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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가지로 설명되지 않는 것들

틀로는 담을 수 없는 마음에 관하여

by 박계장

MBTI를 처음 접한 건 15년 전이었다. 시청의 학비 지원을 받아 야간 대학원에 다니던 시절이었다.


낮에는 일했고, 저녁이면 강의실로 향했다. 형광등 불빛 아래 지친 얼굴들 사이에서 '인간행동과 사회환경'이라는 과목에서 처음으로 칼 융의 심리유형 이론을 배웠다. 교수님의 목소리는 단조로웠지만, 그날만큼은 내 귀에 선명히 들려왔다.


교수님은 수업 시간에 미국 기관과 협의해 도입한 MBTI 검사지를 나눠주셨고, 학생 전원이 자신의 성격유형을 찾아보는 시간을 가졌다. 연필로 칠해진 원들이 모여 나를 정의한다는 게 어쩐지 우스웠다.


그때 나는 INTP. 논리와 분석, 거리 두기와 사색을 즐기는 유형이었다. 결과를 받아든 순간, 묘한 안도감이 들었다. '아, 나는 이런 사람이구나.' 어딘가에 소속된 듯한 느낌이었다.


MBTI는 이사벨 브릭스 마이어스와 그녀의 어머니 캐서린 쿡 브릭스가 만든 검사다. 스위스 정신과 의사 칼 융의 이론을 바탕으로,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적성에 맞는 직업을 찾기 위해 개발되었다. 전쟁 속에서도 사람을 이해하려 했던 그들의 노력이 지금의 우리에게까지 영향을 미친다는 생각이 들었다.


M은 Myers, B는 Briggs. MBTI는 Myers-Briggs Type Indicator, 즉 마이어스-브릭스 성격유형 지표다.


사람의 성격을 네 가지 축, 외향/내향, 감각/직관, 사고/감정, 판단/인식으로 나누고, 이 조합으로 16가지 유형을 도출한다. 단 네 글자로 사람을 정의한다. 간단하고 명쾌하다. 그래서 오히려 더 단순화된 틀일 수 있다.


그날 내가 받은 결과는 INTP였지만, 과연 그게 나의 전부였을까? 비 오는 날 창가에 기대어 멍하니 빗방울을 세는 나, 친구의 웃음에 함께 웃다가 문득 슬퍼지는 나, 이런 복잡한 나를 네 글자가 어떻게 담을 수 있을까?


사람은 매일 조금씩 달라진다. 아침과 저녁이 다르고, 혼자일 때와 함께일 때가 다르다. 햇살이 쏟아지는 날과 회색빛 하늘 아래서도 다르다.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나는 같은 사람이지만, 또 다른 사람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우리는 누군가를 성격 유형 하나로 단정 짓는다. 예능에서, 드라마에서, 직장 회의에서도 "넌 P니까 그렇지." "역시 너는 T다." 그렇게 말하곤 한다. 마치 그 네 글자가 그 사람의 모든 선택과 행동을 설명할 수 있다는 듯이.


편리하지만 위험한 방식이다. 유형은 이해의 시작이 될 수 있지만, 그 자체가 결론이 되어서는 안 된다. 사람을 알아가는 과정에서 첫 번째 문을 여는 열쇠일 뿐, 그 안의 모든 방을 보여주지는 않는다.


예전에 함께 일하던 상사가 있었다. 보고서에서도, 회의에서도 효율과 결과를 중시하던 사람이었다. 목소리에는 항상 단단함이 묻어났고, 회의실에 들어서면 공기가 긴장했다. 나는 속으로 'ESTJ 유형 아닐까' 생각했다. 그의 모든 말과 행동을 그 틀 안에서만 해석하려 했다.


어느 날, 그가 내 보고서를 넘기다 말했다. "여기, 이런 감성적인 말은 빼라. 보고서에 누가 이런 말을 넣는다더노." 사투리가 묻어난 그의 말투는 날카로웠다. 손가락으로 내 보고서의 한 문장을 가리키며, 그는 미간을 찌푸렸다.


