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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십칠도씨 Aug 22. 2022

<엑시트(2019)>

익숙하고도 새로운 세계 안에서 그려지는 좌절과 극복의 서사

육체성과 물질성

    영화 <엑시트>의 오프닝 시퀀스는 주인공 용남의 등과 손, 팔 등의 근육과 힘줄이 동작에 따라 움직이는 모습을 클로즈업하며 시작한다. 카메라의 시선은 차차 멀어져 철봉을 하는 전신을 담는다. 배우의 몸과 얼굴에 집중하는 이미지는 이후에도 종종 등장한다. 카메라는 공포에 가득 찬 배우의 표정이나 흘러내리는 땀, 힘을 꽉 줘 부들부들 떨리는 손, 죽도록 달리는 두 주인공의 전신, 쉼 없이 움직이는 팔과 다리 등의 이미지를 집중적으로 찍는다. 서사의 클라이맥스에 달하는 후반부의 옥상 위 달리기 씬에서도 주가 되는 것은 두 사람의 달리는 모습이다. 이들의 육체성은, ‘구름정원’에서 극대화되는 물질적이고 관념적인 가치에 대응하는 성질로 의미화된다. 이처럼 엑시트의 서사를 이끄는 힘은 양극단의 가치를 표방하는 이미지의 대조에서 나온다. 고층건물과 저층 건물, 사회적 지위의 높고 낮음, 욕망하는 이상과 현실의 삶, 실패와 극복, 개인의 성취를 통한 계급의 전복까지 양극단의 이미지들이 대조되며 의미화된다.


키치의 공간 속 갑과 을

    서사가 본격적으로 전개되는 구름정원은 돌잔치나 결혼식, 고희연 등의 행사를 위해 공간을 빌려주는 전형적인 컨벤션장이다. 이곳의 뾰족한 첨탑과 사자상 등이 보여주는 이미지는 키치적이다. 일상에서 많이 볼 수 있는 결혼식장이나 모텔에서 키치를 발견할 수 있다. 이들의 외관은 서양 건축양식을 혼합하고 차용한 정체불명의 형태를 띤다. 겉으로 보기에는 고상한 (혹은 그렇게 보이려고 노력하는) 공간은 서구에서 불어온 근대의 바람에 대한 한국인의 동경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혹은 그 공간 안에서만큼은 왕족이나 귀족같이 대접받고 싶은 서민의 욕망이 반영되었다고도 할 수 있다. 하지만 그 안에서 보이는 풍경은 못 온 사람을 대신해 돈 봉투를 찔러 넣고, 요란하게 트로트를 부르고, 소주는 배낭에 남은 음식은 비닐봉지에 싸가는 지극히 서민적이고 현실적인 행동들이다.

    “키치는 두 가지 감동의 눈물을 흘러내리게 한다. 첫 번째 눈물이 말한다. 잔디밭 위를 달리는 아이들의 모습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두 번째 눈물이 말한다. 잔디밭 위를 달리는 아이들의 모습에 전 인류와 함께 감동한다는 것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이 두 번째 눈물만이 키치를 키치로 만든다. 모든 인간의 우애는 키치를 바탕으로 해서만 성립될 수 있을 것이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中》

    즉, 키치란 예술 자체에 감동하기보다는 고급 예술을 향유하는 자신의 모습에 감동하는 것이고, 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 본질에서 벗어나 피상적 형태에 집중하는 것이다. 자생적으로 민주주의와 자본주의를 발생시킨 것이 아니라 외부에서 급격하게 ‘주입받은’ 근대를 키워와 건강하게 키워낼 수 없었던 한국 사회는 ‘구름정원’이라는 가짜 성을 만들어낸다. 그건 천민자본주의의 다른 이름이라고도 볼 수 있을 것이다. 높은 곳까지 올라왔어도 구름은 견고하고 진실된 성이 아니다. 그 안에는 자본주의와 현대사회의 병폐가 집약되어있다. 부와 자본의 본질에는 접근하지 못한 채, 피상적인 화려함과 풍요로움만 즐기려 한다. 이 공간에서는 가진 자와 못 가진 자 사이의 간극이 극명하게 벌어진다. 어머니의 칠순잔치를 하는 날 백수인 용남은 이 기회를 놓칠 수 없다는 듯이 육회를 쌓아놓고 먹지만 취직에 성공한 사촌은 김밥만 가져와 먹는다. 돈도 많아서 조카들에게 5만 원짜리를 턱턱 주기도 한다. 이는 앞선 시퀀스에서 누나가 준 돈을 구겨서 집어던지고서는 누나가 나가고 구겨진 만 원짜리를 다시 집어드는 용만의 모습과 겹치면서 용만의 비참한 상황을 부각한다. 의주도 용만과 마찬가지로 못 가진 자에 속한다. 의주를 괴롭히는 지점장은 자신의 부와 지위를 이용해서 직원들에게 마음껏 성질을 내고 의주가 원치 않는데도 ‘자기’라고 부르며 억지로 이성적 관계를 만들려 한다.

