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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벼워 지는 삶

덜어내는 것과 지켜내는 것

by 박계장

삶의 끝을 지켜본 사람은 오늘을 다르게 산다. 응급실에서 일했던 한 사람의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숨이 가빠오는 이들이 실려 오고, 짧은 숨이 멎으며 자리를 비우는 순간이 이어지는 곳. 그는 수많은 마지막을 곁에서 맞이했다고 했다. 모두의 떠남은 달랐지만, 그 순간은 한결같이 고요하였다.


그는 말했다. 그렇게 죽음을 반복해 마주하다 보니, 무언가를 향해 다급히 달려가는 삶이 더는 마음에 와 닿지 않았다고. 자신 역시 매 순간 스스로에게 "이 일을 위해 소중한 것들을 포기해야 한다면, 과연 그만한 가치가 있는가"라는 질문을 던지게 되었다고 했다. 그 말은, 내가 겪어온 상실들과 겹치면서 더욱 절실하게 다가왔다.


오래전, 나 역시 한 사람의 마지막을 가까이서 보았다. 외삼촌이었다. 긴 고독과 말하지 못한 속앓이 끝에 그는 삶의 손을 놓았다. 달려간 방 안은 창문이 반쯤 열려 있었고, 찬 공기가 발치까지 스며들었다. 침대 위에는 이미 온기가 떠난 몸이 있었고, 한 손은 이마에 닿은 채 굳어 있었다. 구급대원들이 조심스레 그 팔을 내려 들것에 옮겼다.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는 순간까지, 나는 그 모습을 놓지 못했다.


외삼촌은 딸을 먼저 보낸 아픔을 품고 살았다. 초등학교 2학년에 올라가던 아이를 교통사고로 잃은 뒤, 그는 말수가 줄었고, 경제적으로 넉넉하지 못한 상황에서 외숙모와 사촌동생을 돌보며 살았다. 명절 때 가끔 만나면 공무원이 된 나를 자랑스러워했다. 하지만 자식을 먼저 보낸 그의 마음이 어떤 것이었는지, 그 깊은 상실감 속에서 어떻게 하루하루를 견뎌내고 있었는지는 그때 미처 헤아리지 못했다.


처조카는 스물일곱 살의 청년이었다. 대장암 진단을 받고 2년여간 투병했지만 결국 한계를 넘지 못했다. 장례식장에서 큰처남 내외는 생각보다 덤덤한 모습이었다. 오히려 그 조용한 모습에서 그동안 겪었을 긴 고통의 시간들이 전해졌다. 치료 과정에서 점점 힘겨워하는 아들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던 그들에게, 어쩌면 아이의 아픔이 끝난 것에 대한 복잡한 안도감도 있었을 것이다.


얼마 전, 오랫동안 가깝게 지내온 선배가 호스피스 병동에 입원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퇴직한 지 3년밖에 되지 않았는데, 아마도 그는 창가의 침대에서 남은 시간을 받아들이고 있을 것이다. 그 소식을 들었을 때, 나의 하루 또한 언제 꺼질지 모른다는 생각이 스쳤다.


그런 생각은 선배의 소식만으로 생긴 것이 아니었다. 지금까지 보내온 소중한 사람들과, 그들이 남긴 빈자리에서 더 깊어졌다. 그래서 나는 자주 걸음을 멈춘다. '한 번뿐인 이 삶에서, 이 일을 위해 정작 소중한 것들을 뒤로 미뤄야 하나.' 그 질문 앞에서 덜어낼 것과 지켜야 할 것이 분명해진다.


어제를 붙잡지 않고, 막연한 내일을 위해 오늘을 미루지도 않으려 한다. 오늘 하루는 하루의 몫만큼 다해 살아내고, 그 하루를 허투루 보내지 않으려 한다. 내일도 오늘처럼 당연히 주어질 것이라 믿지만,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을 안다. 우리는 유한한 존재다. 언제 끝날지 알 수 없는 삶이기에, 그래서 더 소중한 나의 하루를 위해 잘 살아야 하지 않을까.


삶은 매일 조금씩 가벼워져야 한다. 불필요한 걱정과 욕심을 덜고, 끝까지 품고 갈 것들만 남기는 일. 어쩌면 그것이 나답게 살아가는 방식일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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