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문과 대학원생도 인턴을 할 수 있다고?
2026.02.11., 졸업논문 제출 후에 다시 취준생 신분으로 돌아간다는 마음으로 지원한 문화체육관광부의 청년인턴 지원에서 서류탈락한 사실을 확인했다. 국립국어원에서 사전 편찬 관련 연구를 하는 직무였다. 전공 관련한 몇 안되는 인턴 기회에서 번번이 탈락하니(심지어 채용형도 아니고 체험형인데!) 회의감이 든다. 돈 적게 받아도 내가 좋아하고 잘하는 일 해보고 싶다는 소박한 욕심이 있었으나, 전공 살리기는 아무래도 어려울 듯 싶다. 다시 취업에 성공하게 된대도 석사까지 딴 국문학과는 관련 없는 기업/기관에 갈 것 같다는 예감이 강하게 든다...
오랜만에 느껴보는 불합격의 씁쓸함을 곱씹고 있자니 가장 최근에 겪은 불합이 떠올랐다. 그건 석사 3학기가 끝난 겨울방학에 교내 모 사업단에서 주최한 동계 인턴십 자리였다. 그때는 서류합까지는 성공하고 한국문학번역원에서 면접을 봤지만 최종적으로 불합이었다. 2(면접관):3~4(면접자) 면접이었고 면접에 무지 약한 나로서는 찢었다(ㅋㅋㅋ)고 생각될 정도로 괜찮게 말하고 나왔는데 떨어져서 기분이 좋진 않았다. 최종합은 누구였을까?
불합 결과를 확인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곳에서 일하시는 친한 교수님을 뵈러 번역원으로 찾아간 날에 공교롭게도 면접을 주관한 직원과 다시 마주쳤다. 그는 당시 지원자들을 곤란한 질문과 꼬리질문으로 몰아붙이며 압박면접을 위한 악역을 훌륭히 수행했지만, 막상 면접에서 떨어트린 지원자를 마주하니 머쓱했는지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교수님이 면접 괜찮지 않았냐고 묻자 "너무 훌륭한 분인데," 하고 뒤에 말을 흐렸던 기억이 난다. 그 사람도 나름의 사정이 있었겠지만, 인사팀은 역시 정이 안 간다.
2024.12.26.
번역원이 위치한 봉은사역으로 가기 위해 오랜만에 9호선 급행을 타니 언제나 사람 많고 어둑어둑하고 기분이 별로다. 합격한다고 하면 이걸 매일 타고 다녀야 한다는 생각에 한숨이 나왔다. 출퇴근 시간의 9호선은 연봉을 깎아서라도 피하는 게 정신건강에 좋다고 생각한다. 봉은사역에 도착하니 면접 전까지 시간이 좀 남아있어, 봉은사를 잠시 구경하고 명상길을 한바퀴 돌았다. 몇 달 전 갔던 백운사가 떠올랐다. 영화에 나올 것 같은 그 멋진 산사에 비하면 여긴 허접하기 그지 없지만 접근성 때문인지 아니면 도심 한가운데 자리잡았다는 이질성 때문인지 늘 방문객으로 가득하다. 마음이 너무 힘들어 나무아미타불 염불을 틀어놓고 이번 학기의 기말 보고서를 겨우 완성한 기억도 났다. 어느 절이든 들어서면 일단 마음이 편해지는 게 있는 것 같다.
돈이 있을리 만무한 문학 관련 기관이 강남에 있어 의아했으나, 역시나 번역원 건물은 아주 소박했다.대기 중에 지원자들에게 안내를 해준 사람은 말단 직원처럼 보였다. 그녀의 주눅든 모습을 보며 왠지 모르게 이 집단이 굉장히 규율을 중시하고 꼰대 같다는 직감을 어렴풋이 느꼈다. 학교 내부 단체에서 연계로 하는 거라 면접은 그냥 요식행위일 줄 알았는데 내 생각과 달리 일반 기업 면접과 매우 유사했다. 베누티, 베르망, 벤야민 등 번역 이론가들을 복습한 게 아무 의미가 없었다. 번역에 관한 건 하나도 안 물어보고 엉뚱한 질문을 했다. 자기소개 2분, 상황질문 3분, 인재상 관련 최종발언 1분. 아마 시다바리 중에서도 제일 시다바리 일이나 시킬 모양인듯 했다. 자기소개를 들어보니 내 양옆에 앉은 지원자들은 다 학부생들이었다. 국문과 2학년, 문화인류학과 4학년. 그리고 얼어서 틀에 박힌 대답을 하는 게 눈에 보였다. 나도 저러긴 했지만, 지나놓고 나니 이제야 저게 보이는 구나.
재수없는 면접관은 첫 번째 지원자가 답변을 너무 길게 한 것에 대해 꼽을 주며 인턴 면접이라 그렇게 타이트하게 하지는 않을 거지만 정직원 면접은 시간을 칼 같이 자른다고, 시간을 지켜서 얘기해달라고 했다. (우리가 칸트도 아니고 시계가 없는데 3분인지 4분인지 알 게 뭐람?) 대놓고 핸드폰으로 시계 힐끔힐끔 확인하는 것이 정말 밥맛이었는데, 고작 인턴 면접에 면접 컨셉을 그렇게 잡은 이유가 궁금했다. 그를 보며 자꾸만 퇴사한 회사의 인사부장이 떠올랐다.
