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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십칠도씨 Sep 20. 2022

나를 사로잡은 이 한 편의 이야기

디즈니 <뮬란>, 혹은 화목란의 이야기

    내 또래 친구들이 대부분 그러했듯 나도 어릴 적 디즈니 애니메이션을 보며 자랐다. 유치원을 다니던 때의 내게 TV로 보이는 세상은 온통 예쁜 드레스를 입은 공주들로 가득했다. 그래서 스스로 고민할 틈도 없이 아름다움이 곧 여성의 이상적이며 유일한 모습이라고 어렴풋이 믿었던 것 같다. 가냘픈 몸과 하얀 얼굴로 백마 탄 왕자님을 기다리던 공주의 모습에 익숙하던 내게 초등학교 시절 비디오로 처음 마주한 뮬란은 그래서 신선한 충격이었다. 여자 주인공이 바지를 입고, 머리를 짧게 자르고, 심지어 입대해서 전쟁터에 나가다니! 여성이 주인공이 되어 악당과 싸우는 서사는 내게 <뮬란>이 처음이었기 때문에 여성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에 관한 나의 가치관에 큰 영향을 주었다.


    디즈니의 <뮬란>은 중국에서 전해 내려오는 화목란의 이야기인 <목란사>를 기반으로 했다고 한다. 그러나 조선의 이름 모를 작가는 디즈니보다 훨씬 먼저 <목란사>를 바탕으로 한 새로운 콘텐츠를 만들어냈다. 바로 <홍계월전>이다. <목란사>와 <홍계월전>의 주인공은 모두 원래부터 월등한 능력을 가지고 장군이 되어 군대를 이끌지만 뮬란은 제대로 하는 것 하나 없던 말단 병사가 중국을 구한다는 데에서 가장 큰 차이점을 보인다. <홍계월전>에서 문무를 겸비한 홍계월이 남성 병사들을 지휘해 첫 전투부터 승리로 이끄는 모습도 통쾌하기는 하다. 그래도 완벽하지 않은 뮬란이 고민하고 갈등하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포기하지 않는 모습이 어린 나에게는 어떤 감동을 주었다. 또한 성장해가는 뮬란을 보며 나도 저렇게 용감하고 나 자체로 인정받고 싶다는 생각을 품게 되기도 했다.


    뮬란이 남장을 하고 전쟁에 나간 본래 목적은 출전을 한다면 전사할 것이 자명한, 다리가 불편하신 아버지를 막기 위해서였다. 겉으로 보기엔 외동딸로서 효를 다한다는 가문의 문제가 동기였지만 지금 돌이켜 생각해보면 오히려 뮬란의 개인적 욕망이 그 안에 더 크게 반영되어 있던 것 같다. 뮬란은 시대가 요구하던 여성상과 거리가 있었다. 여자가 가문에 공헌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좋은 가문의 남자에게 혼인을 가는 것인데, 뮬란의 재치 있고 당당한 성격은 이상적인 신붓감과 거리가 멀었다. 무엇보다 뮬란은 보편적인 여성의 삶에 불만을 느꼈다. 얼굴을 덮은 화장을 지워내며 ‘언제쯤 거울이 내 진정한 모습을 보여줄까’ 노래하며 괴로워한다. 이와 대조적으로 군대에서 특유의 성실함과 창의력으로 난관을 극복해내는 과정 속에서 뮬란은 오히려 더 행복해 보였다. 아프신 아버지가 이유이긴 했지만 뮬란은 어느 때이고 자신을 보여주고 싶은 열망을 품고 있던 게 아니었을까?


    남장(男裝)과 출전이 뮬란의 개인적 욕망과 맞닿아 있다는 해석에서 더 나아가 보자면, <뮬란>은 하나의 주체로서의 개인이 돋보이는 서사이기도 했다. 자신의 의지와 노력으로 성취를 해내는 진취적인 주인공이 여성이라는 점은 같은 성별인 내게 큰 자극이 되었다. 자신의 노력과는 상관없이 누군가의 사랑을 받느냐 마느냐로 인생이 결정되는 건 어릴 때나 지금이나 이해되지 않는다. 여성들이 ‘선택받기’ 위해 허리에 숨 막히는 띠를 두르고 얼굴에 화장을 하는 모습은 <뮬란>의 배경이 된 시대 이후로 많은 시간이 흐른 현대에도 그리 달라지지 않은 것 같아 씁쓸하다. 중매의 집 앞에서 남성의 선택을 기다리는 여성들을 보며 느낀 불편함의 정체를 조금 더 커서 알게 되었다. 자기 삶의 주인공이 자신이 아닌 여성의 숙명에 대한 슬픔이자 그러한 삶이 나에게도 똑같이 다가오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이었다. 노력하면 이루지 못할 것이 없고, 그 노력의 주체는 다른 누구도 아닌 ‘나’여야 한다고 각오하게 된 계기였다. 노력을 중요시하고 독립적인 지금의 내 성격을 형성하는 데에는 어릴 적 가장 멋진 영웅이었던 뮬란의 영향도 없지 않을 것이다.


    최근 페미니즘이 사회적인 공감을 얻으며 디즈니 애니메이션의 내러티브도 변화하고 있다. <겨울왕국>에서는 초월적인 힘을 가진 언니와 그를 구하는 동생이 주인공이 되어 역경을 헤쳐 나가고, 최근 실사화된 <알라딘>에서도 원작에서는 공주로 남은 채 결혼하던 자스민이 직접 술탄이 된 결말을 예로 들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페미니즘이 현재처럼 대중적이지 않았던 90년대에는 여자여도 남자와 똑같이 뭐든지 해낼 수 있다는, 어찌 보면 유치할 정도로 뻔한 사실을 알려주는 매체가 거의 없었다. 그렇기에 뮬란을 어릴 때 본 것은 지금 돌이켜 봐도 굉장히 큰 행운이었다. 의지와 성취로 자신의 삶을 살아가는 여성의 이야기는 어릴 적이나 지금이나 내게 용기를 주는 이정표이다.


2019/06/06 작성. 한국고전문학의이해 쪽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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