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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십칠도씨 Sep 20. 2022

나를 매료시킨 노래/시

언니네 이발관 - 누구나 아는 비밀

그대는 이미 알고 있던 걸까
우리가 헤어질 수 밖에 없는 사이란 걸
아무 일도 아닌 듯이 있어도
알 수 있어 그대의 눈빛에 쓰여 있으니

우린 같은 상처 안고 우연히 마주쳤지

그래요 안녕은 언젠가 우릴 찾아올 거야
말없이 다가와 귓가에 속삭이듯 그렇게
너는 나에게 말하길 영원한 것은 없다 했지
그런 날 보며 그대도 함께 고개를 끄덕였어요
끝도 시작도 뻔한 그 일을 내가 왜 해 하다가

우린 만났지 하지만

시간이 갈수록 쌓여가는 건
우리가 헤어질 수 밖에 없는 이유였어
그대여 이렇게 우린 서로를 향해 가던 길을
되돌아 오고 있는 걸까

그렇지만 난 가끔은 영원을 꿈꾸곤 하지
긴 시간들이 지나도 녹지 않는 아이스크림처럼
끝도 시작도 뻔한 줄 알면서 우린 왜 만났을까
그걸 나도 모르겠어

또 일년이 흘렀어

음악 소리에 맞춰서 우린 오늘도 함께 춤을 추고 있어
모든 게 변하는 세상 속에서 믿을 수 있는 건
함께 있는 지금뿐인걸

알 것 같아 난 영원보다도 길고 더욱 소중한 것
그건 바로 지금이야 날 보고 있는 너를 보면
이 순간이 영원이야 바로 지금 우리 여기 이곳
(그게 바로 뻔할 줄 알면서도 우리가 만난 이유야 이제야 알았어)
그게 바로 영원이야 우리가 함께 하는 순간
중요한 건 지금이야 바로 지금 우리 여기 이곳

사랑이란 이 노래 보다도 짧아
그럴 땐 자꾸 부르면 되지
속삭여 줘요
오늘도 내 귓가에
속삭여 줘요


<누구나 아는 비밀>의 내러티브가 나의 인생관과 사랑관에 끼친 영향에 대하여


    결말이 정해져 있다면 모든 노력은 무의미한 것일까? 인간은 타인을 온전히 이해할 수 없고, 삶도 사랑도 언젠가 끝난다. <누구나 아는 비밀>은 이러한 덧없음에 대한 문제의식에서 출발하는 이야기이다. 우리는 모두 타인의 이해를 갈구하는 사회적 존재이지만 동시에 서로가 서로에게 타자이기 때문에 상호 이해를 이루기 어렵다. 이 사실을 다들 알고 있으나 인정하고 싶지 않아 한다. 만약 인정한다면 자신이 가치를 부여하고 노력을 쏟은 모든 관계가 무의미해지는 절망적인 사실이기 때문이다. 이를 알면서도 사랑을 하러 두 사람이 만나는 장면으로 이 노래는 시작한다. "같은 상처를 안고" 만나는 연인은 자신과 상대방이 같은 상처를 공유하기 때문에 진정으로 서로의 내면을 ‘공유’할 수 있을 것이라 착각한다. 그러한 타인이 자신의 상처를 정확히 인식하기를, 그래서 궁극적으로 자신을 온전히 이해하기를 기대한다. 그러나 사실 두 연인은 본질적으로 타인이기 때문에 같은 상처조차 이해할 수 없다.