말투는 단단했고, 감정은 절제돼 있었다. 그 순간엔 차갑게 느껴졌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그의 분명한 원칙이었다. 나는 그날 늦게까지 남아 보고서를 고쳤다. 감성적인 표현들을 지우며, 그를 더 'ESTJ'라고 확신했다.


시간이 흐르면서, 나는 그가 내가 상상했던 유형과는 다른 면을 가진 사람임을 알게 되었다. 회의실 밖에서의 그는 달랐다.


결재 서류 앞에서 머뭇거리던 직원을 향해 "잘하고 있다"고 먼저 말을 건넸고, 출장 후엔 작은 간식을 하나하나 팀원 책상 위에 놓고 다녔다. 회식 자리에서도 늦게까지 남은 후배가 일어나자 "집에 조심해서 가라"고 끝까지 챙겼다. 그의 눈빛은 걱정으로 가득했다.


그런 모습을 보고서야, 나는 '그는 ESTJ니까'라고 성급히 규정했던 내 생각을 되돌아보게 되었다. 내가 그에게 붙인 라벨이 얼마나 얄팍했는지 깨달았다. 사람은 단일한 존재가 아니라, 여러 모습이 공존하는 복합체였다.


그래서 나는 MBTI를 전적으로 믿지 않는다. 그렇다고 무시하지도 않는다. 가끔은 나 자신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기도 한다. 내가 왜 사람들 사이에서 지치는지, 왜 계획보다 즉흥을 선호하는지 설명해주니까.


MBTI는 사람을 바라보는 하나의 창이 될 수는 있다. 하지만, 그 창으로 본 모습이 전부라고 믿는 순간, 우리는 사람을 틀로만 보게 된다. 창 밖의 풍경이 계절에 따라 변하듯, 사람도 시간과 상황에 따라 달라진다.


나는 여전히 INTP로 분류된다. 하지만 어느 날은 감정이 먼저고, 어떤 날은 직관보다 현실이 앞선다. 친한 친구들과 있을 땐 마치 외향적인 사람처럼 이야기의 중심에 서기도 한다. 잘못을 저지른 후배 앞에서는 차가운 논리보다 따뜻한 위로가 먼저 나오기도 한다.


사람은 흐름이다. 하루에도 몇 번씩 결이 바뀌고, 만나는 사람, 지나온 시간에 따라 마음도 달라진다. 아침에 일어나 창문을 여는 순간의 나와, 밤늦게 혼자 글을 쓰는 나는 같으면서도 다르다.


나는 이제, 누군가의 성격을 아는 것보다 그가 어떤 순간에 어떤 결정을 내리는 사람인지 그게 더 궁금해졌다. 위기 앞에서 어떤 선택을 하는지, 행복할 때 누구와 나누고 싶어 하는지, 슬픔이 찾아왔을 때 어떻게 마주하는지. 그런 순간들이 그 사람을 더 진실되게 보여준다.


유형은 틀일 뿐, 사람은 틀 안에 담기지 않는다. 우리는 각자의 결을 따라, 틈과 틈 사이에서 흘러가는 존재다. 때로는 거칠고, 때로는 부드럽게. 네 글자로 정의될 수 없는, 무한한 가능성의 존재들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왜 이런 틀에 집착할까? 아마도 이해하기 힘든 세상 속에서, 잠시나마 안정감을 얻고 싶어서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진짜 안정감은 틀 안에서 오는 게 아니라, 틀을 넘어서는 용기에서 오는 것이 아닐까. 자신도, 타인도 정의내리지 않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열린 마음에서.


오늘도 나는 INTP로 불리겠지만, 그것은 나의 모든 것이 아니다. 그저 하나의 이름일 뿐, 내가 흐르는 방향의 작은 표지판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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