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 외곽의 한 동네. 오래된 주공아파트가 빼곡한 이곳, 그 아래 골목 어귀에 허름한 이발소 하나가 있다. 유리문엔 바랜 가격표가 붙어 있고, 입구 옆에는 높다란 낡은 회전등이 여전히 돌아간다.
내가 그 이발소를 처음 알게 된 건 2012년이었다. 축산물검사소에 발령받아 근무하기 시작했을 때다. 그때 4,000원이던 조발 비용은 올해 1월이 되어서야 비로소 5,000원으로 인상되었다. 이발소의 이름이 IMF 헤어뱅크이고 보면 아마도 1990년대 후반부터 4,000원이었거나 그보다 낮은 금액이었을지도 모른다. 올해 1월, 이발소를 찾았을 때 머리를 하고 만원 한 장을 주인에게 내밀었고 잔돈 6,000원이 돌아올 줄 알았다. 그런데 주인장은 5,000원을 내밀면서 "물가가 올라서 어쩔 수 없었다"며 1,000원이 인상되었다고 말했다. 나는 "잘했습니다. 그거 가지고 되겠습니까?"하고 되물었다. 그나마 염색까지 하면 총 10,000원. 염색 단독은 6,000원이니, 둘을 함께하면 '묶음 할인'도 되는 셈이다.
이발소는 물가가 끊임없이 오르는 가운데서도, 사람들의 형편을 헤아리며 오랫동안 같은 가격을 지켜오고 있다. 나는 한 달에 한 번쯤 그곳을 찾는다. 하지만 그저 머리를 자르기 위해서만은 아니다. 그곳에 앉아 있으면 흐르는 시간이 느껴지고, 오래된 추억이 조용히 되살아난다. 사람들이 주고받는 소소한 이야기 속에는 삶의 냄새가 배어 있고, 그 너머에는 어느새 시대의 얼굴이 담겨 있다. 그래서 나는 지금도 자연스럽게, 그 이발소로 발걸음을 옮긴다.
오늘은 계엄을 선포했던 대통령의 탄핵이 인용된 지 이틀이 지난 날이다. 평소처럼 문을 열고 들어섰다. 텔레비전에서는 민간인이 된 전직 대통령이 관저에서 언제 사저로 갈 것인지, 차기 대선 후보로 물망에 오르는 이는 누구인지에 대한 뉴스가 연이어 흘러나오고 있었다.
구수한 말씨가 이발소 안을 가득 채웠다.
“야당 대표가 말이여, 사사건건 반대만 허고 대통령 일 못하게 막았잖여! 계엄을 할 수밖에 없었제. 나라가 제대로 돌아가야잖어!”예순을 한참 넘긴 듯한 손님 한 분이 모두 들으라는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던 또 다른 남자, 앞선 노인보다 다소 더 나이 들어 보이는 단골 손님이 맞장구를 쳤다.
“맞어, 맞어. 반대당이 문제랑께. 계엄이 돼서야 허는디, 어쩌스까이.”그들의 대화에는 알게 모르게 깊은 사회적 긴장감이 배어 있었다. 말끝마다 힘이 실리고, 목소리가 커질수록 그 안에 담긴 감정의 결도 또렷해졌다.
그들은 어쩌면, 자신이 어디 출신인지, 어떤 시선 속에 놓여 있는지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전라도 출신으로, 보수적 성향이 강한 부산에서 오래 살아온 이들에게는 말 한마디, 표정 하나에도 조심스러움이 배어 있다. 그런 배경 속에서 살아온 이들은 때때로, 자신이 이 사회의 한 구성원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다는 걸 증명하기 위해 더 큰 목소리로, 더 단호한 태도로 주류의 언어를 따라간다.
그들의 말 속에는 정치적 신념이라기보다는, ‘나는 여기서 소외되지 않는다’는 것을 스스로 확인하려는 삶의 태도가 숨어 있었는지도 모른다. 이발사는 묵묵히 가위를 움직였다. 가위 날이 움직일 때마다, 세상의 소음이 조금씩 잘려 나가는 듯했다. 거울 속 내 얼굴을 바라보다가, 문득 오래된 기억 하나가 떠올랐다. 1980년, 내가 열 살이던 봄이었다. 가난한 골목에서 자라던 나는, 신문 속 사진을 들여다보며 잠시도 눈을 떼지 못했다. 트럭 위에 올라탄 사람들이 머리에 띠를 두르고 총을 들고 있는 모습은 어린 눈에 낯설면서도 묘하게 흥미로웠다. 어른들은 신문을 들고 모여 앉아 웅성거렸다. “광주에 빨갱이들이 들끓는다.”“다 쓸어버려야 해.”
