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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십칠도씨 Aug 18. 2022

코로나 낫자마자 떠난 파리 여행(3)

아직은 정들려면 멀었어

2일 차: 개선문, 샹젤리제 거리, 에펠탑, 베르사유 정원, 라데팡스



이번 여행의 목적은 두 가지였다.


화려함과 관련된 모든 걸 가진 파리와는 어울리지 않는 소박한 것들이었다.

첫 번째는 산책.

코로나 시기에 움츠러들었던 다리를 마음껏 움직이게 해주고,

2년 간 권태로워진 서울이 아닌 다른 도시에서 낯선 길을 걸어보고,

커다란 공원에서 마스크를 쓰지 않은 채 바깥공기를 마음껏 마셔보고 싶었다.

잃은 지 오래된 자유가 어떤 느낌이었는지 다시 느껴보고 싶었다.

두 번째는 예술.

도장깨기 하듯 유명한 작품만 대충 보고 오기 싫었다.

동행의 일정에 맞추어 미술관에서 한 시간 만에 나오는 것도 싫었다.

미술관, 박물관, 서점, 화방, 오래된 건물과 골목, 카페, 예술의 향기를 담고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가서 여유롭게 보내다가 오고 싶었다.

그걸로도 완벽한 여행이 될 거란 예감이 들었다.


프랑스 땅을 밟은 순간부터 고생이 끊이지 않는다. 비행기에서 마신 보리차 때문인가, 자꾸 화장실이 가고 싶고 춥기도 해서 한두 시간 간격으로 계속 깼다. 화장실로 가는 복도에서 끼익끼익 하는 소리가 크게 나 눈치가 보였다. 나름 조용히 걷는 게 특기인데 아무리 조심해도 소리가 났다. 이 집만이 아니었다. 벽 너머로 사방에서 누가 움직일 때마다 끼익거렸다. 방음이 하나도 안 되다 보니 이 집에서 나는 건지 다른 집에서 나는 건지 구분이 안 될 정도였다. 층간소음도 아니고 층간 공유에 가까웠다. 겉모습은 멋져도 직접 살려니 불편함이 많다. 3시쯤 일어나서 단짝과 연락하다가 의무감으로 한 시간 정도 눈을 감고 있었다. 찌뿌둥한 몸을 스트레칭하려고 몸을 움직이면 자꾸 전등에 부딪혀서 불편했다. 툭 치자 우수수 떨어지는 먼지에 창문을 열고 싶었지만 안 열리는 창문인 줄 알고 환기도 못 시켰다. 나중에 타원형 손잡이를 돌리면 잠금이 풀리고 한꺼번에 열리는 걸 알아내서 잘 환기시켰다. 유럽풍 건물의 정체성과도 같은 높고 좁은 창문을 어떻게 여닫는지 알게 되어 흥미로웠다. 동시에 한국의 편리한 샷시 베란다가 그립기도 했다.

아침에 출발하기 전 몸을 확인해봤다. 다행히 베드버그나 다른 이상한 벌레에 물린 것 같진 않았다. 호스트와 함께 지내는 숙소의 거의 유일한 장점은 아무리 더러워도 베드버그까지 나올 확률은 낮다는 것이다. 그들도 매일 빈대가 나오는 집에 살 리는 없으니. 코로나에서 완치된 지 이주밖에 안 된 상황인데 냉골에서 잠도 설치자 말 그대로 쓰러질 것 같았다. 믿을 구석은 가져온 홍삼밖에 없었다. 홍삼에 따뜻한 물을 섞어 마시니 그나마 일어설 힘이 생겼다. 고민 끝에 베르사유를 오늘 가기로 했다. 며칠 후 예정된 파리의 교통 파업을 대비해 먼 관광지를 먼저 가놓는 게 나을 것 같았다.

숙소를 나와 역이 있는 거리로 가는 길에 초등학교가 있는지 부모 손을 잡고 아이들이 어디론가로 가고 있었다. 현지인의 삶은 어떨지 궁금해서 군중에 섞여 같이 걸어가 보았다. 철창으로 철저히 보호된 학교에 선생님이 마중 나와 있었다. 아이들에 대한 보호가 철저한 것 같다. 요즘 한국 학교도 예전과 많이 달라진 것으로 안다. 내가 어릴 때만 해도 등하교 도우미라는 개념도 흔치 않았고 등굣길에 친구와 마주치면 같이 걸어가는 게 전부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세상이 험해져서라고 하기엔 그 시절에도 나쁜 사람은 많았는데, 부모님들의 인식이 변한 것인지 사회적인 분위기가 바뀐 것인지 모르겠다.

