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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멈춘 자리에서

by 박계장

2012년 2월, 시청에서 6년을 근무한 뒤 승진은 커녕 뜻하지 않은 발령이 났다. 북구 금곡동 축산물검사소. 부산의 끝, 양산의 시작을 알리는 곳이다. 대로변에 있었지만 눈에 잘 띄지 않는 낡은 건물이었다. 70년대 병원 같기도 했고, 청사 마당 한켠에서는 장닭이 울고, 누렁개 한 마리가 종일 마당을 뛰어다니고 있었다. 그 장닭은 축산물 검사에 필요한 혈청을 얻기 위해 사육되고 있다는 걸 나중에야 알았다.

건물 1층, 어슴푸레한 복도를 따라 사무실로 들어섰다. 오래된 형광등은 지직거리는 소리를 내며 희미한 빛을 떨고 있었고, 문을 열고 들어선 그곳엔 큼직한 체구에 머리가 훤히 벗겨진 중년 남성이 앉아 있었다. 검사소장 직무대리를 맡은 수의직 5급 공무원이었고, 몇 달 뒤면 4급 승진이 예정돼 있는 사람이었다.

"온나, 앉아라. 어디서 근무했었노?"

"보건직 ○○아나, 내하고 같이 근무했었다이가. 술은 좀 하나?"

그는 여러 구청을 돌며 위생 업무를 두루 경험한 베테랑이었다. 능력을 인정받아 근무 연한이 채 되기 전 소장 직무대리를 맡게 되었고, 연차만 채우면 4급으로 올라갈 예정인 인물이었다. 외모처럼 성격도 소탈하고 유쾌했으며, 술과 사람을 좋아했고, 노래도 곧 잘했다. 한때 주식 투자로 낭패를 본 적이 있지만, 여전히 한 방의 꿈을 품고 있었다.

지금은 공직에서 퇴직해 축산물 가공업체에 재취업해서 제2의 인생을 살아가고 있다. 여전히 익숙한 분야에서 일하며 바쁜 일상을 이어가고 있다. 당시의 소탈한 웃음과 편안한 분위기는, 지금도 내 기억 속에 남아 있다.

그 무렵, 보건직이 8~7급일 때 시청으로 전입되는 경우는 드물지 않았지만, 대부분 연줄이 있거나 역량을 인정받은 사람으로 여겨졌다. 그래서 그 자리는 늘 부러움의 대상이었다. 대체로 6급까지는 무난히 승진했고, 5급이 되면 시청 계장을 맡거나, 잠시 구청 과장으로 내려갔다가 다시 시청으로 복귀하는 흐름이었다.

나 역시 7급 3년 차에 시청으로 전입했지만, 9년 차가 되도록 승진하지 못한 채 결국 사업소로 내려왔다. 속에는 열패감이 끓어올랐고, 내가 밀려난 무언가에 대한 원망이 컸다.

행정실 직원을 따라 검사소 이곳저곳에 인사를 다니고 돌아와 내 자리에서 창밖을 바라보았다. 양산과 부산을 오가는 도시철도가 규칙적으로 달렸고, 철길 너머로는 낙동강이 흐르고 있었다. 멀리 대동의 풍경이 아련히 펼쳐졌다. 그 순간, 이곳이 문득 유배지처럼 느껴졌다.

4대강 사업 덕분에 잘 정비된 자전거길이 강변을 따라 이어져 있었고, 그 길을 따라 걸으면 내가 사는 화명동까지 한 시간쯤이면 닿을 것 같았다. 처음엔 억울함과 씁쓸함으로 마음이 복잡했지만, 시간이 지나자 그 감정은 서서히 가라앉았다. 그러자 이곳이 뜻밖의 휴양지처럼 여겨지기 시작했다.

무엇보다 일이 많지 않았다. 하루 두어 시간 바짝 일하면, 나머지 시간은 온전히 내 것이었다. 책을 읽고, 구내식당 식탁을 치운 뒤 탁구대를 펴서 탁구를 치는 일도 종종 있었다. 물론 그 자유로움이 지나쳐, 내가 떠난 뒤 암행감찰반이 들이닥쳐 많은 직원이 곤욕을 치렀다는 이야기도 들려왔다.

나는 그곳에서 서무이자 민원 담당, 회계 담당으로 일했다. 이런저런 업무를 두루 맡았지만, 시청에서의 업무량과 비교하면 한참 못미치는 수준이었다. 공직생활이 20년 가까이 되어가던 시점에서, 이런 여유는 처음이었다. 그래서 이곳이 유배지가 아니라, 어쩌면 지난 세월에 대한 보상이 아닌가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일과 중에는 유료 민원으로 축산물 검사를 의뢰하는 경우도 있었고, 구청이나 시청에서 요청하는 공무 검사가 들어오기도 했다. 공무 검사는 2층 검사실에서 직접 처리하고, 유료 민원은 내가 접수했다. 하루에 서너 건 정도였고, 아예 없는 날도 적지 않았다.