가장 길게 대답해야 했던 상황질문은 책임과 권한에 대한 것이었다. 지원자가 인턴이 되어서 번역도서관에서 근무를 하고 있는데 70대 남성분이 와서 대출을 해달라고 한다, 그런데 그 분은 이미 연체를 많이 한 상태고 도서관 규정상 연체한 날만큼 대출이 안 된다. 다른 직원분들은 모두 회의에 들어간 상황이라면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 사실 답은 정해져 있는 질문이고 ‘독단적으로 행동하지 말고 기다린 뒤 상사의 지시를 따른다’ 정도로 짧게 끝날 질문인데 3분이나 대답하라고 하니 난감했다. 질문의 핵심은 저 원칙에서 뭐를 더할 것인가인 듯했다. 첫번째로 답변한 지원자는 자신이 국립중앙도서관에서 일하던 경험을 꺼내서 뭔가 참신한 대답이 나올까 싶었는데, 오히려 위험한 답변을 했다. 어떻게든 빌려줘보겠다는 것이다. 두번째 지원자는 더 가관이었다. 자신이 대신 대출해줘서 책에 훼손이 가거나 해도 자신이 사적으로 책임지겠다고 답했다. 큰일날 소리다. 말단 인턴이 책임을 지면 얼마나 질 수 있을 것이며, 좋은 의도로 한 배려가 피해로 돌아왔을 때 의연할 자신이 있는 건지 궁금했다. 학부생들의 패기 넘치면서도 조금은 황당한 답변을 들으며 난 그 원칙에 더해 무엇으로 승부를 봐야 하나 고민하다가 대답했다. “저는 다른 지원자분들께서도 말씀하셨지만 우선은 대출이 어렵다는 원칙을 밝혀드릴 것 같습니다. 제가 인턴이라 다른 상사분들이 안 계신 상황에서 독단적으로 판단을 내리기가 어렵다는 상황을 설명드린 뒤에 제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 생각해보고 그 선 안에서 최선을 다해볼 것 같습니다. 예를 들면, 다른 선배분들이나 상사께서 회의에 가 계시니 그 시간 동안 어르신께 따뜻한 차라도 한 잔 대접하면서 편히 기다리실 수 있게 할 것 같습니다.” 다른 지원자들에 비해 간명하게 대답했는데(3분을 줬지만 2분이나 될까 싶었다) ‘따뜻한 차’ 부분에서 재수 없는 면접관이 웃는 걸 보니 마음에 둔 눈치였다. 한참 전에 일반 기업 면접 준비하던 것이 여기서 도움이 되다니, 무엇이든 우선 열심히 해두면 언젠가는 써먹는구나 싶었다.
면접을 마무리할 때가 되자 그 재수탱은 다들 말씀을 너무 잘 하셔서 인턴 면접이 아니라 정직원으로 하셔도 될 것 같다고, 인사치레인지 뭔지 모를 말을 했다. 마지막 질문에 앞서 그가 강조한 건 인턴으로서 대단한 일을 못한다는 것, 그리고 책임감과 성실함이 중요하다는 것이었다. 다른 지원자들은 자신이 어디에서 일을 하면서 성실했다, 어떤 프로그램에 참여하면서 단 한번의 결석도 없었다는 식으로 어필했다. 그건 그렇다 쳐도, 마지막 어필을 문학소녀라며 한강 이야기를 꺼내거나 영어편지를 적으며 느낀 소감으로 하는 건, (그분께는 죄송한 말이지만) 와닿지 않을 뿐만 아니라 오글거렸다. 내가 면접관이라면 식상한 답이 나올 수밖에 없는 이 질문에 무엇을 기대한 건지 머리를 열심히 굴려보았으나 나라고 그리 뾰족한 수가 있는 건 아니었다. “사실은 지금 여기서 제가 저에 대해서 어떤 말을 한다고 해도, 성실하다거나 책임감이 훌륭하다고 면접관님들께 증명이 될 지는 모르겠습니다. (이때 무관심한 컨셉으로 아무런 리액션도 없던 외국인 면접관이 처음으로 공감한다는 듯 내 쪽을 보며 웃었고 재수탱도 가려운 곳이라도 긁어준 듯이 공감한다는 웃음이었다) 그래서 제가 말씀드릴 수 있는 건, 제가 그래도 문학이 좋다는 마음에, 어찌 보면 문학이 참 어렵다고 할 수 있는 시기에, 하하, 대학원에 들어온 것을 말씀드릴 수는 있을 것 같습니다. 마음 속에 있는 어떤 순수한 꿈이 제가 매일을 최선을 다해서, 성실하게 살아갈 수 있게 만들어주는 것 같습니다. 한국문학번역원은 S 교수님의 수업을 들을 때에도 이야기를 많이 들어서 꼭 오고 싶었는데, 인턴 공고가 올라온 것을 보고 정말 꿈만 같다고 생각했고, 어떤 일을 하든 꼭 일해보고 싶다는 마음으로 지원하였습니다. 그래서 지금 여기에 앉아 면접을 보는 것만으로도 영광입니다. 뽑아주시면 책임감과 성실함으로 열심히 일하겠습니다.”
면접 끝나니 진이 다 빠지긴 했지만 할 만큼 했다는 생각이 들어 후회는 들지 않았다. 나를 떨어뜨리면 지들이 손해지. 그렇게 되면 방학동안 편하게 보내면 되는 것이다. (그리고 실제로 떨어졌으나 방학이 편하지는 않았다.)
덧) 면접 복기하면서 혼자 생각하고 빵 터진 것.
- 가짜 광기: 본인을 문학소녀라고 소개함
- 진짜 광기: 문학 욕하면서 국문과 대학원에 들어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