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포다리 합승 택시, 그리고 23만 원의 청춘
1993년 봄, 첫 발령지에서 받아 든 급여 명세서에는 ‘기본급 230,000원’이라는 숫자가 찍혀 있었다. 기형적으로 가짓수만 많은 수당을 더해도 봉투 두께는 얄팍했다. 합격 통지서를 손에 쥐었을 때의 그 묵직했던 자부심을 현실의 저울에 올리자 눈금은 허무할 정도로 움직이지 않았다. 가벼운 주머니와 달리, 낙동강을 건너야 하는 매일의 몸은 무거웠다.
당시 집은 강서구 대저1동, 근무지는 서구청이었다. 스물둘, 사무실 막내의 아침은 선배들보다 먼저 문을 열고 밤사이 내려앉은 먼지를 걷어내는 것으로 시작됐다.
내가 속한 위생과 사무실의 오후는 흡사 형사 기동대를 방불케 했다. 민원인 대기석에는 전날 밤 심야 영업 단속에 적발된 업주들이 줄지어 앉아 있었다. 짙은 화장에 화려한 옷차림을 한 여사장들이 관공서의 회색빛 벽과 기묘한 대조를 이루며 앉아 있는 풍경은 낯설고도 이채로웠다.
그 시절은 국가가 국민의 취기마저 통제하던, 바야흐로 ‘범죄와의 전쟁’ 시대였다. 자정이 넘으면 술잔을 내려놓아야 했고, 선량한 풍속을 해친다는 이유로 네온사인은 강제로 꺼졌다. 생계가 걸린 업주들은 영업정지 처분을 과징금으로 대체해 달라며 읍소했다. 개중에는 신문지에 싼 현금 뭉치를 들고 오는 이들도 있었다. 지금이야 고지서를 받아 은행에 납부하지만, 그때는 담당 공무원이 현금을 받아 철제 금고에 보관했다가 행정처리가 끝나면 대신 납부하기도 했다. 그건 급한 마음에 과징금처분을 받겠다고 해놓고는 미납하는 사례가 많았기 때문이었다.
절차는 허술했고 유혹은 가까이 있었다. 서랍 속의 현금 뭉치는 때로 누군가의 팍팍한 양심을 시험했다. 과징금 대납이 늦어지거나, 처리 과정에서 배달 사고가 나기도 했다. 어느 날은 출근 시간이 한참 지나도 선배의 자리가 채워지지 않았다. 전날 밤 집으로 들이닥친 수사관들에게 연행되었다는 소문만 무성할 뿐, 우리는 주인 잃은 그 서늘한 빈자리를 애써 외면하며 묵묵히 서류를 넘겼다.
퇴근길은 늘 예고가 없었다. 긴장을 풀기 위한 회식은 업무의 연장이자 피할 수 없는 의전이었다. 남포동 고기 골목의 자욱한 연기 속에서 나는 부지런히 집게를 놀렸다. 불판 위 고기가 타지 않게 뒤집고, 비어가는 선배들의 술잔을 채웠다.
"박 주사, 한 잔 더 하고 가."
거절할 수 없는 제안에 호프집까지 돌고 나오면 도시는 이미 불이 꺼져 있었다. 공항행 버스는 끊긴 지 오래였고, 남은 선택지는 택시뿐이었다. 하지만 박봉의 월급쟁이에게 다리 건너 대저동까지 혼자 타고 가는 택시는 사치였다. 나는 익숙하게 구포역행 택시를 잡았다. 진짜 귀가는 거기서부터였다.
자정이 임박한 구포역 앞은 흡사 도떼기시장 같았다. 강 건너 김해나 대저로 들어가려는 사람들과 빈 차로 나올 수 없다며 버티는 기사들 사이의 실랑이가 끊이질 않았다. 미터기는 꺼져 있었다. "따블, 따따블"이 오가는 흥정의 틈바구니에서 살아남는 유일한 방법은 '합승'이었다.
"대저 안동네! 김해! 두 명 더!"
기사의 외침에 정류장을 서성이던 피곤한 눈동자 몇이 반응했다. 행선지가 같은 서너 명이 눈치껏 모이자 굳게 닫혔던 차 문이 열렸다.
"타이소! 대저 천 원."
택시라기보다 승용차 모양을 한 마을버스에 가까웠다. 좁은 뒷좌석에 낯선 어른 셋이 구겨지듯 앉았다. 엉덩이를 들이밀고 자리를 잡으면 좁은 차 안에는 소주 냄새와 땀 냄새, 그리고 고단한 하루가 남긴 비릿한 체취가 뒤섞여 떠다녔다.
택시가 구포다리에 진입하면 차창 밖으로 검은 낙동강 물결이 가로등 불빛을 받아 번들거렸다. 비좁은 뒷좌석은 침묵했다. 옆 사람의 어깨가 닿을 때마다 반사적으로 몸을 창쪽으로 웅크렸지만, 덜컹거리는 차체 안에서 타인의 온기를 피할 방법은 없었다.
옆자리의 중년 사내도, 조수석에 앉은 지친 기색의 여자도 말이 없었다. 그 정적을 채우는 건 묘한 동질감이었다. 유혹과 감시가 공존하는 전쟁터 같은 하루를 버텨냈다는 안도감, 그리고 이 불편을 감수해서라도 천 원을 아껴야 한다는 팍팍함이 차 안에 습기처럼 찼다.
주머니 속에서 천 원짜리 지폐 한 장을 만지작거렸다. 손끝에 닿는 까슬한 종이의 감촉. 하루 종일 여기저기 치이며 구겨진 내 마음도 딱 이 지폐 꼴이겠거니 싶어, 나는 그 얇은 종이를 친구 손을 잡듯 꽉 쥐었다. 구포다리는 길었다. 타이어가 콘크리트 다리의 이음매를 지날 때마다 '드르륵, 드르륵' 규칙적인 소음이 뼈마디를 울렸다.
대저 안동네 어귀, 기사에게 천 원을 건네고 차에서 내렸다. 멀어지는 붉은 미등 뒤로 매캐한 매연 냄새가 남았다. 택시가 내려준 큰길에서도 집은 수로를 따라 한참을 더 들어가야 했다. 낮에는 물을 길어 올려 가슴까지 넘실대던 수위가, 밤이 되어 물길을 막으면 무릎 높이로 잦아들어 있던 수로. 그 곁을 따라 드문드문 선 가로등 불빛 아래, 터벅터벅 걷는 내 발소리만이 고요한 밤을 채웠다.
이제 구포다리는 새로 놓였고, 합승이라는 단어는 옛말이 되었다. 앱 하나면 택시가 집 앞까지 조용히 미끄러져 오는 세상이다. 본가로 가기 위해 나는 이제 구포다리 대신 덕천IC로 올라 시원하게 뚫린 남해고속도로 위를 내 차로 달린다. 누구의 어깨도 닿지 않고, 요금 때문에 얼굴 붉힐 일도 없는 쾌적한 공간이다.
가끔 구포역 앞을 지날 때면, 문득 그 시절 합승 택시에 몸을 싣고 구포다리를 건너던 덜컹거림이 떠오른다. 모르는 사람들과 살을 맞대고 시린 옆구리를 데우던 밤. 꽉 쥐고 있던 천 원짜리 지폐의 그 눅눅한 감각이, 가죽 핸들을 잡은 손바닥 위로 희미하게 되살아나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