나는 그저 재미있는 그림을 구경하듯, 사진만 바라보았다. 어른들의 격한 말은 들리지 않았고, 그 안에 담긴 두려움이나 분노 따위는 이해조차 되지 않았다. 그날의 신문은 내게 단지, 세상을 구경하는 하나의 창문일 뿐이었다.
그로부터 6년이 지나, 고등학생이 되었을 때였다. 전라도 출신인 외숙모가 어느 날 나를 조용히 불러 사진첩 하나를 보여주었다. "광주에서 있었던 일"이라며 조심스레 넘기는 그 페이지들 속에는 교과서에서 결코 볼 수 없었던 장면들이 담겨 있었다.
외숙모의 침묵은 말보다 더 많은 것을 전하고 있었다. 사진첩 속 피 묻은 셔츠와 멍든 얼굴들, 대검에 찔린 시신, 총에 맞은 어린 학생들... 차마 오래 들여다볼 수 없을 만큼 적나라한 장면들이 페이지마다 담겨 있었다. 아마 외숙모는, 동향 사람들이 몰래 돌려보던 그 사진첩을 넘기며 생각했을 것이다. ‘내가 그곳에 있었다면 나도 저렇게 되었을지 모른다.’그 생각은 분노와 두려움, 그리고 슬픔으로 이어졌을 것이다.
그때서야 나는 비로소 5·18의 진실을 마주하게 되었다. 어린 시절, 용호동 골목에서 신기한 그림처럼 바라보았던 신문 속 장면들이 전혀 다른 의미로 다가왔다. 가슴 한켠에 말로 설명할 수 없는 무게가 내려앉았고, 그 순간부터 내 안의 역사는 조용히, 그러나 분명하게 바뀌기 시작했다.
그리고 또 한 번의 역사적 순간이 찾아왔다. 1987년 6월, 나는 부산 서면의 대로를 가득 메우고 끝도 없이 이어지는 시민들의 행렬을 목격했다. 대통령 직선제를 요구하는 그들의 함성이 도시 전체를 뒤흔들었다. 친구와의 약속이 있어 서면으로 향하던 중 우연히 마주친 그 장면은 내 기억 속에 또 하나의 강렬한 순간으로 남았다. 평범한 시민들이 자신의 목소리를 내기 위해 거리로 나왔고, 그 용기 있는 행동이 결국 우리나라의 민주주의를 한 걸음 더 앞으로 나아가게 했다.
2024년 12월, 계엄이 선포되던 밤. 나는 유튜브를 켜둔 채 잠자리에 누워 있었다. 평소 즐겨 보던 정치 채널에서 '속보' 알림과 함께 대통령의 대국민 담화가 흘러나왔다. 그 목소리 속에서 '자유헌정 질서 수호'라는 문장이 또렷하게 들려왔다. 순간 놀람이 일었지만, 곧바로 황당하다는 감정이 그 자리를 대신했다. 현실감 없는 계업에 한숨 섞인 미소만 지어졌고, 이내 별일 없다는 듯 조용히 불을 끄고 이불을 덮었다.
새벽녘, 잠이 들어 있던 몸이 어딘가 모르게 불편해져 다시 눈을 떴다. 휴대폰을 켜니 계엄 해제 소식이 빠르게 전해졌다. '그럴 줄 알았지.' 그렇게 생각하며 이불을 다시 덮었지만, 좀처럼 잠이 오지 않았다.
만약 그 계엄이 그대로 이어졌더라면, 우리의 일상은 어떻게 달라졌을까. 그런 생각들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그제야 텔레비전 속 대통령의 모습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계엄을 선포하던 그의 목소리, 단어 하나하나가 늦은 시간 뒤늦게 심장을 때렸다. 가슴이 서늘해졌다. 마치 시간이 거꾸로 흐르는 듯한 느낌. 1980년 5월의 어둠, 1987년 6월의 함성이 동시에 되살아났다. 역사는 반복된다는 말이 이토록 생생하게 다가온 적이 있었던가. 그리고 이번에도, 우리는 그 경계선 위에 아슬하게 서 있었던 것이다.
