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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십칠도씨 Oct 11. 2022

오전 8시의 1호선에서

출퇴근길 서울에서 지하철을 타고 다니다 보면 일 자체보다도 이동하는 시간의 고통이 더 큰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서로가 서로에게 경쟁상대일 뿐인(아니다, 혐오대상이란 표현이 맞을까?) 아비규환에 갇혀있다 보면 하루에 쓸 수 있는 모든 에너지가 다 고갈된 듯한 공허함이 느껴진다.

모르는 사람과 인상을 찌푸린 채 언성을 높이고, 다투고, 밀치고 밀쳐지고, 밟고 밟히고, 만지고 만져지고... 이런 인간군상을 보고 있자면(물론 그곳엔 나 자신도 포함되어 있다) 지옥이 멀리 있지 않다는 생각도 든다.


나의 출근길은 까치산행 2호선 지선에서 시작해 신도림역에서 하차하고 1호선으로 환승하는 코스다. 애초에 까치선 지선은 지선이어서는 안 된다. 이는 차량기지가 집값에 미치는 영향이라든가 누가 구청장이 되든 지켜지지 않는 공약이라든가 하는 문제만은 아니다. 거의 폐역에 가까운 도림천역은 차치하더라도, 나머지 세 역(까치산역, 신정네거리역, 양천구청역) 근처에 사는 인구 수만 봐도 웬만한 본선 지하철역 근처 거주인구보다 많을 것이다. 사람 많기로 유명한 서울시에서도 면적 대비 인구수 1위인 양천구를 지나는 지하철이 그나마도 지선이라는 점은 이 지역의 가장 큰 미스터리다. 많아봤자 10분에 한번 오는 배차간격은 더욱. 신정네거리역에서 이미 꽉 차는 열차는 대단지 근처의 양천구청역에서 절정을 맞는다. 이 순간부터는 그저 버티면서 이 시간이 끝나기를 기도하는 방법밖엔 없다. 내린다고 끝이 아니다. 빠져나가는 계단이 많지 않고, 통로에 군데군데 좁아지는 지점이 있는 신도림역 지선 플랫폼의 구조적 문제에 더해 한꺼번에 많은 사람이 몰리는 열차의 특성상 환승도 5분 이상을 잡아먹는다. 그럼에도 신도림으로 가는 버스는 막혀서 언제 도착할지 모르기 때문에 주민들은 그런 불편함을 감수하고라도 지하철 지선을 탄다.


어제는 뒷사람에 밀려 앞사람을 밀다가 나보다도 어려 보이는 20대 초반의 여자에게 "씨0 존0 밀어대네!"라는 말을 들었다. 집에 가자고 생판 모르는 이에게 쌍욕을 듣고 있자니 흔히들 말하는 '현타'가 왔다. 집에 가는 길에 혼자 울었다. 어제의 퇴근길도 끔찍했지만 오늘 출근길은 최악이었다. 늦게 가는 둘째치고 사람이 상상도 못 하게 많았다. 어느 정도였냐면 혼잡도로 유명한 9호선보다 더했다. 2호선 지선부터 1호선까지, 모든 시간이 숨조차 쉬기 어려웠다.


시작인 2호선 지선부터 불길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사람이 평소보다도 미어터졌다. 이걸 놓치면 다음 차가 10분 후에 온다는 사실과, 1분 1초가 아까운 출근길에 10분을 생으로 날려야 한다는 위기감에 다들 이미 꽉 찬 열차에 끊임없이 비집고 들어왔다. 그걸 버티고 겨우 1호선으로 환승했지만 차가 계속 안 왔다. 막상 한참을 기다린 열차가 제대로 움직이지도 않아 서러움이 폭발했다. 사람이 많으니 역에서는 문을 다섯 번씩 여닫았고, 뚱뚱한 지하철은 느리게 달렸다. 괴로운 시간은 점점 길어졌다. 사람들은 서로 욕하고 화내고 밀치다가 싸움 직전까지 갔다. 갈비뼈까지 짓눌려서 물리적으로도 힘들긴 했지만 고질병인 공황이 문제였다. 숨이 안 쉬어지고, 꽉 찬 실내를 보면 혼절할 것 같아 계속 울면서 눈을 가리고 있었다. 과호흡이 왔다. 다들 딱 달라붙은 상태에서 헉헉거렸으니, 변태로 오해받을까봐 걱정됐다. 눈물에 젖어 얼굴에 착 붙은 마스크 때문에 숨쉬기가 더 힘들었다. 옛날에 죄수의 얼굴에 젖은 종이를 올려놔 서서히 질식시키는 도모지라는 형벌이 있었다는데 딱 그 형국이었다. 지도로는 16분밖에 걸리지 않는 여덟 정거장의 길이 40분 넘게 걸렸다. 내 괴로움도 그만큼 길어졌다. 역에 도착할 때마다 생계가 걸린 이들의 거친 몸부림에 몇 번을 휩쓸리고 내팽겨지고 밟히고를 반복했다.


평생 이러면서 살아야 하는 걸까? 갑자기 눈앞이 캄캄했다. 이런 식으로 몇 년, 몇십 년을 버텨야 하는 운명이 숨 막혔다. 왜 살아있는 걸까 하는 근본적이고도 우울한 질문이 오랜만에 떠올랐다. 이 질문의 답은 언제나 같다. 죽음. '나'를 먹여 살리기 위해서 '내'가 대부분의 시간을 고통을 버티며 겨우 살아대야 한다는 모순. 내가 원해 시작된 삶이 아닌데 이 짐덩어리 같은 삶을 책임지려면 죽을 때까지 고통스러워야 한다는 사실에 직면하니 공포스러웠다. 언제까지 버텨야 하는 거지? 누군가에게는 그저 기분 나쁘고, 지각해서 상사에게 눈치 보이는 정도로 끝날 출근길이 나에게는 생과 사 사이의 아슬아슬한 갈림길처럼 느껴졌다.

사소한 것이기에 더 크게 다가오는 기분을 알 것이다. 무언가를 못한다면, 이런 것도 못하다니…사소한 걸로 슬프다면, 고작 이런 걸로 슬퍼지다니…이런 자괴감은 그 불행이나 문제 자체보다도 당사자를 괴롭게 만든다. 도착지에서 내리니 온 몸이 너덜거렸다. 이미 지각은 확정이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1호선은 며칠 전부터 계속 파업을 하고 있다고 했다. 고의로 멈추거나 천천히 운행을 하는 식으로. 파업을 하는 그들에게는 나름의 생계 이유가 있을 것이다. 하지만 온통 뾰족하고 난폭하던 지하철 안의 그 군중들도 생계를 위해 아침부터 나선 사람들이다. 우리를 가득 채워 넘실거리던 그 적개심도, 생에 대한 간절함에서 왔을 것이다. 누군가의 삶의 무게가 다른 누군가의 삶보다 무겁다고 할 수 있을까? 모두에게 고통은 평등할 뿐이다.


2022/1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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