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십칠도씨 Aug 20. 2022

일일 알바 후기

스물두 살, 또 다른 어른의 세계를 만나다

2017년 겨울 이야기


    입학 후 벌써 두 번째 휴학이다. 나는 무력감과 자기혐오가 섞인 듯한 기분 나쁜 감정 속에서, 시간을 어떻게든 의미 있게 보내려고 발버둥쳤다. 먼 지방에 사는 친구를 찾아가기도 했고, 생애 처음으로 칵테일을 마셔보았고, 1년 반 동안 제멋대로 자란 머리를 다듬고, 바쁘다는 핑계로 내팽개쳤던 상담도 다시 받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런 일을 한다 해서 부모님을 마주할 때의 죄스러움을 없애줄 수 없었다. 나도 답을 알고 있었다. 휴학생으로서 제일 시간을 떳떳하게 보내는 방법은 알바였다. 최저시급은 노동의 대가로서 너무나 부족하며 내 능력을 살릴 수 있는 알바는 구하기가 불가능에 가깝다는 사실도 별 핑계가 될 수 없었다. 난 다시 알바를 구했다. 구인업체에서 나눠주는 일자리에 매일 다르게 배치되는 일일 알바였다.


    오전 11시였다. 알바를 신청하고 당일까지도 연락이 오지 않아 포기한 상태에서 문자가 왔다. 오늘 역삼역 근처 일식집에서 일할 수 있겠냐는 내용이었다. 원래 시작시간은 11시였지만 12시 30분으로 바꿔서 급박하게 집을 나갔다. 내가 하루 동안 일할 일식집의 이름은 'K'00였다. 이곳은 내가 평생 와본 적 없는 분위기의 식당이었다. 바로 집 앞에 있지만 10년 동안 가보지 못한 고급 일식집이 이곳과 비슷할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사람들은 내가 하루 종일 일해도 벌 수 없는 돈을 한 끼에 쓰고 갔다. 그 돈의 가치를 증명하듯 음식들은 폐기물이 되어 주방에 들어온 상태로도 아름다움을 간직하고 있었다. 가끔은 몸값 비싼 주인공마저도 잔반으로 올라오기도 했다. 이곳에 온 사람들에게 돈의 무게는 그리 무겁지 않아 보였다. 알바생들은 시간당 7000원을 받으며 한 접시에 10만 원짜리 스시를 서빙하고, 치우고, 설거지했다. 

    쉬는 시간에는 엄마랑 전화하면서 강남역 지하상가에 걸어갔다. 어두침침한 지하에서 알지도 못하는 불편한 사람들과 있다가 환한 밖에서 가족의 목소리를 들으니 그렇게 반가울 수 없었다. 돈을 힘들게 버니 도저히 돈을 쓸 엄두가 안 나서 지하상가에서는 허탕을 치고 돌아왔다. 동굴 같은 식당 안에서 쪽잠 자는 직원들이 여기저기 보였다. 나에게 일을 가르친 사람은 이곳에서 일을 깨나 오래한 듯했다. 여자인데도 내가 군대에 온 것처럼 느끼게 한 사람이었다. (당시 사귀던 친구가 군대에 있으면서 미운 선임의 이야기를 해줬는데 그와 똑 닮아있어 이런 생각을 했다.) 하기 싫은 일은 모른척하고 미루다가 아랫사람에게 넘기고 쉬운 일만 골라서 한다든가, 처음 보는 사람에게 인신공격을 하고 반말을 쓴다든가, 자신이 주인인 것처럼 유세를 떤다든가. 내 코를 보면서 "수술 잘 됐네. 어디서 했어?"라고 묻는 사람은 처음이었다. 아버지의 코를 그대로 빼닮은 것일 뿐이지만 굳이 그걸 말해서 증명할 필요는 느끼지 못했다. 어차피 오늘만 일하는 거니까 참았다. 언젠가 취업할 회사의 상사가 저런 사람이 아니길 기도했다.

    주문을 돕는 일은 메뉴를 잘 알아야 하기 때문에 처음 온 나는 설거지부터 했다. 집에서 하던 식으로 하다가 혼나고 식기세척기 쓰는 법을 배웠다. 어떻게 하라고 가르쳐주지도 않고 어떤 일을 하기만 하면 뭐라고 면박을 줘서 계속 긴장하느라 온몸이 쑤셨다. 차라리 무거운 그릇을 들고 나르는 일이나, 더럽더라도 눈치 볼 필요는 없는 설거지 일이 제일 좋았다. 나도 그들과 동등한 성인인데 ‘00 씨’라는 호칭 대신 ‘거기’, ‘애기야’ 하는 호칭이 불쾌했다. 아무리 내가 같은 학교 학생들에게 실망한 일이 많아도 이들보다는 훨씬 더 점잖고 기본적 예의를 지키는 집단이라는 것을 뼈저리게 느꼈다. 다음날도 알바가 기다리고 있어서 일을 끝내고 나온 뒤에도 그리 기쁘지 않았다. 오늘 알바를 하며 바친 시간과 신체적, 정신적 노동의 값은 과연 6만 원으로 충분한가? 난 아니라고 생각했다.