    그래서, 구름정원에서의 용남과 의주에게는 가시적 얼굴과 비가시적 얼굴이 공존한다. 웃고 있어도 열등감이 남아있는 용남의 얼굴과 싫은 상사 앞에서 내색해서는 안 되는 의주의 얼굴을 읽어낼 수 있다. 재난 이후로 그들의 얼굴은, 두려움 혹은 환희로만 가득 찬 하나의 얼굴로 변화한다. 건물의 꼭대기까지 올라가 “완등!”, “루트 확보!” 등을 외치는 장면에서는 재난 상황이지만 둘이 즐거운 게임을 하는 중인 것처럼 느껴지기까지 한다. 얼굴은 자아다. 이들이 즐거웠던 이유는 자신의 능력이 유효하게 자신을 구하고 있기 때문이다. 취업에 도움 안 되던 암벽등반 기술이 이제 생존을 위한 도구로 쓰이고 있는 것이다. 뜻하지 않게 찾아온 재난이지만, 이 재난은 각기 다른 상황에서 좌절을 겪고 있던 두 청년이 자아를 실현하게 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특수한 상황에서야 겨우 적성을 살릴 길을 찾은 주인공들의 모습은 실제로는 청년들이 자아실현을 할 기회가 없다는 사실을 반증한다. 가스 테러는 앞이 보이지 않는 청년들의 상황을 암시하지만, 비가 내리며 싱겁게 종료되는 재난과 달리 현실의 재난은 현재에도 견고히 존속하고 있다. 


새로운 시각으로 전시되는 일상적 스펙터클

    재난이 시작되는 곳인 구름정원으로 가기 전부터 영화는 친숙한 이미지를 쌓아올리며 관객의 이입을 유도한다. 매번 비슷비슷한 내용으로 반복되는 건강 관련 TV 프로그램, 리모컨을 차지하려는 싸움, 손풍기로 더위를 식히는 사람들, 한복을 입고 서양식 행사장에서 하는 칠순잔치 등을 보며 관객은 익숙한 풍경을 스크린이라는 매체로 전달받는 즐거움과 충격을 느낀다. 시각적 스펙터클은 낯설고 기이한 대상을 바라볼 때 발생한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익숙한 대상을 새로운 시각으로 보여주는 것은 관객에게 더욱 강렬한 시각적 쾌락을 줄 수 있다. 영화는 재난이 시작한 이후에도 한국적이며 일상적인 모습을 통해 색다른 미학을 만들어낸다. 재난 상황에도 ‘인증샷’을 찍고 SNS로 공유하는 젊은이들, 핸드폰 플래시로 보내는 모스 신호, 같은 해병대 출신이라는 것을 알게 된 후 위험한 재난지역까지 운전을 해주는 택시, PC방에서 게임을 하고 인터넷 방송을 시청하는 시민들의 이미지를 보며 관객은 가깝고도 친숙한 풍경이 스크린 속에서 재현된다는 것에 충격을 받는다. 보는 즐거움과 동시에 보이는 즐거움을 느끼는 것이다.

    용남과 의주가 탈출하면서 지나치는 네온사인 간판과 상업시설 또한 익숙해서 더욱 새로운 풍경을 보여준다. PC방, 체육관, 미술학원, DVD방, 대게요리 전문점 등의 네온사인 간판은 등반을 위한 발받침과 손잡이, 배경이 되어준다. 혹은 텍스트의 의미를 직접적으로 전달하기도 한다. 옥상에 올라선 용남과 의주의 발아래에는 방탈출카페의 간판이 있다. 오락으로 즐기는 방탈출과 생존을 건 탈출의 이미지가 대조적이다. 고깃집 바로 위에 있는 헬스장도 흥미로운 방식으로 의미화된다. 헬스장과 고깃집의 대비는 미래의 행복을 위해 현재의 행복을 포기해야 하는 청년의 현실을 대변한다. 헬스장에 있는 “창문 닫아주세요. 고기 냄새 올라옵니다.”라는 안내문이나, “난 준비됐어, 올라와봐.”라는 홍보물에 카메라의 초점을 맞추는 미장센의 의도는, 지금은 즐거움을 포기하며 고통스럽게 운동을 하지만 언젠가 원하는 곳으로 올라갈 수 있을 것이라고 용남과 의주에게, 그리고 관객에게 응원의 메시지를 보내는 것이다. "이사 혼수 Big Sale"이라고 적힌 간판 앞에서 매트리스를 내던지는 용남과 의주는 생존을 위해 결혼까지 포기하는 N포 세대의 모습과 겹친다. 혼수로 쓰이는 침구이지만 재난과도 같은 현실에서는 그저 딛고 달려갈 발판일 뿐이다. 인력사무소로 올라가는 길에 마주치는 “청년을 살려야 나라가 산다”는 현수막의 외침은 그래서 입바른 말이지만 공허하다. 영화 속 현실과 실제의 한국사회 모두에서 청년들은 '나라를 살릴' 주역보다는 하루하루 버티며 자신을 소모해가는 존재에 가깝다. 포기하는 것이 점점 늘어난다는 사실에도 무감각해진 채 생존을 위해 더 높은 곳으로 달리는 청춘의 삶은 재난 속의 용남과 의주와 다를 바가 없다.