지하철을 타러 큰 길가로 나가니 출근시간대라 정말 정신없었다. 나도 출근하는 현지인인 척 하면서 처음 가는 길을 익숙한 것처럼 척척 걸어갔다. 이렇게 안 하면 시선을 끌 거고, 유럽에서 동양인이 시선을 끈다면 좋은 일보다는 나쁜 일이 생길 확률이 높은 게 슬픈 현실이었다. 외곽으로 나가기 전 가장 유명한 관광지를 잠시 둘러보고 가기로 했다. 지금까지 파리에서 본 건 무서운 (혹은 나 혼자 무서워한) 사람들과 더러운 대중교통과 어둑한 근교의 골목밖에 없었던 것이다. 조금이라도 이 도시의 매력을 느껴보고 싶었고, 무엇이 전세계 사람들을 열광하게 만드는지 궁금했다. 


첫 번째 목적지는 개선문이었다. 개선문 주변을 둘러싼 Charles de Gaulle – Étoile역은 1호선, 2호선, 6호선 지하철과 RER A 기차까지 지나가는 복잡한 환승역이었다. 뿐만 아니라 도시 전체로 뻗어나가는 방사형 도로의 중앙이기 때문에 열두 갈래의 길이 개선문을 기준으로 나있었다. 버스는 출근을 맞아 찌푸린 얼굴들로 미어터지고 자전거와 자동차와 오토바이가 혼연일체가 되어 정신없이 달리고 있었다. 이상하게 출근시간대의 신도림역이 머릿속에 스쳐 지나갔다. 자전거길이 자동차길처럼 잘 구분되어 있어서 부럽기도 했다. 복잡한 그 사이에서도 개선문은 존재감이 엄청났다. 하지만 왜인지 몰라도 별 감흥이 들지 않았다. 어릴 때 멋모르고 부모님을 따라와서 본 적이 있어서일까. 보는 순간 '우와' 하는 게 있지 않을까 기대했지만 그냥 사진이랑 똑같다는 생각만 들었다. 사진이란 게 여행의 많은 부분을 살리기도 하지만 죽이기도 한다. 옛날 사람들이 사진이라는 매체를 처음 접한 시기에, 사진 찍힌 자는 영혼이 빠져나간다며 두려워했다고 하던데 어느 정도 이해가 간다. 사진은 그 대상의 어떤 진정성을 뺀 상태에서 형태만 그대로 재현하기 때문에 오히려 더욱 왜곡된 이미지가 될 수도 있지 않을까. 교양 수업에서 배웠던 수전 손택의 사진론이 인상 깊어서 사진에 대해 생각할 때마다 떠오른다.

개선문을 다 봤으니 샹젤리제 거리를 걸어볼 차례였다. 길을 잘 찾아서 '길녀(?)'라는 별명도 있는 나이지만 열두 갈래 갈림길에서는 방향 잡기도 어려웠다. 간신히 아침인 점을 이용해 해가 비치는 동쪽으로 가서 샹젤리제 거리를 찾을 수 있었다. 아침의 샹젤리제는 생각보다 조용하면서 어수선했다. 개점 준비를 하는 명품가게들이 여럿 보였다. 한국에서도 압구정만 가면 볼 수 있는 풍경이기에 특별하게 느껴지지는 않았다. 하지만 특유의 건물만큼은 유럽의 정취를 물씬 풍겼다. 6년 전 우연히 보게 된 파리의 야경은 피곤 속에서도 시야를 잡아 끌만큼 아름다웠는데, 그런 아름다움은 비행기 정도로 멀리 떨어져야 가능한 걸까? 아직은 특별히 감동을 느끼지 못해서 아쉽다. 야경을 보면 생각이 달라질지도 모르겠지만 우선은 그렇다.

