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직생활 32년 차, 지방자치인재개발원에서 시작된 중견리더과정 교육은 완주라는 낯선 땅에서 열 달 동안 이어졌다. 부산을 떠나던 그날 아침, 설렘과 긴장이 교차하는 마음으로 핸들을 잡았다. 코로나19로 인해 5급 승진자 교육마저 비대면으로 마쳤던 터라, 공직의 한 고비를 넘긴 이 시점에서 맞이하는 장기간의 집합교육은 그 자체로 남다른 기대를 품게 했다. 고속도로를 달리며 창밖으로 스쳐 가는 풍경을 따라 쉴 새 없이 달려온 내 공직 생활이 겹쳐 흘러갔다.
운 좋게 얻은 투룸 숙소는 새로운 인생의 서막처럼 다가왔다. 좁은 원룸이나 공동 거실을 쓰는 다른 교육생들과 달리, 이 여유로운 공간은 내게 작은 해방감을 안겨주었다. 밤늦도록 하모니카를 불어도 누구 눈치 볼 일이 없었고, 제대로 된 음식을 만들어 먹기에도 부족하지 않았다. 그간 부산에서 바쁜 생활이라 완주하지 못했던 16부작 드라마을 잠이 쏟아지기 전까지 내리 보는 것도 소소한 즐거움이 되었다.
이곳에서의 시간이 흘러가면서, 주말에도 부산으로 돌아가지 않는 날이 많았다. 완주에서 부산까지의 여정이 멀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전라도에서 추억을 쌓고 싶었다. 그런 주말이면 이른 새벽 전주 남부시장으로 향했다. 생기가 넘치는 새벽 시장의 풍경과 제철 식재료를 고르며 상인들과 나누는 소박한 말씨름도 정겨웠다. '현대옥'의 시원한 콩나물국밥과 '조점례 순대국밥'은 새벽 장을 보는 그 시간에 누릴 수 있는 가장 큰 호사였다.
숙소로 돌아와서 제철 식재료로 나물 위주의 밑반찬을 만들었다. 본래 요리를 좋아했고 또 잘한다는 소리도 듣던 터여서 완주에서 음식을 해먹는 것은 내게는 재미난 일상이었다. 어머니의 손맛을 떠올리며 유튜브 레시피를 따라 한 주일 동안 먹을 반찬들을 하나씩 준비해가는 과정은 마치 잃어버린 기억을 되짚어가는 여정 같았다. 손끝에 익숙한 감각이 되살아나면서 추억의 맛이 재현되면, 내 안의 자신감도 조금씩 되살아났다. 목요일쯤 되면 나물들의 신선도도 떨어져가고 다시 주말에 장을 보러 가야 하니 냉장고를 비워야 했다. 그럴때면, 동기생들을 불러 남은 밑반찬들을 양푼이에 담고 비빔밥을 만들어 함께 나눠 먹곤 했다. 이런 소박한 식사 시간은 단순한 끼니를 넘어 따뜻한 마음을 나누는 시간이 되었다.
걷기를 좋아하는 나는 전라도 곳곳을 다니며 많은 시간을 보냈다. 그렇게 완주의 일상에 익숙해질 무렵, 여름휴가가 다가왔다. 김해에 계신 부모님을 완주로 모셔 함께한 며칠 동안, 나는 오랫동안 외면해온 것들과 마주하게 되었다. 백발이 성성한 아버지와 조심스럽게 발걸음을 옮기는 어머니의 모습에서 세월의 무게를 실감했다. 미안함과 사랑이 뒤섞인 마음으로 차를 몰아 전라도 곳곳을 함께 누볐고, 저녁이면 교육 중에 배워 재미를 붙인 하모니카를 연주하며 다 큰 아들이 재롱잔치를 열어 드렸다.
교육 과정 중반쯤, 분임원들과 함께 떠난 선유도 여행은 특별한 기억으로 남았다. 새만금 방조제를 지나 마주한 드넓은 바다는 그 자체로 벅찼고, 해 질 녘 파도 속을 아이처럼 뛰놀며 웃던 순간들이 아직도 선명하다. 기암괴석 사이로 스며드는 석양빛은 우정의 결을 더욱 깊게 새겨주었다. 또 다른 주말, 혼자 찾은 장자도의 새벽에는 예상치 못한 비가 고요를 데려왔고, 나는 빗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오랫동안 잊고 있던 내면의 소리에 천천히 다가갔다.
지리산 둘레길 세 코스를 걸었다. 전 구간을 완주하고 싶었으나 다소 가파른 구간에서 무릎이 찌걱대는 통에 불과 3코스만에 꿈을 접었다. 안개 낀 새벽, 계곡을 따라 오른 화암사와 부산 근교에서 보기 드문 평지의 송광사는 짧은 시간이었지만 긴 여운을 남겼다. 전라도의 여유로움과 그 은은한 감성들이 내 마음에 깊게 스며들었다.
하모니카는 호흡의 악기다. 들이마시고 내쉬는 그 단순한 반복이 선율이 되고 멜로디가 된다. 인생 또한 그렇지 않을까 생각한다. 멈춤 없이 달리기만 해서는 아름다운 소리를 낼 수 없다. 완주에서의 10개월은 내 공직 인생에 있어 가장 소중한 쉼표였다. 30년 넘게 쉴 틈 없이 달려온 길 위에서, 나는 처음으로 숨을 고르고 주변을 돌아보며 잊고 있던 나를 다시 만났다.
이제 다시 부산으로 돌아갈 시간이다. 떠날 때의 설렘만큼 돌아감의 아쉬움도 크다. 하지만 이곳에서 배운 삶의 리듬과 내면의 울림은 앞으로의 날들을 더 풍요롭게 만들어줄 것이다. 나는 이제 안다. 삶의 선율을 아름답게 이어가기 위해서는 적절한 쉼과 호흡이 필요하다는 것을. 완주에서의 시간은 내 인생의 중요한 쉼표로 영원히 마음속에 울려 퍼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