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에도 고향은 있다.
도시에서 태어나고 자란 사람에게도 고향이라 부를 만한 곳이 있을까. 흔히 고향이라 하면 시골 마을, 흙길과 논두렁, 외갓집의 툇마루 같은 풍경을 떠올리지만, 나에게 고향은 다른 모습으로 다가온다. 부산 남구 용호동 27통 1반 424번지. 태어난 곳은 아니지만, 내 마음속에 가장 깊이 새겨진 그곳이 나의 고향이다.
국민학교 2학년 때 이사해 고등학교 진학 전까지 살았던 그 동네는 좁은 골목 안에 30여 호의 집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는 곳이었다. 주인집이라 불리는 개량 한옥을 중심으로 작은 월세방들이 둘러싸고 있었고, 집들이 워낙 가까워 창문 너머로 이웃의 코고는 소리까지 들릴 정도였다. 그곳에서 나는 가난하지만 서로를 아끼는 사람들의 따뜻한 정을 배웠다.
같은 울타리 안에 사시는 할머니는 새벽부터 구수한 메밀 끓는 냄새로 온 골목을 깨우셨다. 전라도 사투리로 정겹게 말을 걸어오시며 시장에서 도토리묵과 메밀묵을 파시는 분이었다. "아그야, 이거 쪼까 맛 봐라잉" 하시며 갓 만든 묵을 내미실 때면, 어린 나는 메밀묵의 텁텁한 맛은 고개를 저었지만 도토리묵의 탱글탱글한 식감만큼은 좋아했다. 할머니는 내가 도토리묵만 골라 먹는 걸 아시고는 "그자석, 입맛이 수월찮네잉" 하시며 웃으셨다.
동네 한편에는 어린 손주 둘을 키우는 또 다른 할머니가 계셨다. 집 앞에 연탄화로를 몇개 내놓고 양은 국자에 설탕 덩어리를 녹여 파는 '쪽자'를 하셨는데, 그곳은 동네 아이들에게 작은 천국이었다. 몇 푼 안 되는 용돈을 쥐고 그 앞에 서면, 할머니는 연탄불에 녹여 먹는 설탕과자를 몇개씩 더 주셨다.
주인집에는 나와 동갑인 여자아이가 살았다. 같은 학교 육상부 에이스로, 매일 운동장을 뛰어다니느라 얼굴은 늘 까무잡잡했지만 키가 크고 날씬한 아이였다. 저학년 때는 함께 집을 오가며 시간을 보냈다. 하지만 학년이 올라가면서 우리 사이에는 미묘한 거리감이 생겼다. 사춘기라는 이름의 보이지 않는 벽이 우리를 갈라놓았다.
어느 순간부터 그 아이와 마주치면 어색하게 인사만 하고 지나쳤다. 어린 마음에도 아쉬웠지만, 동시에 어른이 되어간다는 것이 이런 것임을 어렴풋이 알 수 있었다. 가까웠던 것들이 멀어지고, 익숙했던 것들이 낯설어지는 과정. 그것이 성장의 또 다른 이름이었다.
여름이면 동네 곳곳에 놓인 평상은 작은 광장이 되었다. 해가 지고 나면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평상에 모였고, 누군가는 삶은 옥수수를, 누군가는 찐 고구마를 가져왔다. 누가 가꾸지도 않았는데 집 앞 공터에서 저절로 자란 방아잎을 따서 풋고추, 부추와 함께 전을 부쳐 내오는 집도 있었다. 전이 나오면 반드시 누군가가 동네 점방에서 막걸리를 사왔다.
처음에는 동네 돌아가는 이야기와 일자리 소식이 오갔다. 누구는 새로 들어간 공장 월급을 말했고, 누구는 물가가 터무니 없이 올랐다고 혀를 찼다. 아이들은 어른들 틈에서 옥수수를 집어 먹으며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나 막걸리 주전자가 몇 번 돌고 나면 분위기가 달라졌다. 사소한 말꼬투리가 싸움으로 번졌고, 누군가는 술기운에 얼굴이 벌게져 삿대질을 했다. “다시는 보지 말자!”는 고함과 함께 자리를 박차고 나가는 사람도 있었다.