샹젤리제 거리에서 센강 쪽으로 빠져나오자 에펠탑이 보였다. 아쉽게도 에펠탑마저 개선문과 마찬가지로 감흥이 없었다. 내가 왜 이러지... 여행 둘째 날 밖에 안됐는데 모든 게 권태로운 기분이었다. 오랜만에 온 해외에 움츠러들어서 그런가? 아니면 유럽식 멋진 건물을 이미 경험해봐서? 스물한 살에 황망하게 찾아갔던 동유럽은 두렵고 음울하고 낯설었지만 그만큼 새롭고 아름다웠다. 이제 나도 늙은 걸까? 혹은 모든 것에 무뎌지고 권태로워진 건가? 6년의 세월이 흘렀고 나도 그 사람과 같은 나이가 됐으니... 20대의 6년이란 내면의 세계가 통째로 바뀔 만큼 커다란 시간인 거다. 그래도 에펠탑과 햇빛에 보얗게 뜬 센강을 바라보고 있으니 조금은 파리를 좋아하게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베르사유에 종착하는 RER C선은 어제 공항에서 탄 B선에 비교하면 양반이었다. 탄 사람들도 거주민 아니면 관광객인지 나름 평화로운 분위기였고, 창밖으로는 예쁜 근교 동네가 많이 보였다. 파리는 서쪽이 잘 사는 동네라던데 그래서일까? 다음 날 디즈니랜드를 가러 동쪽으로 A선을 탔을 때는 이만큼 예쁘지 않았던 것 같다. 파리 외곽으로 빠져나가며 스쳐간 공원에는 벌써 분홍 겹벚꽃이 피어 있었다. 창밖 풍경을 멍하니 구경하다 보니 금방 베르사유에 도착했다.

이 동네는 베르사유 궁전이 있다는 점만 빼면 조용한 근교인 것 같았다. 관광객이 넘치는 역을 빠져나오자 고요하게 느껴지기까지 했다. 어렸을 땐 궁전만 가느라 보지 못한 동네 거리가 아기자기했다. 정원만 보러 베르사유 궁전에 올 사람이 있나 싶지만 어릴 때 보았던 화려한 궁이 그리 매력적이지 않았던 기억이라 과감히 내부 구경은 생략하기로 했다. 혼자 다니는 여행의 좋은 점은 보편적이지 않은 여행의 목적을 설정하고 그것을 마음껏 수정하거나 실행할 수 있다는 것이다. 사람들이 잔뜩 줄서있는 내부 입장줄을 지나쳐 정원으로 통하는 아치로 향했다.


처음 보는 베르사유 궁전의 정원은 한마디로 말해 너무 넓었다. 도저히 인간의 발로 다닐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정원이라기엔 하나의 국립공원에 가까웠다. 게다가 저 멀리 보이는 네모난 호수는 눈이 의심될 정도로 길게 뻗어 있었다. 이 궁의 주인도 정원의 끝까지는 가보지 못했을 것이다. 크기에 압도되니 처음부터 기가 죽었다. 우선은 힘닿는 데까지 걸어보기로 했다. 몸과 마음의 피로에 평소보다 걷는 게 더욱 힘들었다. 초봄의 정원은 예쁜 것 같기도 했고 황량한 것 같기도 했다. 누군가와 같이 왔다면, 혹은 힘들지 않은 상황이었다면 좀 나았을지도 모르겠다. 그나마 위로가 되는 건 시내와 달리 거의 관광객과 조깅족들 뿐이었기에 범죄 걱정은 안 해도 됐다는 것이다. 어느 소매치기가 도시만 한 정원을 뚫고 굳이 들어오겠는가. 물론 입구에서부터 보안팀에게 걸러졌겠지만 말이다. 자전거 타는 사람, 보트 타는 사람, 피크닉하는 사람 등 평화로운 분위기였지만 극도의 피곤으로 좋다는 생각이 안 들고 그냥 어디든 누워서 쉬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충전기는 가져왔지만 보조배터리가 없던 탓에 핸드폰도 아껴 썼다. 한국처럼 아무 스타벅스나 들어가면 콘센트가 있는 것도 아니고, 핸드폰을 공공장소에 꺼내고 있기도 무서웠다. 가져온 충전기를 꽂을 수 있던 곳은 거의 숙소밖에 없었다. 눈이 아플 정도로 햇살이 밝고 너무나 넓고 숨은 그늘도 없는 머나먼 타국에서 미아가 된 느낌이었다. 단짝과 잠시 보이스톡으로 이야기하는 시간이 그나마 위로가 되었다. 조금이나마 배터리를 아끼려고 블루투스 이어폰은 연결도 못하고 팔에 감각이 없어질 때까지 핸드폰을 들고 통화했다. 오래 연락하고 싶었지만 배터리 압박에 30분 정도 연락하고 끊었다. 고생은 고생대로 하고 괜히 온 건가 싶었다.


