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 종일 어깨를 짓누르던 피로가 저녁 무렵에서야 비로소 조금씩 풀려나기 시작했다. 동료들과의 식사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온 시각은 밤 아홉 시. 서둘러 씻고, 불을 끈 뒤, 몸을 이부자리에 뉘였다.
며칠째 깊은 잠을 이루지 못하고 있다. 밤잠이 가벼워진 것도 나이가 들어감을 실감케 한다.
피로는 깊었지만 잠은 얕았고, 마음은 좀처럼 가라앉지 않았다. 고요한 방 안, 몸은 쉬고자 했지만 생각은 밤의 정적을 타고 천천히 깨어났다.
며칠째 작동하지 않던 무선 음성 장치가 문득 떠올랐다. 손에 들어본 그것은 여전히 묵묵부답이었고, 나는 블루투스를 반복 연결하며 매뉴얼을 뒤적였다. 간단한 문제일 거라 여겼지만, 결국 아무 성과 없이 손을 놓아야 했다. 고장 난 기계 하나 앞에서 괜스레 자존심이 상했다. 시계는 어느덧 밤 열 시 반을 넘어가고 있었다.
다시 이불을 덮었지만, 이번엔 어젯밤의 맥북 문제가 떠올랐다. 챗지피티가 알 수 없는 문자들로 대답했던 장면이 선명하게 되살아났다. 브라우저 문제인가 싶어 크롬, 엣지, 사파리를 차례로 열어봤지만 결과는 같았다. 결국 맥OS 전체를 업데이트했다. 설치가 끝나고 정상적으로 응답하는 챗지피티를 확인했을 땐, 묘한 해방감과 함께 시계는 밤 열한 시를 지나고 있었다.
다시 잠을 청해보았지만, 이번엔 저녁 자리의 대화들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새로 전입 온 직원들과의 첫 만남, 어색한 분위기를 풀기 위해 꺼낸 내 이야기들, 그들의 반응. 혹시 너무 많은 이야기를 했던 건 아닐까? 그들은 내 말에 진심으로 귀를 기울였을까? 잠은 멀어지고, 자문은 깊어졌다.
새벽 4시 10분, 눈이 절로 떠졌다. 방 안은 아직 어둠 속이었다. 핸드폰을 더듬어 시간을 확인하고 화장실에 다녀왔지만 다시 잠들 수는 없었다. 이불 속에 누운 채 눈을 감아보았지만, 마음은 이미 하루를 시작하고 있었다. 어제 저녁의 내 모습이 자꾸 떠올랐다. 특히 프로젝트에 대해 열정적으로 설명하던 내 모습, 그때 다른 사람들의 표정은 어땠을까. 혹시 나는 듣기보다는 말하기에만 몰두했던 건 아닐까.
결국 다섯 시가 되기 전에 자리에서 일어났다. 모두가 잠든 시간, 조심스럽게 두유를 데우고 고구마를 에어프라이어에 넣었다. 따뜻한 고구마 향이 집 안 가득 번져나갔다. 한 손에 두유를 들고 거실 창가에 섰다. 아직 어둠이 가시지 않은 거리, 그 속에서도 하루를 시작한 사람들의 그림자가 오갔다. 새벽의 고요 속에서도 삶은 조용히, 그러나 분명히 움직이고 있었다.
맥북을 다시 켜보았다. 전날 밤의 문제가 말끔히 해결된 것을 확인하니 작은 안도감이 밀려왔다. “오늘의 날씨는 어때?” 조심스레 건넨 질문에 챗지피티는 또박또박 응답했다. 화면 속 정돈된 문장을 바라보며 괜히 마음이 가벼워졌다. 테스트 몇 가지를 더 해보고, 평소보다 조금 이르게 출근하기로 마음먹었다.
현관문을 열고 밖으로 나섰을 때, 하늘은 어둠과 빛 사이 어딘가에서 서서히 깨어나고 있었다. 이른 아침의 공기가 얼굴을 스치며 정신을 맑게 했다. 피로는 여전히 남아 있었지만, 그마저도 새벽 공기 속에 조금씩 씻겨내려가는 듯했다.
지하철 안은 아직 한산했다. 나는 평소처럼 자리에 앉지 않고 문 근처에 가볍게 기대 섰다. 창밖으로 펼쳐진 도시의 이른 풍경이 천천히 흘러갔다. 어딘가에서 막 눈을 뜬 빛들이 간신히 그림자를 밀어내며 하루를 맞이하고 있었다. 그 고요하고 부드러운 움직임이 새벽의 사색과 절묘하게 어우러졌다.
시청으로 향하는 지하 보행통로에는 벌써 출근길을 재촉하는 발걸음들이 하나둘 채워지고 있었다. 익숙한 길이지만 오늘은 조금 다른 마음으로 걸었다. 어제의 나를 반추하며, 앞으로는 말을 줄이고 더 많이 들어야겠다는 다짐이 마음속에 조용히 내려앉았다.
사무실에 도착하니 아직 불이 환히 켜지진 않았다. 가장 먼저 도착한 듯한 고요 속에서, 창밖 거리에는 아침 햇살이 서서히 고개를 들고 있었다. 오늘 오후에는 직원들과 회의가 있다. 이번엔 더 많은 이야기를 듣고, 더 적게 말해보리라.
밤을 설쳤지만 아침은 어김없이 찾아왔다. 그리고 나는 그 아침 속으로 조용히 걸음을 내디뎠다. 말없이, 그러나 분명하게.
가끔은, 깊은 잠보다 얕은 깨어남이 우리에게 더 많은 것을 준다.
불면의 새벽은 스스로를 돌아보게 하고, 놓쳤던 말과 지나친 생각들을 되새기게 한다.
그리고 그렇게 다듬어진 생각 하나, 조용히 내려앉은 다짐 하나가
삶의 방향을 조금은 더 깊고 단단하게 만들어준다.
잠 못 이룬 밤이 내게 준 것은 피로가 아닌, 스스로를 정리하고 내면을 일으켜 세울 수 있었던 귀한 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