검사 수수료는 다음 날 인근 은행에 납부해야 했는데, 나는 오전 근무를 부지런히 마치고 자전거를 타고 다녀오곤 했다. 10분 남짓의 거리를 동네 이곳저곳을 돌아보며 자전거를 천천히 몰았다. 자전거를 타고 낯선 골목을 돌다 보면, 오래된 주택들, 익숙하지 않은 풍경들이 하나씩 눈에 들어왔다. 그렇게 이 동네를 천천히 익혀가는 중이었다.

그날도 수수료를 납부하고 돌아오는 길에 오래된 싸인볼 하나가 돌아가는 이발소를 발견했다. 간판은 따로 없었고, 유리창에 ‘IMF 헤어뱅크’라는 이름만 붙어 있었다. 입간판에는 ‘조발 4,000원, 염색 6,000원’이라는 글자가 큼직하게 적혀 있었다. 당시에도 꽤나 파격적인 가격이었다.

퇴근 길에 이발소에 들렀다. 넓은 공간에 이발 의자는 단 하나. 대기석에는 소파와 의자가 놓여 있었고, 열 명쯤은 앉을 수 있을 듯했다. 이발사는 묵묵히 머리를 자르고 있었다. 키가 크고 마른 체형, 벽면엔 사이클 대회 완주 메달이 가득 걸려 있었다. 머리를 자르며 말없이 움직이는 그의 손길이 유난히 분주하고 단정했다.

내 차례가 되자 그는 거울 속의 나를 보면서 말했다.

“시원하게... 어, 시원하게.”

나도 따라 말했다.

“네네, 시원하게.”

머리는 금세 완성됐다. 군 장교 스타일, 어릴 적 드라마 ‘에어울프’ 속 ‘호크’를 닮은 헤어였다. 뜻밖에도 나와 잘 어울렸고, 마음에 쏙 들었다. 그날 이후 지금까지도 나는 그 이발소에서 같은 머리 스타일을 고수하고 있다.

요금은 올해 들어 처음 천 원이 올랐다. 그마저도 1990년대 후반 이후 처음이라고 했다. 염색까지 해도 10,000원. 그래서일까, 머리숱이 적은 할머니와 중년의 아들이 나란히 앉아 대기하던 모습이 아직도 기억에 남는다.

미용실에 남자가 앉아 있는 건 흔하지만, 이발소에 여성이 있는 모습은 낯설다. 하지만 비용 앞에 성별이 무슨 상관이랴.

이발소 하면 으레 동네 사랑방 같은 분위기를 떠올리게 마련이다. 라디오 소리에 섞여 흘러나오는 이웃들의 이야기, 오가는 농담과 웃음소리. 하지만 이곳은 조금 달랐다. 주인은 말수가 적었고, 손님들과 스스럼없이 어울리는 정 많은 타입도 아니었다. 조용했고, 특별한 대화 없이 머리만 손질해 주는 곳이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정은 느껴졌다. 단골손님들은 수건을 개고, 바닥을 쓸며, 주인의 손이 닿지 못한 자리를 채워주곤 한다. 주인이 고맙다는 말을 하는 것도 아니고, 누가 시킨 것도 아니었지만, 그들은 마치 자기 일처럼 자연스럽게 움직인다. 말없이 오가는 정이란, 어쩌면 그런 것이 아닐까.

이발소에 가면, 말하지 않아도 지난달과 똑같이 머리가 단정히 다듬어진다. 이곳이 너무 붐비지도, 너무 썰렁하지도 않고, 오래도록 지금처럼 문을 열고 나를 조용히 맞아주는 공간으로 남아 있었으면 한다. 언제 찾아가도 마음이 편안해지는, 시골집 같은 그런 곳으로.

돌이켜보면, 그때 나는 축산물검사소로 쫓겨난 것이 아니었나 보다. 잠시 멈추어 가라는 뜻으로 보내졌던 셈일지도 모르겠다. 조금 늦어진 승진, 익숙하지 않은 근무지, 그 모든 변화는 예상 밖의 여유를 내게 주었다. 빠르게만 흘러가던 일상 속에서 숨 고를 수 있었던 시간.

많은 말이 없이도 마음이 통하는 사람들, 조용히 나를 받아준 공간, 그곳에서 나는 잠시 멈춰 서서, 다시 앞으로 나아갈 힘을 얻었다.

지나고 나서야 알게 되었다.

인생은 계획대로 흘러가지 않아서, 뜻밖의 풍경과 사람을 만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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