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젠가 잎이 필 줄 알았던 나무는 해마다 마이너스의 낙엽만 떨구었다. 나의 주식 계좌 이야기다. 마치 철없던 청춘처럼, 늘 가능성을 이야기하며 오늘도 붉은 빛으로 깜박이고 있다.
누군가는 말한다. "팔지 않으면 손해가 아니야." 숫자는 숫자일 뿐이라고, 잔잔한 위로를 건넨다. 그러나 나는 안다. 작년 여름, 급히 자금이 필요했던 어느 날, 매도 버튼을 누른 순간 1,100만 원의 손실이 현실이 되었음을. 숫자는 마음을 찌르고, 마음은 다시 지갑을 찌른다.
그 돈조차 연금공단에서 퇴직금을 담보로 대출받은 것이었다. 원금을 갚아가는 지금, 그 결정을 떠올리면 마음 한 켠이 저릿하다. 수익이 대출금의 이자를 상회할 것이라는 희망, 그저 허영이었는지도 모른다.
코로나가 기승을 부리던 시절, 방역업무로 지친 어느 날이었다. 술자리에서 누군가 말하길, 민간 검사기관이 검사업무를 분담하게 되었다고 했다. 귀가 얇은 나는 그 말에 다시 마음이 쏠렸다. 이미 다른 주식으로 손해를 보고 있었지만, 정보 하나에 기대를 걸어 손절매를 단행하고 새 주식을 대량 매입했다. 때마침 주가는 상승세, 하루가 다르게 올라갔다. 상한가를 여러번 맞고, 물론 몇차례 가파른 하락도 있었지만 내 계좌는 오랜만에 푸른 웃음을 지었다.
최대 수익은 4,500만 원, 결국 연말에 정리하며 손에 쥔 수익은 2,500만 원. 그것도 사실 적지 않은 수익이었지만 최대 수익일 때 매도하지 않은 것이 못내 아쉬웠다. 그때의 수익이 원래 내가 가져야 할 수익이었는데 놓쳤다는 생각을 떨칠 수 없었다. 허공에 스친 숫자의 허상, 그것을 잡지 못한 안타까움. 그게 인간의 욕심이라는 걸 알면서도, 나는 또 다른 대박을 기다리기 시작했다.
그 뒤로도 주식투자는 계속되었다. 그러나 대박은 없었다. 행운은 단 한 번의 반짝임이었다. 승진하여 구청 과장으로 부임한 후, 시청 행사에 참석하기 전 잠시 짬을 내어 지인과 커피를 마셨다. 그는 내게 말했다. "지금은 전기차 시대야. 핵심은 배터리야." 열변을 토하는 그의 말에, 나는 또 다시 투자 버튼을 눌렀다.
그는 주식담보 대출까지 냈다며 늦기 전에 함께 타야 한다고 강하게 권유했다. 그의 자신감에 이끌려 그가 추천한 종목 몇 개를 바로 매수했다. 분할 매수는 내 방식이 아니었다. 오직 한방, 그것이 내 투자 철학이었다.
그러나 환경친화적인 미국 대통령의 연임이 좌절되고, 내연기관 차량 확대를 주장하는 대통령이 당선된 지금, 상황은 급변했다. 주가는 떨어졌고, 나는 물을 타며 버텼지만 손실은 –37%를 기록했다. 손실금은 다시 1,400만 원이 넘었다. 그 친구는 지금 거의 투자금이 바닥을 헤매고 있다고 한다. 주식이 사람을 얼마나 잔인하게 시험하는지, 우리는 뼈저리게 실감하고 있다.
붉은 계좌를 들여다보다 다른 본전이 떠올랐다. 맛있는 음식을 먹을 때마다 드는 생각. "우리 부모님은 이런 걸 드셔보셨을까?" 혹여 못 드셔보셨을까 마음 쓰여, 나는 맛있다는 집은 부모님, 아내, 처가, 아이들까지 데려가 서너 번씩 방문하곤 한다.
그러다 생각했다. 나는 과연 부모님께 본전이라도 되는 자식일까? 새벽부터 밤까지 일하시며 나를 키우신 부모님. 본인들의 작은 기쁨은 미뤄두고 내 학비, 내 옷, 내 꿈을 챙기셨던 그 시절. 그 헌신 앞에 지금의 나는 너무도 작다. 지금 드리는 것들은 그 깊은 마음에 비하면 턱없이 모자라다.
나와 내 아이들을 비교하면 내가 다소 손해를 본다는 느낌이 들때가 있다. 본전 생각나는 순간들 말이다. 그러나, 사실 아이들은 어렸을 때, 조그만 손으로 내 손가락을 꼭 쥐고, 뒤뚱뒤뚱 걷다 품에 안기던 그때 이미 나에게 더없는 행복을 전해 주었다. 자식들에게서 나는 부모로서 받아야 할 것을 당겨 받은 것이다.
어쩌면 부모님도 그러실 것이다. 내가 살아가는 모습만으로도 이미 충분하다고, 더 바랄게 없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