벚꽃이 만개했다. 어제 오후, 외근을 마치고 돌아오던 길, 나는 잠시 삼락강변에 차를 멈췄다. 햇살 아래 강변을 따라 흐드러지게 핀 벚꽃은, 눈부시게 아름다워 한참을 바라보게 했다. 오랜만에 이곳을 찾아서인지 올해의 벚꽃이 유난히 더 예쁘게 느껴진다. 나의 청춘의 봄은 훌쩍 지났지만, 화려하게 핀 벚꽃을 보니 내 인생의 찬란했던 봄날이 언제였나 생각하게 된다.
강둑을 따라 늘어선 벚나무들은 서로 먼저 피어나려는 듯 화려한 꽃망울을 터뜨리고 있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카메라를 들이대고, 웃음을 나누며, 그 찰나의 아름다움을 담고 있었다. 벚꽃 터널을 거닐며 오래전의 나와 지나간 시간들을 떠올렸다. 꽃은 피는 법을 아는 만큼, 지는 법도 안다. 그래서일까. 가장 눈부신 순간에 이미 스스로를 내려놓을 줄 아는 꽃, 그래서 더 눈부시게 느껴진다.
무엇이든 한창일 때는, 그 시간이 얼마나 소중한지 잘 모른다. 지나고 나서야 비로소, 그 순간들이 내 삶에서 가장 빛나던 장면이었다는 것을 안다.
열둘, 처음으로 누군가를 좋아하게 되었다. 이름을 불러주면 가슴이 두근거렸고, 어쩌다 마주친 눈빛에도 하루가 환해졌다. 말 한마디, 웃음 하나에 마음이 달아올랐고, 괜히 혼자서 설레곤 했다.
스물셋, 봄날 아침. 공직생활의 시작을 앞두고 구청 건물 계단을 오르던 내 모습이 지금도 또렷하다. 새벽까지 심야영업 단속 근무를 하고 오후에 다시 출근해도, 누군가는 해야 하는 중요한 일을 내가 하고 있다는 책임감과 보람으로 힘든 줄 몰랐다. 그 시절의 열정이 지금도 가끔 그리워진다.
스물여섯, 지금의 아내를 만났다. 함께 있는 시간은 늘 짧게만 느껴졌다. 이별의 위기가 찾아왔을 때, 나는 그녀에게 100통의 편지를 쓰겠다고 했다. 결국 단 세 통의 편지로 마음을 전했고, 그 진심이 우리를 다시 이어주었다.
스물일곱, 첫 아이를 안았다. 조그마한 몸을 품에 안고 있자니, 숨 쉬는 일조차 조심스러웠다. 그 작은 존재가 내 품 안에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가슴이 뭉클했다. 아이는 금세 커서 바닥을 기고, 뒤뚱뒤뚱 걷고, 나를 향해 웃으며 재잘거렸다. 그 모든 순간들이 나에겐 선물이었다.
마흔, 공모를 통해 광역정신건강센터를 유치했다. 준비기간이 짧았지만 포기하지 않았다. 원하는 결과를 얻었고 나의 공직생활 중 가장 뜻깊은 성과였다. 내 노력으로 실체가 있는 무언가를 만들어냈다는 사실이 오래도록 마음에 남았다.
쉰하나, 사무관 승진이 결정된 날. 퇴근길 차 안에 앉아 있자니, 마음 한켠이 조용히 가라앉았다. "이만하면 충분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더할 나위가 없다고 느꼈다.
그리고 쉰넷, 완주에서 보낸 열 달. 하모니카를 불고, 운동을 하고, 강의를 듣고, 분임원들과 마주 앉아 이야기를 나누던 날들.
돌아보면, 내 삶의 봄이었던 날들이 많았다. 눈부시게 피었다가 조용히 져버렸지만, 그 기억은 여전히 따뜻하게 남아 있다.
강변의 벚꽃들을 바라보니 내 삶의 발자취가 겹쳐지는 느낌이 들었다. 문득 떠올랐다, 내가 한때 이 삼락강변을 관할하던 구청 공무원이었다는 사실이. 1998년, 그리고 2014년. 두 시기에 걸쳐 이곳에서 근무했다. 그때 이 강변은 늘 분주했고, 나는 꽃 한 송이 제대로 바라볼 틈도 없이 바쁘게 오가곤 했다. 같은 장소, 같은 나무들이지만, 그 곁을 지나는 나의 시간은 내 눈에 다른 풍경으로 비쳤다.
예전엔 그냥 지나치던 풍경이, 이제는 삶의 깊은 의미로 다가오는 것을 보면, 사람의 감정이란 나이와 함께 익어가는 것이 아닐까 싶다. 꽃이 진 자리에 푸르름이 자라고, 시간은 어느새 다음 계절을 준비한다. 마치 자신의 모든 것을 다 쏟아내고 홀가분하게 자리를 비우는 꽃처럼, 나도, 우리 모두도 언젠가는 그렇게 떠나야 할 것이다.
기상청은 오늘 밤 비 소식을 전했다. 아마도 이 밤을 넘기면, 많은 나무의 꽃잎은 바닥에 내려앉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끝은 아니다. 꽃잎은 흙이 되어, 다시 피어날 봄을 준비한다. 인생도 다르지 않다. 시간이 흐르고 나도 사라지겠지만 내가 나아가며 남긴 흔적들이 누군가에게 이정표가 된다면 더 바랄 것은 없다.
꽃은 바람에 저항하지 않는다. 그저 때를 받아들인다. 그래서 가장 자연스러운 순간에, 가장 아름답게 피어난다. 우리 삶도 그렇게 흐를 수 있다면 좋겠다. 주어진 시간 안에서 최선을 다하고, 때가 오면 조용히 물러나는 것. 그런 삶의 지혜를 이 강둑에서 발견한다.
강둑길을 걸으며 꽃들에게서 얻은 깨달음은 단순했다. 지금 이 순간, 망설이지 말고 피어나라는 것. 그리고 때가 오면, 아름답게 떠나도 괜찮다는 것. 나도 내 삶을 그렇게 살아가고 싶다. 벚꽃처럼 찬란하게, 그리고 담대하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