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해 여름

비룡폭포 철제 계단에서의 추억

by 박계장

공직에 입문한 그해 11월, 신규 교육을 이수하게 되었다. 이미 3월에 발령이 나서 근무 중이었던 나와 달리 대부분의 동기들은 발령을 기다리고 있었다.


교육은 한 주간의 합숙으로 시작되었다. 지금은 북구 금곡동으로 옮겨졌지만, 당시 인재개발원은 수영구 망미동 황령산 자락에 있었다. 낡은 숙소, 철제 2층 침대, 얇은 매트리스. 고등학교 시절 기숙사를 떠올리게 하는 풍경이었다.


20대 초중반의 여성들과 그보다 서너 살 많은 남성들이 함께 지냈다. 젊은 남녀가 한 공간에서 4주를 보내다 보면, 자연스레 감정이 싹트는 일도 있었다. 그땐 미처 몰랐지만, 몇몇은 연인이 되었고, 실제로 결혼까지 이어진 이들도 있었다.


우리 분임에도 그런 한 쌍이 있었다. 강원도로 떠난 워크숍 전세버스 안, 앞자리 여자 동기들이 수다를 떨었다. "나는 덕스럽게 생긴 남자가 좋더라." 그때 '덕스럽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 몰랐다. 어렴풋이 인품을 뜻하는 것이라 짐작했을 뿐이다.


몇 년 후, 그 동기가 결혼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상대는 함께 교육받은 동기, 키가 크고 어깨가 넓은 토목직이었다. 그녀가 말한 '덕스럽다'는, 듬직한 체구에 잘생긴 외모를 뜻했던 걸까.


교육 기간 중 눈에 띄는 여자 동기들이 있었다. 우연히 마주치면 가슴이 뛰었고, 모임 중에 발표라도 하게되면 미소가 지어지기도 했다. 그러나 먼저 다가서지 못했다. 거절이 두려웠고, 무엇보다 내가 '덕스러운' 남자로 보이지 않을 거란 생각이 앞섰다.


교육이 끝나고 근무지로 돌아왔다. 일부 동기들은 정식 발령을 받았고, 나머지는 '실무 수습'으로 각 구청에 배치되었다. 실무 수습은 정식 공무원 발령 전의 실습 기간으로, 시보 6개월에 포함되었다.


내가 근무하던 구청에도 여러 동기들이 배치되었다. 8개월 먼저 발령받은 나는, 구청 분위기나 서류 작성 요령은 물론, 점심시간에 가볼 만한 식당이나 막내가 지켜야 할 예절까지 알려주며 자연스럽게 선배 대접을 받았다.


동기들은 나보다 나이가 많았다. 단 한 명, 두 살 어린 여자 동기가 있었다. 스물둘의 그녀는 나에게 물어볼 것이 많았고, 나는 아는 척하기에 바빴다.


어느 날 오후, 부서 문서 사송함에 내 이름이 적힌 편지봉투 하나가 들어 있었다. "마음이 눅눅해서 햇볕에 널어 까슬하게 말리고 싶다." 소녀 감성의 문장이 적혀 있었다.


가끔 저녁을 함께했고, 남포동까지 영화를 보러 나가기도 했다. 지금 생각하면 분명 연애였다. 그러나 우리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마음을 확인하는 한마디가 그토록 어려웠다.


어느 날, 그녀는 당시 인기 있던 김건모 2집 CD를 내게 보내왔다. 우리는 자주 밤늦게까지 통화했다. 그녀를 힘들게 하는 선임 이야기, 사소한 하루의 일상, 작은 웃음과 한숨. 그녀의 목소리는 내 하루의 마지막을 채워주었다. 그 모든 평범한 순간이 지금도 내 기억 속에 반짝인다.


서로 마음을 내어놓지 않았지만, 우리는 이미 연인이었을까. 아니면 직장생활의 고단함을 달래주던 친구였을까. 분명한 건, 그때 그녀가 있었기에 그 시절을 떠올리면 아직도 가슴 한편이 따뜻해진다는 사실이다.


1995년 봄, 나는 강서구청으로 발령이 났다. 우리는 확실한 이별도 하지 못한 채 멀어졌다. 마음을 확인하고 싶었지만, 거절이 두려워 묻지 못했다. 가끔 안부 전화를 했지만, 시간이 갈수록 통화 간격은 길어지고 목소리엔 어색함이 묻어났다.