여행이 자유롭던 예전과 지금은 달랐다. 여행에 투자해야 하는 노력과 여행이 야기할 수 있는 위험도 훨씬 커졌다. 기존에 하던 걱정들, 파업이나 날씨나 소매치기 등 외에 전염병까지 추가되었고 사람들의 곱지 않은 시선을 견뎌내야 했다. 그런 대가를 치를 가치가 있었나 하는 회의감이 들었다. 한국에서 단짝과 마음 편히 놀러 다닐 때가 훨씬 행복한 것 같은데. 돈과 시간과 노력을 들여 괜히 온 걸까 하는 생각까지 들었다. 더 이상 못 걷겠어서 풀밭에 비닐을 깔고 앉았다. 축축하고 차가웠다. 햇빛은 진이 빠질 정도로 강렬했고 다리는 부서질 것 같았고 잠을 못 자 눈은 천근만근이었다. 그래도 호기심에 이를 악물고 정원의 웬만한 곳을 거의 구경했다. 카트도 있었고 자전거도 있고 열차도 있었지만 선뜻 돈을 쓰기가 쉽지 않았다. 망설이다가 결국 끝까지 두 다리로 해결했다. 나는 어떨 때는 미련할 정도로 스스로를 고생시킨다. 궁전을 빠져나와 기차역으로 가는 길에 동네를 구경했다. 파리 시내도 그렇지만 여기도 오래된 역사가 있는지 동화 속 풍경 같았다. 골동품 가게도 있고 노천카페와 재래시장 등 유럽 하면 떠오르는 거리가 그대로 있었다. 힘들어서 오래 돌아다니지 못하고 라데팡스로 통하는 U선을 타러 갔다. 당시엔 힘들었지만 글을 쓰는 지금은 좋은 기억으로 떠오른다. 어릴 적에는 화려한 금빛 궁전으로만 기억되었던 곳에서 그때 보지 못한 것을 볼 수 있었기에. 부모님 손에 이끌려  곳을 혼자서 다시 찾아간 것도, 그만한 시간이 흘렀지만 곳은 여전히 그대로이던 것도, 지구 반대편에서 내가 많이 자랐음을 깨달은 것도, 모두 신비하게 느껴진다.


라데팡스에 가까워지자 내릴 준비를 하는 사람들로 기차 안이 분주해졌다. 여긴 목적이 있어서라기보단 숙소로 가는 길목에 있어 호기심에 한번 들러보았다. 기차역과 연결된 쇼핑몰이 있어 구경해보니 미국의 여러 쇼핑몰과 겹쳐 보였다. Claire 같은 브랜드나, 복도 가운데에 고급 초콜릿 샵을 배치해놓은 것이 쏙 빼닮았다. 프랑스의 고고한 자존심도 신도시의 변화까지는 막지 못했나 보다. 세계 어디서나 비슷한 모습을 보여주는 쇼핑몰이, 낯선 장소에서 아는 친구를 만난 것처럼 정감 있게 느껴졌다.

광장으로 나오니 신개선문이 보였다. 개선문, 에펠탑과 마찬가지로 사진과 똑같았다. 오늘 본 파리의 건축물들이 다 감흥이 없어서 이상하다. 무엇보다도 동네의 분위기가 왠지 날서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내가 예민해서 뻥튀기해 느낀 것일 수도 있지만, 안 좋은 일이라도 당할 것 같은 예감에 얼른 떠나고 싶었다. 따뜻한 단백질을 먹고 싶던 참에 파이브가이즈가 보였지만 무서워서 단념하게 될 정도였다. 어서 집에나 가자 싶었다. 한편 여기서 처음으로 Auchan이라는 대형마트를 찾아냈지만 바닥난 체력으로 100m는 돼 보이는 줄을 기다릴 엄두가 나지 않았다. 작은 우유(인지 크림인지…불어를 모르니)라도 사려다가 포기하고 다시 지하철을 탔다.

Les Sablon역에 도착해 숙소로 걸었다. 어젯밤엔 깜깜해서 몰랐지만 편의시설은 별로 없어도 평화로운 동네였다. 성당 앞 작은 길과 푸른 가로수에 햇살이 비쳤고, 늦은 오후를 보내는 동네 주민들과 놀이터에서 노는 아이들이 보였다. 하루 종일 긴장해있던 몸이 약간 풀리는 게 느껴졌다. 하지만 변변찮은 마트가 없어 먹을거리를 살 수가 없었다. 동네 사람들은 뭘 먹고사는 걸까? 결국 빈손으로 숙소에 돌아와 한국에서 가져온 치킨마요 컵반과 미역국으로 저녁을 먹었다. 최근 먹은 것 중에 제일 맛있었다. 겨우 기운을 차려 전망을 구경했다. 침대 바로 옆에 붙은 창에서는 길어지는 해가 건물들을 물들이고 있었다. 잠시의 여유를 즐기다 나도 모르게 잠이 들었다.


2022/03 파리, 프랑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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