 올라갈수록 아버지의 얼굴에 긴장이 스며들었다. 백만 원이었다. 아버지는 한 손에 쥔 돈다발을 다른 손으로 탁 내리쳤다. “갚아야 하는 돈이다.” 그렇게 말하며 아버지는 돈을 다시 한 번 세었다. 그날 밤, 우리 집에 백만 원이 있었다. 일수였다. 매일 만 이천 원씩 백일을 갚아야 하는 돈이었다. 그런데도 나는 왠지 우리에게 공돈이 들어온 듯한 기분이 들었다.


1970년에 김해군 대저읍에서 태어났다. 여섯 식구가 방 한 칸에서 살았다. 전후 세대는 아니었다. 산업화가 급격히 진행되던 시절이었고, 보리고개를 걱정하는 세대도 아니었다. 밥을 굶는 시대는 지나갔다고들 했다. 나는 밥이 없어 굶어본 기억이 없다. 빚을 얻어서라도 밥상은 차려졌다. 그것이 나의 부모가 해준 일이었다.


부모님은 쉬지 않고 일했다. 대연동의 동국제강에서 일하다가 덕포시장에서 반찬가게를 했다. 그 밑천이 아버지가 손바닥에 내리치던 백만 원이었다. 매일 만 이천 원을 갚았지만 백일이 지나면 또다시 일수를 썼다. 결국 내가 중학교를 졸업하던 해에 가게를 정리했다. 스물두 살에 공무원이 되었지만 번 돈은 부모님의 슈퍼 운영에 쓰였고, 결혼 전후로 외환위기를 겪으면서 가게를 위해 내 명의로 받은 은행대출을 모두 갚는 데 이십 년도 훨씬 더 걸렸다.


그렇다고 내가 가난에 허덕이며 죽지 못해 산 것은 아니다. 몇 년에 한 번씩은 해외여행도 다녔고, 네 식구가 살 만한 아파트에서 살았다. 나는 극단적 가난을 알지 못한다. 어쩌면 그것은 내가 주위를 비교하지 않아서였는지 모른다. 대저읍에 살 때도 용호동에 살 때도 모두가 고만고만하게 살았다. 누가 더 잘사는지 비교할 대상이 없었다. 드라마에서 보는 부잣집 아이들은 먼 나라 이야기 같았다. 풍족한 삶은 아니었지만 그것이 불행인 줄 몰랐다. 원래부터 없던 것은 없다고 해서 불편하지 않았다.


요즘 통계를 보면 경제적 어려움으로 스스로 삶을 포기하는 사람이 적지 않다. 전체의 사분의 일 정도가 경제 문제를 이유로 든다고 한다. 정신과적 문제가 더 큰 비율이지만, 그 원인도 따지고 보면 경제적 어려움과 무관하지 않다. 이상한 일이다. 지금은 내가 자란 1970년대보다 훨씬 풍요롭다. 방 한 칸에 여섯 식구가 사는 집은 거의 사라졌다. 굶주림을 걱정하는 사람도 드물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더 불행하다고 느낀다.


비교 때문이다. 텔레비전에서 보던 부잣집 아이들은 이제 스마트폰 속에 실시간으로 등장한다. 누군가는 해외여행 사진을 올리고, 누군가는 새 차를 자랑한다. 아침에 일어나 저녁에 잠들 때까지 우리는 타인의 삶과 나를 비교한다. SNS는 끊임없이 물어댄다. 너는 왜 이렇게 살고 있느냐고. 상대적 빈곤이 절대적 빈곤보다 견디기 어려운 이유다. 예전에는 모두가 비슷하게 가난했다. 지금은 누가 더 가졌는지 손바닥 안에서 확인된다.


가난했지만 빚을 내서라도 자식들을 굶기지 않은 부모님에게 감사하다. 물론 그것이 전후와 같은 극단적 궁핍의 시대가 아니어서 가능했을지 모른다. 그렇다 하더라도 네 명의 자식을 굶기지 않기 위해 내 부모는 나름 최선을 다했다. 부모는 평생 빚을 안고 살았지만 자식들을 굶기지 않았다.


세상에는 어떻게 이룬 것인지 자세히 알지 못하겠으나 많은 돈을 벌어 좋은 집을 사고 차를 사고 경제적인 여유를 누리는 사람들이 있다. 나는 그렇지 못하다. 하지만 나는 내 방식대로 열심히 살아왔다. 풍요롭지는 않았지만 부족하지도 않았다. 비교하지 않았기에 그것으로 충분했다. 비교하며 불행해질 필요는 없다. 어쩌면 불행은 가진 것이 적어서가 아니라 충분하다고 여기지 못해서인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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