그해 여름, 설악산으로 서로의 친구들과 함께 휴가를 가기로 했다. 일찌감치 잡아둔 약속이었다. 그러나 본격적인 여름이 오자, 그녀는 약속을 취소했다. 나는 친구와 둘이서 설악동으로 향했다.


장맛비가 막 끝난 설악산. 계곡물은 불어 있었고 하늘은 흐려 있었다. 습기 머금은 흙냄새가 산 아래까지 퍼졌고, 먹구름이 산자락을 덮고 있었다.


조용한 숲길을 걷다 보면 계곡물소리가 먼저 들려왔다. 돌다리를 건너며 발끝을 스치는 물안개에 몸이 젖었다. 주변은 나뭇잎 스치는 소리로 가득했고, 숲은 여전히 축축했다.


길이 가팔라지며 젖은 철제 계단이 나타났다. 미끄러지지 않으려 힘을 주며 올랐다. 발밑에서는 계곡물이 깊게 울렸고, 나뭇잎 끝에 맺힌 물방울이 뚝뚝 떨어졌다. 난간을 잡은 손끝에서는 비에 젖은 녹슨 쇠붙이 냄새가 희미하게 올라왔다.


계단 끝자락에 다다르자, 비룡폭포의 물줄기가 모습을 드러냈다. 설악산 한 구석, 습기와 낯선 바람, 쏟아지는 물소리. 그곳에 서 있었다는 사실만으로도, 그날의 기억은 선명하다.


나뭇잎의 물방울이 어깨를 적셨다. 친구는 앞서 걸었고, 나는 혼자였다. 그녀가 왜 오지 않았을까. 걷는 내내 쓸데없는 생각이 꼬리를 물었다.


가파른 철제 계단을 오르다, 위쪽에서 낯익은 얼굴이 내려왔다. 그녀였다. 짧은 머리가 비와 땀에 젖어 이마에 붙어 있었다. 그녀의 놀란 눈이 나를 마주쳤다가 재빨리 피했다. 그녀 뒤에는 익숙한 남자가 뒤따르고 있었다. 동사무소 직원, 키도 어깨도 크지 않은 사람이었다.


철제 계단은 두 사람이 서기도 비좁기도 하거니와 내려오고 올라가는 사람들이 줄을 이어 우리는 말없이 스쳐 지나갔다. 그 짧은 순간, 나는 모든 걸 이해했다. 약속을 취소한 이유도, 전화 너머 목소리가 낯설게 들렸던 이유도.


폭포까지 올랐지만, 비룡폭포는 기억나지 않는다. 물소리도, 풍경도 흐릿했다. 친구의 말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숙소로 돌아와 소주를 마셨다. 창밖에서 들려오던 빗소리가, 그녀와의 마지막이었다.


10년쯤 지나, 구청 민원봉사과에서 그녀를 다시 만났다. 인사 교류로 옮겨온 것이었다. 우리는 반가운 척 인사했지만, 더 이상 개인적인 일상에 대한 얘기는 하지 않았다. 얼마 후 나는 시청으로 전근을 갔다. 그로부터 20년이 흘렀다.


얼마 전, 메신저를 열어 그녀의 프로필 사진을 보았다. 한참을 들여다보다 조용히 창을 닫았다.


문득 궁금해졌다. 그녀도 가끔 내가 생각나고. 비룡폭포 철제 계단에서 스쳐 지나던 순간이, 햇볕에 널어 까슬하게 말리고 싶다던 그때의 감정이 떠오르는지.


나이가 들며 깨닫게 된다. 놓쳐버린 것들이, 손에 쥔 것들보다 더 소중할 때가 있고, 끝맺지 못한 이야기가 완결된 이야기보다 더 오래 기억될 때도 있다는 것을.


그때 내가 고백했다면 어땠을까. 거절당하고 며칠을 술로 달래며 지냈을까, 아니면 지금 내 곁에 있는 사람 대신 그 여자가 있을까. 어찌 되었든, 철제 계단 위에서 멈췄던 그 시간 덕분에 우리는 영원히 스물둘과 스물넷으로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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