다행히 이번에는 달랐다. 우리 사회는 더 이상 그런 시대착오적인 통치에 굴복하지 않았다. 계엄 선포 소식이 전해지자, 많은 시민들이 거리로 나왔다. 그들은 자신의 일상을 뒤로하고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목소리를 높였다. 특히 젊은 여성들의 참여가 두드러졌다. 중고등학생부터 대학생, 2030 여성들까지, 그들은 새로운 시위 문화를 만들어냈다. 잘 알려진 K-팝 노래에 자신들의 메시지를 담아 함께 부르며 연대감을 형성했고, 눈이 내리는 추운 밤에도 은박지를 온몸에 두르고 시위 현장을 지켰다. 그 모습이 키세스(Kisses) 초콜릿과 닮았다 하여 '키세스 시위대'라는 애칭으로 불리기도 했다. 이 창의적인 시위 방식은 전 세계 언론의 주목을 받았고, K-팝과 민주주의가 결합한 한국만의 독특한 문화로 조명받았다.
많은 시민들이 생업을 뒤로한 채 거리로 나섰다. 누군가는 교복을 입은 학생이었고, 누군가는 퇴근 후 곧장 집회 현장으로 향하는 직장인이었으며, 또 누군가는 아이를 친지에게 맡기고 나온 부모였다. 저마다의 자리와 사정은 달랐지만, 그들이 들고 나온 목소리는 하나였다. 민주주의를 지키겠다는 절실함. 나는 텔레비전과 인터넷을 통해 그들의 모습을 지켜보았다. 다양한 삶의 궤적을 가진 사람들이 서로의 손을 맞잡고, 시민으로서의 책무를 다하고 있었다. 그 장면들은 오래도록 마음에 남았다. 이번 사태가 그대로 이어졌더라면, 우리는 또 한 번 어두운 역사의 구렁텅이 속으로 내몰렸을지도 모른다. 그 생각에 숨이 막혔고, 그래서 더욱 지금이 다행스럽게 느껴졌다.
공직자로서 나는 거리로 나설 수 없었다. 그게 내가 맡은 자리의 한계였고, 그래서 마음 한켠이 더 무거웠다. 그 대신 조용히 화면을 통해 그들의 용기를 지켜보며 마음속으로 깊이 고마움을 느꼈고, 그들이 지켜낸 민주주의의 소중함을 다시 한번 되새기게 되었다. 그들의 모습은 문득 1987년 여름, 서면 거리에서의 기억을 떠올리게 했다. 구호를 외치며 함께 걷던 그 날의 청년들, 그리고 지금 다시 거리로 나선 시민들. 그때도, 지금도 민주주의는 결국 시민들의 용기 위에 서 있었다.
돌아보면 내 인생의 여러 순간이 역사의 고비와 겹쳐 있었다. 1980년 5월의 광주, 1987년 6월 항쟁, 그리고 2024년 12월의 계엄 사태까지. 그 모든 순간마다 우리 국민은 스스로 깨어 있는 시민임을 증명해 왔다. 어쩌면 그것이, 우리가 이 땅에 쌓아올린 가장 값진 유산인지도 모른다. 이번 사태에서 그나마 다행이었던 것은, 대통령이 계엄을 충분한 준비 없이 서둘러 선포했다는 점이었다. 겉으로는 그럴듯한 명분을 내세웠지만, 실제 상황에 대한 판단이나 실행 계획은 허술하기 짝이 없었다. 게다가 일부 군과 경찰은 임무 수행에 적극 나서지 않았다. 어떤 이는 침묵했고, 또 어떤 이는 한 걸음 물러섰다. 여기에 발 빠르게 움직인 국회와 거리로 나선 시민들까지. 이 모든 요소가 맞물리면서 우리는 민주주의가 무너지기 직전의 위기에서 간신히 벗어날 수 있었다. 결국 위기를 만든 것도 권력이었지만, 그 위기를 멈춘 것도 바로 그 허술했던 권력과 깨어 있었던 시민들이었다. 그들이 있었기에 이번 내란은 조기에 종식될 수 있었다. 그들이 있었기에 우리는 더 큰 혼란을 피할 수 있었다.