공간성: 높은 곳과 낮은 곳

    <엑시트>에서 서사의 중심이 되는 재난은 아래로부터 시작해 위로 올라가는 가스이다. 재난의 성격으로 인해 영화의 서사와 이미지에서 공간성이 강조된다. 낮은 곳은 가스가 차는 곳, 재난이 제일 먼저 닥치는 곳이고 높은 곳은 재난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는 곳이다. 흔한 비유지만 높은 곳과 낮은 곳의 대비는 사회적 성공과 비성공으로도 연결된다. 땅에서 철봉을 하던 백수에 동네 바보 용만은 원래도 낮은 곳에 있었고, 취업을 해서 ‘구름정원’으로 올라간 줄 알았던 미주도 건물주의 갑질과 성희롱에 괴로워하는 비정규직일 뿐이었다. 영화 전반에서 차근차근 쌓아올린 친숙한 한국적 이미지 덕분에 이들의 비극은 관객의 것으로 동일시된다. 

영화는 지속적으로 도시의 원경과 근경을 대조해 보여준다. 멀리서는 화려하고 높은 도심의 모습만이 부각된다. 그러나 용남과 미주가 달리는 곳은 멀리서 보이지 않는 저층 건물이다. 도심이 아니라 삶의 공간이고, 보다 관객이 가깝게 느끼는 공간이다. 원경은 드론이나 비행기 등의 인공 장비가 아니면 볼 수 없는 풍경인데 반해, 근경은 자연스러운 인간의 시각장과 비슷하다. 우리에게 물리적으로나, 일상적으로나 가까운 공간인 것이다. 욕망하는 이상은 높고 화려한 건물이지만 현실의 삶은 온갖 네온사인이 어지럽게 번쩍이는 저층 건물이다. 우리의 삶과 가까운 후자의 공간에서 재난이 시작된다. 생존의 원리는 간단하다. 바닥에서부터 점점 올라오는 치명적인 가스를 피해 더 높은 곳으로 올라가는 것이다. 

    위로 올라가는 탈출은 다른 형식의 탈출보다 더 절박한 느낌을 준다. 상승은 자연적으로 벗어날 수 없는 중력에의 반항이며 상위 계층으로 올라가기 위한 사회에서의 투쟁을 연상시키기 때문일 것이다. 살아 나가면 높은 건물에 있는 대기업에만 원서를 내겠다는 용만의 말은 그래서 의미심장하다. 영화 속 재난에서는 그저 물리적으로 높은 건물에 올라가고 싶은 것이지만 상징적으로도 높은 곳에 올라가고 싶은 것이다. 현실에서도 대기업에 다녀야만 살아남을 수 있다. 카메라의 앵글도 이러한 공간성을 의미화하는 데에 이용된다. 계단 위에서 차오르는 가스를 내려다보는 이미지 반복한다. 위로 올라오기까지 얼마나 힘이 드는지, 그럼에도 재난은 끊임없이 숨을 조여오는지를 이미지를 통해 전달한다. 대조적으로 건물을 클라이밍하는 주인공을 위에서 바라보는 시점도 자주 등장하는데, 이 시점에서 관객은 마치 용남과 의주가 자신을 바라보는 듯한 착각을 받게 된다. 즉, 영화 속 인물의 아래에는 계단이 있고, 인물이 올려다보는 위에는 영화를 보는 관객들이 위치한다. 이 계층적 이미지가 관객에게 자신이 어디에 서 있는지 되물어보게 한다. 마치 위에 있는 기분이 들지만 사실 자신도 아래에 있다는 걸 깨닫게 되는 것이다.