    몰이해의 벽을 극복하고 둘의 만남을 가능케 한 것은 지금 이 순간의 사랑이다. 그러나 이 사랑은 언젠가 반드시 변한다는 근원적인 한계를 가지고 있다. 둘은 "안녕은 언젠가 우리를 찾아올거야"라며 그 사실을 인정하면서도 "영원을 꿈꾸"는 모순을 보여준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두 연인이 헤어질 수 밖에 없는 이유가 점차 명백해진다. 그 이유는 알면서도 모른 척하고 있던 ‘모두가 아는 비밀’, 즉 영원한 것은 없다는 사실이다. 바라만 봐도 행복하고, 그를 위해 내가 가진 모든 걸 주고 싶던 열렬한 사랑도 시간이 지나면 흐릿해진다. 그렇다면 사랑은 변하기 때문에 무의미한 것인가? 그러나 이 노래는 모든 것이 끝나기 때문에 의미가 없다는 허무주의로 끝나지 않는다. 모든 게 변한다는 것보다 더욱 중요한 건 이 순간이 영원하다는 사실이다. 니체의 영원회귀 개념에 따르면 이 순간이 영원한 과거와 미래를 응축시킨 영원적 의미를 가진다. 순간이 영원이기 때문에 이 순간을, 그리고 이 순간의 ‘너’를 더욱 치열하게 사랑해야 한다. "영원보다도 길고 더욱 소중한 것"은 "이 순간"이다. 영원한 건 없으나 순간은 영원히 반복된다는 영원 회귀는 허무주의로 끝날 수도 있지만 삶에 대한 긍정과 더불어 이 순간에 대한 긍정으로 나아간다.


    역설적으로 들릴 수도 있지만 순간은 영원하다. 그러므로 영원한 것은 없지만 동시에 영원한 건 이 순간 뿐이다. 4분 남짓한 이 노래보다도 짧은 사랑이지만, 그럴 때면 노래를 자꾸 부르면 된다는 가사처럼 노래보다도 짧은 순간의 사랑은 영원히 반복된다. 최근 들어 YOLO(You Only Live Once)와 ‘소확행(소소하지만 확실한 행복)’ 트렌드에 열광하는 것도 비슷한 이치이지 않을까. 미래의 어느 날을 위해 돈을 열심히 모아서 저축하는 것이 가장 큰 목표였던 과거의 유행과 달리 요즘은 언제 올지 모를 불확실한 미래를 걱정하기 보다는 손으로 만질 수 있는 지금을 착실하게 즐기는 유행이 번지고 있다. 물론 대책 없이 재산을 탕진하거나 자신의 ‘이 순간’을 위해 남에게 피해를 주는 자기 파멸적인 욜로는 진정한 실존주의라고 보기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순간을 사랑하라는 이 노래처럼 오늘만을 충실히 사는 욜로는 니체의 실존주의의 연장선이라고도 볼 수 있다. 변하지 않는 견고한 무언가가 존재하지 않는 세상 속에서 순간에 대해 충실하는 것이 삶의 의미를 찾는 방법이 아닐까.


    이 노래는 내가 지금 이 순간에 대해 최선을 다하는 이유를 명확하게 밝혀 주었다. 하루를 살아가는 게 너무 힘들어 내일 밤까지만 살 것이라며 매일을 버텨내던 시절이 있었다. 삶에 대해 극단적으로 부정하는 것 같은 태도였지만 역설적이게도 그 때부터 나는 삶의 끝에서 후회하지 않도록 오늘을 열심히 살아야겠다고 다짐했던 기억이 난다. 이 노래를 처음 알게 되었을 때 오늘만을 생각하고 살아가는 내 자신을 응원해주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누군가를 사랑할 때, 나와 다른 그를 영원히 이해할 수 없으며 나의 마음이나 상대방의 마음이 언젠가 변할 것을 안다. 그러나 그 사실을 애써 부정하거나 숨기기보다는 그대로 인정하고, 모든 게 변하기 때문에 영원히 반복될 이 순간 동안 삶과 사람을 더 열심히 사랑하라는 게 이 이야기가 전하는 궁극적인 메시지일 것이다. 내일 삶이 끝나더라도, 혹은 나의 노력이 결과적으로는 무의미할 수도 있더라도 이 순간을 살아가는 ‘나’는 영원하기 때문이다.


2019/06/03 한국고전문학의이해 쪽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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