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십칠도씨 Oct 12. 2022

패신저스 (2016)

<패신저스>는 SF영화의 가면을 쓴 철학 혹은 사고실험 영화에 가깝다. 여기서 우주라는 건 극한의 상황을 보여주기 위해 설정된 공간일 뿐이다. 또한 이 공간이 기능하는 방식은 인간이 삶에서 마주치는 예상치 못한 아름다움이나 위험의 비유로서가 유일하다. 1등석의 넓은 창문에서 스쳐가는 별의 모습은 주인공의 생일을 축하해주는 아름다운 풍경 이외의 역할을 하지 않는다. 우주선이 폭발 지경에 다다른 시점에도, 선체의 기술 설정이라든가 우주복이 핵융합의 열을 버틸 수 있는가의 핍진성을 조명하지 않는다. 다른 은하계에 제2의 지구를 건설할 만큼 발전한 과학기술에 대해 세계관을 주절주절 늘어놓지도 않는다. 설정이 허술해 보일 정도로 별 설명이 없다. 하지만 이런 선택과 집중이 이 영화를 특별하게 만든다. 이 영화는 과학기술이나 우주나 외계 행성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기 때문이다. 인간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우주를 배경으로 인간에 대한 이야기가 펼쳐진다는 설정이 독특하다.


긴 우주여행 중 우연히 동면에서 깨버린 주인공 '짐'은 홀로 1년을 외로움 속에서 버티다가 첫눈에 반한 여자를 고의로 깨워버린다. 영화에서는 이성관계로 표현되긴 하나, 이 사랑은 주체적 선택이라는 점에서 인간이 자녀를 낳는 것의 비유일 수도 있다는 생각도 든다. 이 비밀을 알게 된 '오로라'는 자신을 깨운 짐에게 분노하지만, 많은 일을 겪으면서 그를 다시 사랑하게 된다.

이를 자식과 부모 사이의 관계로 읽은 것은 내 개인적 경험의 영향도 컸다. 나 또한 고통스러운 삶에 나를 데려온 부모를 원망했기 때문이다. 이젠 원망까지는 아니지만, 태어남은 곧 고통의 바다에 던져져 항해를 시작하는 것이라는 운명의 속성에 대해서는 다르지 않은 생각이다. 하지만 내가 많은 일을 겪고 성장하면서 언젠가는 인생을 사랑하게 된다면(과연 그럴 날이 올까?) 오로라가 그랬던 것처럼 날 세상에 데려온 사람을 사랑하게 될 수도 있을 것 같다.


서양 영화의 고전적 스토리텔링 방식이 보이기도 한다. 성서의 은유가 그것이다. 한 쌍의 짝이 인류를 번성시킨다는 설정은 아담과 이브 이야기를 떠올리게 한다. 남자는 외로워하고 여자를 세상에 불러낸다. 광활한 우주 안에서 그 둘만이 남는다. 그리고 그들은 나머지 4997명의 승객들 모두에게, 그리고 남은 자들이 낳을 또 다른 자손들에게 생명의 가능성을 선물한다. 영화 속 Homestead는 짐과 오로라에게는 죽어서만 갈 수 있는 천국이지만, 그들이 살려낸 나머지 잠든 승객들에게는 실존할 삶이자 미래다. 이런 측면에서는 그들이 인류의 구원을 이끌어낸 예수의 상징으로 읽힐 수도 있을 것이다.




우리는 승객일 뿐이라는 오로라의 말은 영화의 주제를 관통한다. 메시지가 등장인물의 입을 통해서 직접 발화되니 관객은 깊게 고민할 필요 없이 받아들이게 된다. 사실 평소에는 이런 방식을 좋아하지 않는다. 개인적으로 메시지가 너무 노골적이지도 않고 너무 난해하지도 않은 것이 좋은 상업영화라고 생각한다. 또한 전자에 가까운지, 후자에 가까운지가 상업영화와 예술영화를 구분하는 가장 큰 기준 중 하나라고 본다. 이 영화는 전달 방식이 노골적인 편에 가까웠지만, 메시지가 마음에 들어 좋은 기억으로 남았다.


이유 모를 사고로 깨어난 짐의 상황은 아무것도 모른 채 이 땅에 태어난 인간 모두의 운명을 대변한다. 우리는 머나먼 천국으로 떠나는 우주선에 타고 있고, 내리거나 돌아갈 방법도 없다. 우리가 인간으로 태어났으며 삶이라는 두려운 길을 걸어가야 한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주인공 두 명이 아무리 원하거나 원하지 않거나 우주선에서 내릴 수 없는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인간이 거대 질서에 그저 속박된 존재인가? 그렇지는 않다. 짐과 오로라는 운명 위에 올라탄 '승객'이라는 한계 안에서 식민지("Homestead")가 아닌 그들만의 신세계를 창조해낸다. 또한 운명을 부정하지 않고 그대로 직시한 채로 그들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낸다. 그리하여 그들이 만들어낸 세계는 살아남아 몇십 년 후에 깨어난 다른 승객들에게 발견된다. 그 세계는 삭막한 금속 재질의 우주선과는 다르게 살아있고 움직이고 아름답다.


우리는 그저 승객이 아니며 운명이 우리를 이끄는 대로 그저 몸을 맡겨버려서는 안 된다. 인생이 잘못되어가고 있다면 위험을 감수하며 극복해야 하고, 절망하고 기뻐하며, 실패하고 성공을 겪어야 한다.

그런 우리의 노력이 아직 깨어나지 않은 잠재적 생명을 불러낼 수 있다.


영화 속 "Passengers"가 영화 밖 "Passengers"에게 띄운 전언이 아닐까.

결국 인류를 구하는 것은 사랑, 그리고 변하지 않는 숙명 안에서 삶을 개척하려는 노력이라고.


2022/10/02.

keyword
작가의 이전글 오전 8시의 1호선에서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