하지만 며칠만 지나면 그들은 다시 평상에 모였다. 아무 일도 없었던 듯, 국수 그릇을 돌리고, 아이들 머리를 쓰다듬으며 웃음을 나눴다. 그 평상은 단순한 쉼터가 아니었다. 하루하루 버텨내던 사람들이,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새삼 확인하는 자리였다. 서로 다투고도 다시 마주 앉을 수 있다는 것, 그게 곧 동네의 힘이었는지도 모른다.
여름방학이면 독수리산이라 부르던 동네 뒷산을 넘어 이기대 바닷가로 향했다. 그곳은 나환자들의 집단 거주지가 있어 어른들은 질색했지만, 우리에게는 그저 시원한 바다가 기다리는 곳이었다. 바다에서 지치면 누군가가 해변에서 불을 피우고, 분유 깡통에 바위에서 떼어낸 홍합을 넣고 끓였다. 우리가 담치라 부르던 그 홍합은 짭짤한 바닷물 맛이 그대로 밴 최고의 별미였다.
어느 해 여름, 바닷속 술병 조각에 발을 크게 베었을 때 친구들이 나를 부축해 산을 넘어왔다. 어떻게 연락이 닿았는지 합판공장에서 일하시던 어머니가 헐레벌떡 달려와 택시로 병원까지 데려가셨다. 발을 꿰매는 동안 어머니의 떨리는 손과 걱정 어린 눈빛, 그리고 병원까지 따라와 기다려준 친구들의 모습이 지금도 선명하다.
용호동의 겨울밤은 길었다. 집집마다 연탄불을 아껴 쓰던 시절, 동네 빈 공터에 천막극장이 세워졌다. 장대와 밧줄로 둘러맨 천막 안에서 하루 저녁이면 영화가 상영되었다. 천 위로 바람이 스며들고 흙바닥의 냉기가 올라왔지만, 사람들은 모여들었다. 아이들은 앞자리에 웅크려 앉아 숨을 죽였고, 어른들은 돗자리를 깔고 몸을 웅크렸다. 스크린은 흰 천 한 장이었고, 소리는 거칠었지만, 그곳에서는 꿈이 상영되고 있었다.
도시 한복판에서 천막을 치고 영화를 봤다고 하면 믿지 못하겠다는 사람들도 있다. 지금은 낯설게 들릴지 모른다. 하지만 그 시절 우리에겐 일상이었다. 동네 사람들이 모여 같은 장면에 웃고, 같은 대목에서 잠시 눈을 적시던 그 시간들. 가난해도 함께 웃을 수 있다는 것, 그것이 내가 배운 첫 번째 희망이었다.
용호동을 떠난 지 30여 년이 훌쩍 넘은 어느 날 그곳을 다시 찾았다. 어디가 어딘지도 알아볼 수 없게 변해 있었다. 다만 큰 길과 샛길, 골목길의 흔적만이 남아 있었고, 우리가 살던 집들은 모두 낮은 층의 빌라들로 메워져 있었다. 그 평상도, 공동 수돗가도, 천막극장이 서던 빈터도 모두 사라졌다.
하지만 괜찮다. 내 마음속에서는 여전히 그때 그 추억들이 살아 숨 쉬고 있으니까. 묵 파시던 할머니의 구수한 사투리, 연탄불 위에서 녹아내리던 달고나, 방아잎이 들어간 부추전 굽는 냄새가 퍼지던 여름밤, 그리고 바닷가에서 후후 불어 먹던 홍합국물, 천막 안에서 함께 꾸던 꿈까지.
시골의 논두렁도, 외갓집 툇마루도 없었지만 상관없다. 좁은 골목과 다닥다닥 붙은 집들 사이에서도 충분히 따뜻한 고향의 정을 배웠으니까. 서로 나누고 돌보며, 때로는 다투고 화해하면서 함께 자라났으니까.
고향은 결국 마음이었다. 그 마음은 지금도 내 안에서 용호동의 모든 계절을 기억하며, 언제든 그곳으로 돌아갈 수 있게 해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