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셈법의 전환

공정이라는 차가운 계산기

by 박계장

중앙 난방의 기계음이 멈춘 지 서너 시간. 온기가 빠져나간 사무실 공기가 서늘하다. 책상 아래로 가라앉은 냉기가 양말 틈을 파고들어 발목을 타고 오른다. 모니터 앞에 무심하게 놓인 공무원증을 집어든다. 손끝에 닿는 투명 플라스틱의 감촉. 딱딱하고 매끄러운 그 물성은 지난 33년, 내가 이 조직에 단단히 뿌리내리고 있다는 증거였다.


매일 아침, 청사 로비의 보안 게이트에 이 카드를 댈 때 울리는 짧은 신호음. 굳게 닫혀 있던 차단기가 열리고, 외부인과 내부인을 가르는 경계선 안으로 발을 들여놓는 순간. 나는 그 짧은 통과의 의식을 통해 내가 이 거대한 시스템의 승인받은 일원임을 확인하곤 했다. 그 반복되는 확인이 주는 은밀한 만족감, 혹은 안전한 성벽 안에 들어왔다는 안도감. 어쩌면 내 지난 33년은 그 얄팍한 우월감에 기대어 온 시간이었는지도 모른다. 이제 와 자문해 본다. 이 단단한 플라스틱이 나를 보호하는 방패였는지, 아니면 타인의 고단함을 보지 못하게 막는 가림막이었는지.


부인하지 않겠다. 나는 그동안 ‘공정’이라는 단어를 꽤나 차갑게 해석해 온 편이다. 내게 공정이란 투입한 노력만큼 산출을 얻는, 오차 없는 수학적 계산이었다. 시험이라는 단 하나의 잣대. 그 좁은 문을 통과한 이와 그렇지 못한 이 사이의 격차는 당연한 ‘능력의 결과’라 여겼다. 비정규직 처우 개선에 관한 뉴스가 흘러나올 때면 머리로는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명치끝에는 설명하기 힘든 둔탁한 거부감이 걸려 있었다. 나는 시험이라는 관문을 통과했고, 당신들은 그렇지 않았다는 셈법. 내면의 저울은 이미 내 쪽으로 기울어져 있었다.


그 견고했던 셈법에 균열이 간 건, 최근 고용노동부 장관의 업무보고를 받던 대통령의 한 마디 때문이었다.


“고용이 불안하면 처우라도 나아야 하는 것 아닙니까?”


문장은 건조했지만 파장은 길었다. 나는 안정을 ‘기본값’으로, 임금과 복지를 그 위에 얹는 ‘보너스’로 여겨왔다. 하지만 그 말은 셈을 다시 하라고 요구하고 있었다. 누군가가 감당하는 ‘불안’을 비용으로 환산해야 한다는 논리. 찾아보니 북유럽 등 복지 선진국에서는 이미 통용되는 상식이었다. 그곳에선 고용이 불안정한 비정규직이 정규직보다 더 높은 시급을 받는 경우가 드물지 않다고 했다. 학자들은 이를 ‘유연안정성’이라 부른다지만, 내 눈에는 그저 ‘사람에 대한 예의’로 보였다. 우리에겐 그토록 낯선 논리가 그들에겐 이미 오래된 약속이었다는 사실에 얼굴이 화끈거렸다.


시선이 텅 빈 사무실 허공에 머문다. 문득 실무자 시절, 함께 일했던 한 직원의 얼굴이 떠올랐다. 당시 보건복지부 신규 사업으로 업무량이 증가했고 우리는 내려온 예산으로 기간제 근로자를 채용했다. 계약 기간 11개월. 퇴직금 지급 의무가 발생하지 않는 마지노선이자, 행정이 허락한 최대한의 효율이었다.


그는 성실했다. 주어진 몫을 책임감 있게 해냈을 뿐만 아니라, 삭막한 사무실 공기를 부드럽게 만드는 밝은 기운을 가진 친구였다. 그 됨됨이가 아까워 이듬해 사업이 재개되었을 때 우리는 주저 없이 그를 다시 불렀다. 물론 퇴직금 발생을 막기 위한 한 달의 공백을 둔 재계약이었다. 하지만 동행은 딱 거기까지였다. 연속 2년을 초과하여 근무하면 정규직으로 전환해야 한다는 규정은 넘을 수 없는 벽이었다.