    다음날은 어제 일한 곳 근처의 ‘J’00라는 일식집이었다. 그날은 12월 초순 치고는 매우 추웠다. 바람을 맞는 대로 휘날리는 가디건을 부여잡고 술집이 많은 골목을 헤매다 식당으로 나있는 계단을 찾았다. 지하를 향한 가파른 계단을 내려갔다. 유리문이 차가운 공기와 만나 하얗게 변한 수증기로 가득 차 속을 볼 수 없었다. 문을 열고 들어가니 약간 시큼한 듯한 쯔유의 냄새가 훅 끼쳐오고, 흰 모자를 쓴 채 분주히 움직이는 여댓명의 사람이 보였다. 그중에서 매니저로 보이는 안경 쓴 여자가 나를 보더니 미리 온 아가씨랑 같이 청소를 하라고 했다. 30평 남짓한 어둡고 쿰쿰한 공간, 내가 예상한 햇빛이 들어오는 환한 분위기의 식당은 아니었다. 

    나와 비슷한 나이대로 생각했던 "미리 온 아가씨"(매니저의 표현이다)는 놀랍게도 세 살 위의 언니였다. 어떤 이유로 저렇게까지 열심이고 적극적인지 궁금했는데, 나중에 들은 말로는 대학병원에서 일하는 건 더 힘들다고 했다. 간호사로 치열하게 일하던 관성이 남아 있어 그런가 보다. 여기서의 일은 어제 간 식당과 기본적으로는 비슷했지만, 시스템도 메뉴도 달라서 여전히 난 어리바리한 초보였다. 그래도 같이 일일 알바를 뛰는 언니가 있어 많이 의지가 되었다. 본부장은 계속 나를 따로 불러서 방 한 칸만 한 테이블을 몇 개 옮겼다. 근육통이 며칠을 더 갔다. 저녁밥은 메뉴를 만들고 남은 여러 가지 재료를 섞어 만든 것이었다. 개밥 비주얼이었지만 하루 종일 먹은 음식 중에 제일 맛있었다. 아르바이트라는 건 맛없는 밥을 눈치 보며 먹으면서 손님들에겐 그 찌꺼기조차 맛있는 요리를 서빙하는 거라고 생각하니 조금 슬펐다.

    다음날도 같은 ‘J’00로 출근했다. 둘째 날은 첫째 날보다도 녹록지 않았다. 오픈 전에 청소를 시작하자마자 구박이 시작됐다. 빗자루질이야 그럭저럭 넘어갔는데 대걸레가 문제였다. 매니저가 화를 내며 지적하길, 내가 하는 식으로 하면 발자국이 남는다고 뒷걸음질 치면서 하라고 했다. 그대로 따라 하던 중 다시 나한테 와서 그렇게 하는 게 아니라며 이러면 안 하는 거나 다름없다고 저기 가서 다른 일이나 하라고 했다. 어떤 식으로 잘못했는지 알려주기라도 하면 고칠 텐데. 억울하기도 했고 스스로가 답답했다. 이때부터 힘겨운 하루를 예감했지만 울어서 좋을 건 없으니 그냥 죄송하다고 웃었다.

    구박은 계속됐다. 식사하라고 해서 가니 국이 담겨있는 그릇 하나만 있길래 이거를 먹으라는 줄 알고 가져가서 먹었다. 그걸 본 매니저가 이사님 걸 퍼놓은 건데 그걸 네가 먹은 거라며, 알고 먹으라고 했다. 알고 먹으라고 하면, 이미 먹은 걸 다시 뱉어내기라도 하라는 건가. 내 잘못이라면 잘못이겠지. 서러워서 몇 술 뜨지도 못하고 곧 오픈해야 해서 거의 버렸다. 그날따라 점심 손님들이 많았다. 정말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마음만 급해서 주문을 받아가기만 하고 기억을 못 해내서 다시 간 적도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때마다 매니저는 인상을 쓰고 한숨을 쉬었다. 학생으로서의 나는 항상 잘 해냈었고 그에 익숙해져 있었는데 알바생으로서의 나는 실수를 많이 하고 모르는 것도 많아서 스스로가 낯설었다. 모르는 걸 질문하면 기뻐하시던 고등학교 선생님이 그 순간 정말 보고 싶었다. 친구가 이등병 때 열심히는 했지만 잘 안 돼서 폐급 취급당했다고 하던데 내가 딱 그랬다. 폐급 취급이라는 게 생각보다 더 비참했다. 있는 취급도 안 하고 방해 안되게 비켜나 있으라는 분위기에 쥐구멍에라도 들어가고 싶었다.

