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부터 내리는 가을비
새벽 네 시쯤 빗소리에 잠이 깼다. 눈을 떴을 때 매도 이후 며칠째 가파르게 상승세를 타고 있는 주식이 떠올랐다. 몇 달을 답보 상태여서, 긴 추석 연휴 이후 하락을 예상하고 매도했더니 내 판단은 여지없이 빗나갔다. 누군가 내가 팔기만을 기다렸다가 일부러 주가를 올려 나를 골탕 먹이는 것만 같다. 이런 생각을 하다 보니 잠이 오지 않아 한참을 뒤척이다가 거실로 나갔다.
베란다 커튼을 젖혔다. 아파트 단지 안 보안등 불빛 아래로 무수한 빗줄기가 가느다란 빛처럼 땅으로 내리꽂히고 있었다. 어스름한 새벽에 어둠이 걷히는 중이었다. 소리 없이 땅에 닿는 빗줄기를 한참 바라보았다.
나는 비를 좋아한다. 봄비는 가볍다. 꽃잎을 적시고 흙냄새를 피워 올린다. 여름비는 거칠다. 한바탕 쏟아지고 나면 공기가 시원해진다. 그러나 가을비는 다르다. 무겁지도 가볍지도 않다. 하루 종일 일정하게 내리는 경우가 많다. 멈출 것 같지 않다. 그 꾸준함이 좋다.
비가 내리면 세상이 조용해진다. 사람들은 움직임을 줄이고, 차들은 속도를 낮춘다. 모두가 비라는 핑계로 느려질 수 있다. 나도 그렇다. 비가 오는 날에는 서두르지 않아도 된다. 조금 늦어도, 조금 천천히 가도 괜찮다. 비가 그 이유가 되어준다.
출근 시간이 되어 주차장으로 향했다. 비가 오는 것을 알고 있었음에도 우산을 챙기지 못했다. 그냥 비를 맞으며 걸었다. 새벽 공기는 차갑고 축축했다. 어스름이 채 가시지 않은 주차장에서 차 문을 열고 시동을 걸었다. 핸드폰을 거치하고 네비게이션 앱을 켜고는 메인 화면에 고정된 '회사'를 눌렀다. 경로를 모르는 것은 아니지만, 막힘없는 가장 빠른 길과 속도위반 단속 지점을 친절하게 안내해 주어 운전 중에는 언제나 습관처럼 네비게이션 앱을 이용한다.
와이퍼를 켰다. 자동차 앞 유리창 물기가 흐려졌다가 다시 선명해지길 반복했다. 와이퍼 중간쯤 부분이 제대로 닦이지 않았다. 아마도 와이퍼의 고무가 닳아서 그런가 보다. 비가 오면 매번 겪는 일이다. 그때마다 와이퍼를 바꿔야지 하였다가 비가 그치면 잊어버린다. 오늘도 아마 그럴 것이다.
사무실에 도착했다. 자리에 앉으니 창밖에서 빗소리가 들렸다. 멀리서 차들이 달리는 소리도 함께 섞여 들어왔다. 일정한 리듬이 있었다. 컴퓨터를 켜고 메신저를 열었다. 최근 국가정보자원관리원의 화재로 시청 내부 메신저가 먹통이 되었다. 임시방편으로 민간 메신저를 사용하는데 익숙하지 않아 전송되는 쪽지를 제대로 챙겨보지 못하고 있다. 쌓여있는 메일을 하나씩 열어 본다. 창밖을 보았다. 비는 여전히 내리고 있었다.
점심때쯤 팀장들에게 칼국수를 제안했다. 다들 좋다고 했다. 비 오는 날이면 면과 뜨거운 국물이 생각난다. 점심시간이 되자 잠시 비가 그쳤다. 우산을 펼치지 않고 식당으로 향했다. 축축한 공기가 얼굴에 닿았다.
칼국수가 나왔다. 진한 멸치 육수가 주전자째 함께 나왔다. 손칼국수 면발 한 젓가락을 집어 입안으로 넣었다. 잘된 반죽의 쫀득함과 면의 굵기가 제각각인 손칼국수 특유의 식감이 느껴졌다. 국물은 칼칼한 양념과 어우러졌고 멸치 육수의 쌉싸름한 뒷맛이 있었지만 나쁘지는 않았다.
밖이 차가우니 안이 더 따뜻해 보인다. 뜨거운 국물, 김이 서린 창문, 후후 불며 먹는 칼국수의 면발. 비가 없었다면 이 온기가 이토록 또렷하게 느껴졌을까.
점심을 먹고 나왔을 때 비는 더 이상 오지 않았고, 날씨는 몹시 흐렸다. 길 위에는 막 그친 빗물이 고여 있었고, 사람들은 접힌 우산을 한 손에 들고 걸었다. 시청 녹음광장에 접어들었을 때 일행 중 누군가가 외쳤다.
"감이다. 대봉감이 열렸다." 올려다본 오래 묵은 감나무에 주렁주렁 튼실한 대봉감이 달려있었다. 저 감은 아마도 저 밑에서 바둑과 장기로 소일하는 노인들의 가을 어느 날의 소중한 간식이 되어 줄 것이다.
사무실로 돌아오는 길, 김이 서린 국물의 온기가 떠올랐다. 비가 멈추어도 칼국수 국물의 따뜻함은 남는다. 한때의 냉기와 흐림이 지나가도 마음속 어딘가에는 여전히 따뜻한 국물 같은 순간이 남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