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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밥

by 박계장

아파트 단지에서 도로로 접어드는 어디쯤. 검은색 긴 패딩에 모자를 푹 눌러쓰고 마스크까지 쓴, 체구 작은 사람이 서 있다. 성별조차 분간하기 어려운 모습이지만, 어쩐지 여성일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그녀는 스티로폼 박스를 옆에 두고 김밥을 팔고 있다. 박스 한 면에는 ‘김밥 2,000원’이라 큼지막하게 쓰인 종이가 붙어 있다.


아주 이른 시간엔 보이지 않지만, 대체로 아침 6시 30분쯤부터 그 자리에 나오는 듯하다. 그녀는 차를 몰고 나서는 날이면, 차창 너머로 스치듯 지나가던 존재였다. 스티로폼 박스 옆에 선 작은 뒷모습이 백미러 속으로 흘러갔다. 한 번쯤 사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 때도 있었다. 하지만 핸들을 잡고 출근길에 오르면 그 생각은 금세 잊히곤 했다.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시사방송에 귀를 기울이다 보면, 김밥의 맛을 상상할 여유는 좀처럼 나지 않았다.


그런데 오늘은 차를 두고 나왔다. 수요일, 내가 선택한 '승용차 요일제' 실천의 날이다. 자가용은 잠시 쉬고, 나의 하루는 대중교통과 함께 시작된다. 단지를 벗어나 도로 쪽으로 접어드는 길목, 그녀가 거기 있었다.

스티로폼 박스 안에서 꺼낸 김밥은 아직 따뜻했다. 세 줄을 샀다. 검은 비닐봉지에 담긴 김밥을 건네받으며 젓가락이 몇 개 들었는지 물었다. 무선 이어폰 너머로 들리는 라디오 소리에 그녀의 말이 잘 들리지 않았다. 이어폰을 손에 들고 말했다. “젓가락도 세 개 주세요.” 그녀는 이미 봉지에 들어 있다고 말하며 조용히 웃었다.

검은 비닐봉지 속, 은빛 알루미늄 호일로 싸인 김밥은 손에 따스한 온기를 남겼다. 그 온기는, 아마 그녀의 새벽이 얼마나 분주했는지를 말해주는 듯했다. 직원들과 함께 나누려는 마음도 있었지만, 추운 겨울부터 묵묵히 자리를 지켜온 그녀에게 조금이나마 힘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도 있었다.

“고생 많으시네요. 김밥 맛있어요?”

입 밖으로 나온 말이 어쩐지 민망했다. 맛없다는 대답이 나올 리 없잖은가.

“저는 맛있는데, 드시는 분들은 어떠실지 모르겠어요.”

그녀는 웃으며 답했다. 그 미소에는 새벽을 견디고 쌓아온 담담한 자신감이 배어 있었다. 도시가 아직 잠든 시간, 누군가는 주방에 불을 켜고, 한 줄 한 줄 삶을 말고 있었던 것이다.


김밥을 받아 들고 돌아서는 순간, 마음 한편에 현실적인 걱정이 스쳤다. 예전 구청에서 식품위생 업무를 맡았던 나는, 길거리 음식 판매가 법적으로 어떤 문제를 안고 있는지 잘 알고 있다. 그녀처럼 신고 없이 김밥을 판매하는 경우는 ‘무신고 식품접객업 또는 즉석판매제조가공업’에 해당되어, 상황에 따라 경찰서를 오가다가 결국 벌금을 물게 되는 일도 생긴다. 공직자로서 식중독 사고를 예방하고, 정식으로 영업신고를 하고 법을 지키며 운영하는 김밥 판매업소를 보호하기 위해서라도 이런 형태의 판매는 분명 금지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법은 누구에게나 공정해야 하며, 위생과 안전은 타협의 대상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녀의 모습을 떠올리면 마음이 흔들린다. 생계를 위해 새벽부터 김밥을 말아 추운 길가에 나온 이에게, 법의 잣대만을 들이대는 것이 과연 옳기만 한 일일까. 현실과 원칙 사이에서, 나 역시 늘 선뜻 답을 내리기 어렵다. 지금은 시청에서 정신건강팀장으로 일하고 있지만, 그 시절의 기억이 떠오르며 생각이 꼬리를 물었다. 혹시라도 그런 일이 그녀에게 닥친다면, 김밥을 손에 쥔 나도 마음이 편치 않을 것 같았다. 단순히 김밥을 파는 일이 아니라, 하루를 살아내기 위한 그녀의 생계가 걸려 있을 테니까.


지하철을 타고 시청에 도착했다.
1층 로비에서 보건위생과 여직원과 마주쳤다.
그녀는 활기차게 인사하며 고개를 숙였다.

“아침 식사 하셨어요?”
“바쁘게 나오느라 아직 못 먹었습니다.”

“김밥 한 줄 드릴까요?” 하고 묻자,
“주시면 잘 먹겠습니다.” 하고 웃으며 대답했다.

가방에서 김밥을 꺼내 건네니,
“고맙습니다. 잘 먹겠습니다.” 고개를 깊이 숙이며 인사한다.

맑고 또렷한 인사에 나도 덩달아 기분이 좋아졌다.


사무실에 도착해 김밥 한 줄을 꺼내 먹었다. 김밥 속 재료는 익숙한 것들이었다. 햄, 계란, 당근, 단무지, 오이. 햄은 유난히 가늘게 썰려 있었는데, 마치 스테인리스 젓가락 굵기만 했다. 그렇게 썬다는 건 손이 많이 가는 일일 것이다. 재료를 아껴야 하는 절박함이 스며 있었고, 요즘 김밥 한 줄 가격을 생각하면 그 정성은 충분히 이해가 되었다.


푸짐하지는 않아도, 밥의 간이 잘 맞고 전체적으로 조화로운 맛이 입 안에 퍼졌다. 단출하지만 모난 데 없고, 간결하지만 허전하지 않았다.

‘이 맛이었구나…’

운전대 너머로 스쳐 지나던 그 새벽의 풍경이, 오늘은 온전히 내 안으로 들어왔다.


남은 한 줄은 우리팀 직원 중 가장 먼저 출근한 직원에게 건넸다. 그녀는 김밥을 책상 한쪽에 내려놓으며 조용히 웃었다. 언젠가 배가 고파질 즈음, 동료들과 한두 알씩 나눠 먹을지도 모르겠다.


누군가의 정성 덕분에 오늘 아침을 따뜻하게 시작할 수 있었다.

이른 시간, 조용히 하루를 준비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런 이들의 하루가, 누군가에겐 작은 위로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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