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훈계 대신 기다림

서성이는 청춘들을 위한 회고

by 박계장

결혼한 지 서른 해가 다 되어간다. 1996년 11월, 낯선 생의 입구에서 서성대던 청년은 이제 2025년 12월의 초입에 서서 지나온 길을 복기한다. 세월은 숫자로 환산할 때만 아득할 뿐, 기억은 자꾸만 특정 지점에서 되감기를 반복한다. 부산 부전역 인근, 부전전자종합시장 거리. 혼수를 보러 나란히 걷던 그날의 풍경이다.


가전 매장들이 뿜어내는 번쩍이는 간판과 전시용 TV 화면이 시야를 어지럽게 채우고 있었다. 냉장고 문을 여닫는 둔탁한 소음과 세탁기 성능을 읊어대는 판매원의 목소리가 뒤섞인 거리에서 우리는 자꾸만 말이 줄어들었다. 사랑한다는 고백이 냉장고 가격표라는 숫자로 변해버린 현실이 낯설고 무거웠던 탓이다. 아내는 세탁기 통 내부를 살폈고, 나는 무의식적으로 가격표의 숫자를 먼저 읽었다. "이게 더 낫겠지?"라는 물음이 오갔지만, 그것은 취향의 공유라기보다 계산의 언어에 가까웠다. 새 가전의 매캐한 플라스틱 냄새와 사람들의 땀 냄새가 뒤섞인 공기 속에서, 나는 너무 일찍 어른의 언어를 배워버린 청년이었다.


가장 선명한 것은 아내의 목소리다. 가격표를 훑어내린 아내는 곧장 주인에게 몸을 기울였다. "사장님, 이건 너무 비싸요. 현금으로 하면 좀 더 빠지죠?" 상인은 웃으며 말을 돌렸으나 아내는 한 뼘도 물러서지 않았다. 주위 손님들의 시선이 닿는 것 같아 묘한 민망함이 차올랐다. 나는 아내의 팔꿈치를 살짝 잡고 낮게 읊조렸다. "그만하자. 그냥 다른 데 가서 보자."


그 한마디가 발단이었다. 아내는 굳은 얼굴로 나를 돌아보았다. 물건값을 깎는 일이 점잖지 못하다고 여기는 나의 그 얄팍한 양반 기질이 아내를 화나게 한 모양이었다. 한 푼이라도 아끼려 애쓰는 자신을 부끄러워하는 듯한 나의 태도에 아내는 깊은 서운함과 배신감을 느낀 듯했다. "지금 뭐 하는 건데? 이게 나만 좋자고 이러는 거야?" 서늘하게 박히는 그 눈동자 속에서 나는 든든한 아군이 아니라 남보다 못한 방관자였다. 둘이 산다는 것은 합리적인 결론을 도출하는 과정이 아니라, 매 순간 누구의 곁에 서 있을지를 결정하는 일임을 그제야 알았다. 결혼은 식장에 들어가기 전, 그 소란스러운 시장 거리에서 이미 시작되고 있었다.


우리는 근처 백화점으로 발을 옮겼다. 시장에서 본 물건이 그곳에선 어떤 가격표를 달고 있는지 확인하고 싶었다. 시장의 빛이 거칠게 쏟아졌다면, 백화점의 빛은 매끈하게 정돈되어 있었다. 우리는 진열대 앞에서 오래도록 말이 없었다. 비싼 쪽이 늘 옳은 것은 아니었지만, 싼 쪽이 정답인 것도 아니었다. 문제는 그 간격을 메울 여유가 우리에게 있는가였다. 사랑에서 살림으로, 다시 사랑으로 돌아가려 애쓰던, 고단한 왕복의 시간이었다.