반복되는 좌절과 극복

    <엑시트>의 서사와 이미지에서 가장 중요한 상징물은 구름정원이다. 구름정원은 용남이 가장 초라해 보이면서 동시에 과거의 트라우마를 극복하는 공간이다. 대학에서 암벽등반 동아리 활동을 하던 시기, 용남은 동아리의 에이스이면서도 마지막 한 발을 딛지 못해 떨어졌던 기억이 있다. 이후로도 용남은 구직활동을 하면서 끊임없이 떨어진다. ‘완등’의 기억은 멀어지고, 열등감과 트라우마만이 남는다. 용남의 방에는 각종 공인시험 문제집이 꽂혀있고 채용 박람회 포스터가 벽에 덕지덕지 붙어있다. 그러나 등반 용품은 버리지 못한 채 방 한구석에 숨겨놓고 있다. 취업이라는 현실적인 문제에 목매여 있으면서도 좋아하던 꿈을 포기하지 못한 것이다. 취업에 성공해 언뜻 어느 정도의 지위를 확보한 듯한 의주의 사정도 마찬가지이다. 부점장이라는 보기 좋은 허울 안에는 비정규직이나 다름없는 불안한 지위와 상사의 갑질이라는 이중고가 존재한다. 그런 의주도 마음속에 대학 시절의 꿈을 품고 있다. 용남이 처음 등반을 시도하기 전 의주가 던지는 카라비너와 분필은 힘겨운 상황 속에서도 버리지 못한 꿈을 상징한다. 의주로부터 전해진 ‘꿈’은 용남이 과거의 트라우마를 극복해내고 마지막 한 발짝을 성공적으로 내딛도록 도와준다. 이 성공은 용남과 의주의 최종 구조를 암시한다.

    영화의 주제를 강화하는 방식은 크고 작게 반복되는 좌절의 시퀀스이다. 재난이 시작되기 전, 본격적인 고난 전에도 용남의 일상은 좌절 투성이다. 입사 불합격 통지 문자를 받고, 오랜만에 짝사랑하던 의주를 보러 가서 양복도 미리 준비하고 아침에 가르마도 열심히 탔는데 엄마가 망쳐버린다. 재난이 시작한 이후엔, 옥상 위로 탈출하려는데 옥상 문이 잠겨있고, 무게 초과로 헬기에 타지 못한다. 다시 구조 요청을 하지만 학원에 남아있는 아이들에게 양보하느라 헬기를 타지 못한다. 마지막 목표였던 타워크레인이 있는 건물 앞에서 생각보다 거리가 너무 멀어 좌절한다. <엑시트>에서의 반복되는 좌절의 시퀀스는 그러나 인물을 나락에 빠뜨리기보다는, 좌절된 목표가 꼭 달성되어야만 한다는 당위성을 불어넣는다. 이는 서사 내적으로만 작용하는 게 아니라 언향적으로도 작용해 영화를 보는 관객의 현실에서도 좌절을 딛고 원하는 목표를 이뤄내어야 한다고 느끼게 한다. 


인간적인 영웅과 자극적이지 않은 재난

    <엑시트>의 이미지들이 할리우드식 재난 영화의 클리셰와 가장 다른 점은 관객이 그저 바라만 보는 자가 아니라 화면 속에서 보이는 자들과 동일시되도록 의미화된다는 것이다. 이는 영화의 현실적인 배경에 기인한다. 재난이 시작하기 전 도입 부분에서는 우리가 살고 있는 한국사회와 닮은 모습들을 조금씩 쌓아올리며 그들의 삶이 우리의 삶과 같지 않냐는 착각이 들게 만든다. 이 동질감은 주인공들이 재난을 헤쳐 나가는 모습에 우리를 덧씌우는 효과를 낳는다. 재난 영화란 타인의 불행과 고통을 중계한다는 비난을 피할 수는 없으나 다른 이의 불행이 그저 스펙터클로 느껴지지만은 않는 것은 주인공과 우리가 같은 상황에 처해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관객이 아니라 ‘의주와 용남’이라는 인식을 가지게 된다. 보는 것과 보이는 것이 동일화되어, 보는 권력을 가진 관객으로의 불편함이 느껴지지 않는다. 또 다른 요소는 재난의 거리감이다. 죽는 사람이 직접적으로 나오지 않는다. 대신, 피해자들은 용남과 의주가 폐허가 된 길을 달리는 도중 떨어져 있는 핸드폰에서 끊임없이 들려오는 각양각색의 벨소리로 대체된다. 재난 영화를 볼 때는 CG로 만들어낸 재난 상황이 얼마나 ‘화려하고’ 실제적인가가 영화의 평가 요소 중 하나가 되고, 관객은 그 장면이 주는 시각적 쾌락을 기대한다. 그러나 <엑시트>의 재난은 스펙터클을 위한 수단보다는 현실적 삶을 은유하는 상징일 뿐이다. 자극적인 피해 상황은 ‘불필요하게 타인의 비극을 소비하는 것을 지양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배제’된다. (<씨네 21> 이상근 감독 인터뷰 참조)