이발소를 나서며 문을 닫는 순간까지도 전라도 출신 두 노인의 열띤 정치 이야기는 멈추지 않았다. 그들의 목소리는 다소 과장되어 있었지만, 그 안에 담긴 복잡한 마음의 결을 나는 어렴풋이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어쩌면 그들도, 시대의 굴곡과 편견 속에서 자신만의 방식으로 존재의 자리를 확인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우리 사회는 참 아이러니한 곳이다. 보수와 진보라는 이름으로 갈라진 이 세상에서, 흔히 경제적으로 어려운 사람들은 복지 확대와 부의 재분배를 주장하는 진보 진영에 표를 던질 것이라 예상하지만, 현실은 다르게 나타나곤 한다. 오히려 저소득층 지역에서 기득권의 입장을 대변하는 정당을 지지하는 경우가 많다. 심지어 생계가 빠듯한 이들이 극우 성향의 집회에 헌금과 성금을 내며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모습도 볼 수 있다.
이런 현상을 볼 때마다 마음이 복잡해진다. 혹시 그들에게는 경제적 이해관계보다 중요한 다른 가치가 있는 것일까? 아니면 정치 세력들의 선동과 기성 언론의 편향된 보도에 영향을 받은 것일까? 어쩌면 소속감에 대한 갈망, 누군가에게 속해 있다는 안정감, 혹은 복잡한 세상 속에서 명쾌한 답을 제시해 주는 이들에 대한 의지가 더 크게 작용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무엇이든, 자신의 삶을 더 어렵게 만들 수 있는 정치적 선택을 하는 이들을 볼 때면 안타까움이 밀려온다. 그들도 결국은 나처럼, 조금 더 나은 세상, 자신과 가족이 행복하게 살 수 있는 세상을 꿈꾸고 있을 것이다.
우리는 때로 서로를 이해하는 데 실패하면서도, 그렇게 엇갈리고 부딪히며 이 사회를 지탱해 나간다. 이 모든 날들의 기억이 언젠가 더 나은 내일로 이어지길 바란다. 과거의 아픔도, 오늘의 불안도 반복되지 않도록.
역사는 언제나 순환하지만, 그 고리가 같은 모습이어선 안 된다. 머리를 자르고 난 후의 가벼움처럼, 우리 사회도 언젠가는 무거운 갈등의 짐을 내려놓고 더 자유롭고 화합된 모습으로 나아갈 수 있기를. 계엄으로 인한 국가적 혼란이 하루속히 종식되고, 다시는 이런 일이 반복되지 않는 안정된 나라가 되기를. 그것이 한 소시민의 소박한 바람이다.
귀갓길, 서쪽 하늘에 노을이 번지고 있었다. 붉게 물든 하늘은 지나온 시간을 조용히 감싸 안는 듯했고, 하루가 저물어 가는 풍경은 이상하게도 마음을 차분하게 했다. 세상은 늘 시끄럽다. 하지만 그 안에도 인간의 존엄, 자유를 향한 갈망, 서로를 향한 연대의 빛이 있다. 때로는 이발소처럼 소란스러운 공간에서조차, 그 진실은 빛을 발한다. 그 순간, 나는 깨닫는다. 세월이 흘러도 변하지 않는 것이 있다는 것을. 인간의 존엄성, 자유에 대한 갈망, 그리고 더 나은 사회를 향한 희망. 그것들은 어떤 정치적 혼란과 사회적 변화 속에서도 우리가 지켜나가야 할 가치임을.
이번 계엄 사태를 보며, 나는 우리 사회가 한 걸음 더 성숙해졌음을 느꼈고, 그 안에서 희망을 발견했다. 과거의 민주화 운동과 이번에 거리에서 목소리를 높인 시민들. 그들 모두는 같은 꿈을 꾸었다. 더 나은 내일, 더 자유롭고 평등한 사회, 모두가 인간답게 살 수 있는 나라. 1980년 광주, 1987년 서면, 그리고 2024년 전국 각지에서 민주주의를 위해 흘린 땀과 눈물이 헛되지 않도록. 그 꿈이 현실이 되는 그날까지, 우리의 발걸음은 계속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