최근 한 동영상 플랫폼에서 지게차을 운전하며 홀로 사는 마흔 살 남자의 일상을 보았다. 세금을 떼고 손에 쥐는 돈은 이백오십만 원 남짓. 그는 원룸 월세를 내고 보험료를 챙긴 뒤, 매달 육십만 원가량을 꼬박꼬박 저축한다고 했다. 남은 돈으로 퇴근 후 맥주 한 캔을 즐기고, 가끔은 땡처리 항공권으로 해외여행을 떠난다. 화면 속 그의 얼굴은 단정했고, 스스로 차려낸 저녁상 앞에서 그는 홀가분해 보였다.


그의 벌이는 한 남자의 생을 지탱하기엔 부족함이 없어 보였으나, 타인의 삶까지 등에 업어야 하는 자리에 서는 순간 이야기는 달라질 터였다. 그 소득으로 가정을 꾸렸다면 매달 쌓이는 육십만 원의 저축도, 퇴근길의 맥주 한 잔도, 가끔 누리는 해외여행의 호사도 그에게는 허락되지 않았을 것이다. 오히려 그것들은 생계를 위협하는 사치나 무책임한 가장의 허영으로 치부되었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이 서글프게 다가왔다. 만족하며 웃고 있는 그의 얼굴 위로, 30년 전 부전시장에서 가격표를 만지작거리던 나의 젊은 날이 겹쳐 보였다.


그의 삶은 분명 정돈되어 있었지만, 그 정돈됨이 ‘포기’를 담보로 성립된 것이라는 사실이 못내 씁쓸했다. 우리가 살았던 시대의 결혼이 '고생을 함께 나누는 결합'이었다면, 지금의 세대에게 결혼은 '가진 여유를 압수당하는 형벌'이 되어버린 듯하다. 그가 쥐고 있는 육십만 원의 저축과 맥주 한 잔의 자유는, 어쩌면 우리 사회가 한 개인에게 허락한 최소한의 숨구멍일지도 모른다. 그 숨구멍을 지키기 위해 그는 누군가와 함께 늙어가는 미래라는 지도를 접어 서랍 깊숙이 넣어둔 셈이다.


나 역시 이제는 자식들에게 결혼을 권하지 못한다. 우리가 겪었던 그 치열한 삶의 시작이, 누군가에게는 평화로운 일상을 무너뜨리는 위협이 될 수도 있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지게차 운전사의 웃음이 깊어질수록 우리 사회의 한 구석은 조금씩 야위어 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의 자유가 기쁜 선택이라기보다, 감당하기 힘든 무게를 피해 겨우 도착한 외로운 섬처럼 느껴져 못내 마음이 무거웠다.


어느덧 2025년의 끝자락이다. 퇴근길, 익숙한 현관에 들어서면 삼십 년 전 부전시장의 소란스러웠던 불빛 대신 정제된 침묵이 나를 맞이한다. 이 정적은 그날 우리가 시장과 백화점을 왕복하며 치열하게 깎고 다듬어낸 삶의 결과물일 것이다. 가끔은 여전히 통장 잔액을 살피며 긴 한숨을 내쉬지만, 그 거친 길 위에서 길을 잃지 않고 여기까지 버텨왔다는 사실만으로도 가슴 한구석이 서글프면서도 묵직해진다.


나는 이제 어른의 역할을 다시 생각한다. 결혼을 종용하는 사람이 아니라, 그들이 마주한 '맥주 한 잔의 자유'가 얼마나 간절한 것인지 먼저 헤아려주는 사람으로 남고 싶다. "우리 때는 말이야"로 시작하는 훈계 대신, 그들이 저마다 마주한 삶의 가격표 앞에서 망설이는 그 긴 침묵을 묵묵히 기다려주고 싶다. 지게차를 운전하는 그 남자의 저녁도, 결혼을 미루는 내 아이들의 고민도, 결국 각자의 방식으로 삶의 무게를 가늠해가는 치열한 서성거림이기 때문이다. 나는 그 침묵 앞에서 섣불리 입을 열지 않기로 한다. 그저 저무는 한 해의 끝을 조용히 응시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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