    용남과 의주는 비범한 능력을 발휘하고 대의를 위해서라면 기꺼이 자신을 희생하는 멋있는 영웅이 아니다. 암벽등반 동아리를 했고 용남의 경우는 철봉을 해 근력이 좋다는 것 외에는 특출난 점도 없는, 오히려 무시당하는 ‘을’의 위치에 있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누구보다 간절하게 살고 싶어 하지만 동시에 적당히 선하고, 인간적인 갈등을 겪으며 타인을 위해 희생한다. 헬기에 타지 못해 바닥을 구르며 속상해하다가도 다시 찾아온 구조의 기회를 아이들에게 양보하기도 한다. 쓰레기봉투와 테이프를 칭칭 감고서 달리는 둘의 모습도 전형적인 영웅의 모습과는 거리가 멀다. 쓰레기가 가득한 옥상을 달려가는 모습도 멋있거나 비현실적이지 않다. 오히려 ‘찌질하고’ 친숙한 모습이다. 

    영화의 후반부로 갈수록 화면 분할 장면이 많아지는데, 시민들의 연대를 보여주기 위한 기법으로 보인다. 대단하지 않은 영웅에 이어, 대단하지 않은 구원자들이다. 전통적 매체인 TV가 아닌 영상통화, BJ의 개인방송, 인터넷 방송, 트위터 등 다양한 매체를 통해 재난 상황을 접하는 시민들은 현실감을 불어넣는다. 멀리 떨어진 시민들이 용남과 의주를 돕는 방법은 불법으로 띄운 드론을 보내 바람을 만들어서 가스를 건물 위로 올라오지 못하게 막아주거나, 건너편 건물로 줄을 매달아 주는 것이다. 할리우드 영화에서 등장하는 초능력이나 거대하고 값비싼 수단, 하다못해 헬리콥터도 아니다. 평범한 사람들도 이용할 수 있는 드론이 용남과 의주의 탈출을 중계하고 지원하는 것이다. 이렇듯, 영화의 공간적 배경에 더해 탈출과 구조의 서사에 있어 일관적인 평범함은 영화를 보는 평범한 관객들에게 동질감을 준다.


높은 것과 낮은 것의 전복

    시작과 끝에서 상반되는 상황도 서사의 대비를 강조하는 데에 일조한다. “하지 마. 뭐든지 하지 말라고!”라고 외치며 용남을 주눅 들게 하던 아버지는 구조되어 돌아온 용남에게 고맙다고 인사한다. 구름정원에서는 사위한테도 밀려서 엄마를 못 업던 용남은 끝내 엄마를 업는다. 의주는 다시 나타나서도 여전히 ‘자기’라고 부르는 점장의 뺨을 때리고 구름정원 이름표를 집어던진다. 누나는 자신이 무시하던 동생 덕분에 목숨을 구하고, 오프닝에서 철봉 운동하는 용남이를 부끄러워하던 조카가 제일 먼저 달려가는 수미상관의 구조이다. 높았던 자는 낮아지고, 낮았던 자는 높아지면서 후자에 심리적으로 동일시되던 관객은 통쾌함을 느낀다. 동시에 자신도 용남과 의주처럼 높은 곳으로 올라갈 수 있을 것이라고 용기를 얻는다. 


결론

    <엑시트>는 가장 익숙한 공간과 인물을 이용하여 실체가 모호한 재난에 위기감을 불어넣는 독특한 미학에 따라 전개된다. 친숙함에서 나오는 시각적 스펙터클은 재난이 곧 한국사회의 위기이고 청년의 위기임을 은유한다. 허구적인 재난이 현실 속 한국사회라는 보편성과 만나, 문제적 현실을 인식하고 바꾸어야 한다는 당위성을 자각토록 만든 것이다. 한편 양극단에서 길항하는 대조적인 이미지들은 영화의 주제를 강조하며 서사를 진행시키다가 결말에서 상하관계가 전복된다. 이를 통해 관객은 현실 속에서도 ‘재난’이 극복되고 바닥에서 꼭대기로 상승하기를 꿈꾸게 된다.

   


*이미지 출처: CJ ENM, 다음영화


2019/12/21 작성. 영상문학론 영화 분석 보고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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