그는 그해 우리 팀을 떠나 다른 팀의 기간제로 옮겨갔다. 그렇게 시청 본청과 보건소를 오가며 5년 넘게 일했지만, 서류상 그는 언제나 ‘11개월짜리 기간제 근로자’였다. 실상은 아이러니하다. 시청에는 정식 발령을 앞두고 실무수습을 온 신규 직원들이 종종 배치되곤 한다. 시험이라는 바늘구멍을 통과한 ‘예비 정규직’들이었지만, 정작 행정 포털 앞에서는 속수무책이었다. 그들에게 아이디 생성부터 전산시스템으로 공문 기안하는 법까지 가르치는 건 늘 그였다. 정규직인 ‘진짜 신입’을 가르치는 ‘베테랑 기간제’. 실력은 이미 고참급이었지만, 신분은 늘 제자리였다.


그러나 시청의 시계는 그에게 늘 가혹하게 흘렀다. 매년 12월이면 그는 짐을 쌌고, 1월이 지나서야 다시 짐을 풀었다. 그때 나는 그것을 ‘예산 절감’이라 불렀고, ‘규정 준수’라 자위했다. 행정의 효율이라는 미명 아래, 서류 너머에 사람이 있다는 사실을 애써 외면했다. 한 청년의 숙련된 시간을 조각내어 헐값에 썼다는 사실을, 나는 아프게 인정한다. 나의 평온한 연말이 누군가의 기약할 수 없는 계약 종료 위에 서 있었다는 사실을 말이다.


2026년부터 노동 정책이 변한다고 한다. 동일가치노동 동일임금, 공공부문의 임금 실태 조사. 행정 용어들이 나열된 보도자료를 읽어 내려간다. 활자들 사이에서 차가운 계산기 소리 대신, 사람의 맥박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누군가에게 주어지는 수당이 특혜가 아니라, 그가 감당하는 불안정한 고용에 대한 정당한 지불이라는 인식. 내가 가진 안정이 누군가에게는 닿을 수 없는 꿈이라면, 그들이 겪는 불안에 대해 내가 가진 것의 일부를 떼어내는 것이 어쩌면 더 정확한, 그리고 더 어른스러운 셈법일지 모른다.


퇴근 시간은 이미 훌쩍 지났다. 사무실을 나선다. 물론 변화가 모든 이에게 환영받지는 못할 것이다. 여전히 누군가는 억울하다고 말할지 모른다. 치열한 경쟁을 뚫은 정규직에 비해, 고용이 불안하다는 이유만으로 비정규직에게 더 많은 보상을 주는 건 오히려 역차별이 아니냐고. 그 상대적 박탈감에서 오는 항변을 나는 탓할 수 없다. 나 역시 오랫동안 그 ‘합리적’인 셈법을 방패 삼아 안도해왔으니까. 하지만 이제는 인정해야 한다. 우리의 안정이 타인의 불안을 헐값에 산 결과는 아니었는지. 그 불편한 진실을 마주하는 것이 이 조직에서 33년이나 밥을 먹은 내가 갚아야 할 뒤늦은 부채일 것이다.


시청을 나서 연산지하철역으로 향하는 길, 밤바람이 제법 매섭다. 파고드는 한기에 몸이 절로 움츠러든다. 나는 얼른 코트 깃을 세워 목을 감싸고, 찬 바람이 들어올세라 옷자락을 꽉 쥔다. 문득, 누군가에게 필요한 건 거창한 구호가 아니라 이처럼 찬 바람을 막아줄 한 겹의 외투였음을 새삼 느낀다. 승자만이 독식하는 정글이 아니라, 조금 늦게 걷더라도 낙오되지 않는 운동장. 계절은 돌고 돌아 언젠가 봄이 오겠지만, 사람의 봄은 우리가 서로의 언 손을 잡을 때 비로소 시작될 것이다.


이제 득실만 따지던 낡은 계산기는 주머니 깊숙이 넣는다. 정년까지 남은 5년. 이 시간은 나에게 ‘덤’이 아니라, 그동안 외면했던 ‘빚’을 갚는 시간이어야 한다. 거창한 정책을 입안하는 힘은 없을지 모른다. 하지만 적어도 규정 뒤에 숨어 사람의 온기를 셈하지 않는 비겁함과는 결별하려 한다. 후배들에게, 그리고 스쳐갈 또 다른 ‘그 친구’들에게 차가운 벽이 아닌, 사람 냄새 나는 길을 터 주는 것. 그것이 내가 마지막으로 공직에서 풀어야 할 가장 어려운 문제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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