    브레이크 타임에는 몰래 편지를 썼다. 낫토 냄새인지 발냄새인지가 나는 컴컴한 창고에서 울면서 편지를 쓰고 있으니 더 처량한 느낌이 들었다. 내가 좋아하고 나를 좋아해 주는 사람이 많이 보고 싶었다. 그저 편지를 쓰는 건데도 눈물이 뚝뚝 났고 오늘 처음으로 웃음이 나기도 했다. 그냥 돈은 안 받고 도망가버릴까, 그러면 블랙리스트에 올라서 알바도 못하게 되겠지 하는 실없는 생각을 하다가 결국 4시 반이 왔다. 디너 준비시간이었다.

    중간중간 메뉴를 열심히 익혀놔서 런치 때보다는 나았다. 손님이 들어오기 전에는 요리사 아저씨가 가자미 손질하는 것도 구경했다. 본부장이 옆에서 얻어먹으려고 구경하냐고 농담했다. 다른 종업원들과 처음으로 웃어보았다. 하지만 이미 일을 못한다고 낙인찍힌 뒤라 주문 일은 거의 받지 못했다. 다 내 업보다. 내가 바보같이 일을 못했으니 당연한 거다… 이렇게 끝도 없이 우울의 늪으로 빠졌다. 하던 일 중에는 유리제품 설거지도 있었는데 찬물밖에 안 나왔다. 미끌거려서 맨손으로 하고 있으니 손이 부르트는 소리가 들릴 지경이었다. 버티고 버티다 마지막에 고무장갑을 끼고 설거지를 했더니 기다렸다는 듯이 컵을 깨 먹었다. 그러고 나서는 다시 맨손으로 했다. 나베 그릇은 너무 뜨거웠고 설거지 물은 너무 차가웠다. 중간은 없었다. 정신없이 일을 하고 있으니 시계는 9시를 지나고 있었다. 피로와 서러움과 비참함이 쉴 새 없이 나를 몰아붙였다. 

    누군가는 즐겁게 회식을 하면서 쌓아놓은 유리컵이 나에겐 위험하고 무거운 짐이 되었다. 카트로 옮기다가 뒤에 사람이 급하게 미는 바람에 발목 뒤쪽이 까였다. 별거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갑자기 벌건 피가 줄줄 나와서 충격이었다. 아픔보다는 서러움에 눈물이 피와 함께 쏟아졌다. 나한테 유일하게 잘해주던 요리사 아저씨가 많이 아프냐며 날 앉히고 과산화수소를 콸콸 쏟았다. 은색 대야에 피 섞인 사이다 같은 액체가 쏟아졌다. 눈물을 닦으려 화장실에 갔는데 혼자 있게 되니 엉엉하고 큰 소리로 울음이 나왔다. 그렇게 울고 있는데 여자 손님이 들어가도 괜찮냐고 하고 들어왔다. (지금 생각해보면 알바생이 손님도 쓰는 화장실에서 약간 진상을 부린 것 같다...) 변기 칸에 들어가서도 계속 정말 괜찮은 거 맞냐고 물어봤다. 나오더니 손을 씻으며 말을 걸었다.

"언제부터 일 시작했어요?" 

"이틀째예요." 

"많이 힘들겠네… 그래도 의미 없는 시간은 없을 거예요. 혹시 몇 살이에요?" 

"스물둘이요." 

"부럽다. 힘내요. 나랑 있던 일은 비밀이에요!" 

지금까지도 알지 못했고 앞으로도 만날 일 없을 타인에게 따뜻한 위로를 받는 기분은 무척이나 묘했다. 세상엔 참 다양한 사람이 있었다. 원망스러운 사람도, 고마운 사람도. 나를 스쳐가는 사람들 중에는 그저 지나치거나 간단한 말 몇 마디만 나눌 이도 있을 것이고, 개중 몇몇과는 깊은 대화를 하고 친해질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후자는 나를 변화시키며 종래에는 내 인생의 방향까지 바꿔놓을 수도 있겠지. 사람이 사람을 만난다는 것은 정말 놀라운 일이라고 생각했다.


    뭐라도 해야겠다는 단순한 마음으로 시작한 알바는 뒤꿈치에 이주도 넘게 간 상처를 남겼지만, 남은 게  상처만은 아니었다. 책과 수업과 뉴스만으로는 알 수 없는 많은 것들이 세상에 있었다. 살짝 발만 담갔지만 어찌 되었든 처음으로 경험한 ‘어른’의 세계는 참 비정했으며, 내 학벌이 그저 자랑스러운 훈장 이상의 일을 할 수 있을 것이란 것도 느꼈다. 그럼에도 동시에 알바도 제대로 못하는 내가 나중에 취업은 하고 내 역할은 제대로 하고 사는지 하는 불안감도 들었다. 나는 나중에 어떤 사람이 될까. 아직은 아무것도 알 수가 없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겨울이 봄으로 흐르는 것처럼, 어른이라는 것은 경계선의 건너편에 있는 게 아니라 아이 같고 서툴고 순진한 나의 지금 모습과 많이 다르지 않을 것이라는 예감뿐이다. 

작가의 이전글 코로나 낫자마자 떠난 파리 여행(3)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