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한 우울증을 앓는 사람들이 보이는 증상 중 하나가 저장강박이라고 한다.
쓰레기장을 방불케 하는 그들의 방은 우울증 환자가 정리를 안 한다는 인식을 주기에 충분하다.
그런데 나는 이상하게 죽고 싶은 날일수록 병적으로 정리를 한다.
죽고 나서 나의 흔적을 발견할 사람들에게마저 잘 보이고 싶은 강박일지도 모르겠으나, 오롯이 자기만족에 더 가깝다. 나라는 사람을 보여주는 모든 것들을 체계적으로 남기고 싶은 욕심. 내 존재를 증명하고 설명할 것들이 그것밖에 없으므로.
어떨 때는 그동안의 일기와 보고서와 여행기를 연도별로 정리하고, 어떨 때는 책꽂이의 책을 장르별, 국가별로 재구성한다든가 자질구레한 물건들 위에 쌓인 먼지를 하나하나 닦기도 한다.
그래서 내 방은 늘 깨끗하다.
코로나로 한참 더 집에 있던 시기에는 이런 일기를 썼다.
"청소: 코스모스에서 카오스로 나아가려는 우주적 흐름에 역행하려고 발버둥 치는 행위"
아무것도 내 뜻대로 되는 일 없는 인생에서 유일하게 내가 통제력을 행사할 수 있는 대상이 내 방밖에 없어서였던 것 같다. 그 대상을 내 몸으로 삼았던 10대에는 거식증에 걸렸다가 죽음 바로 앞에서 가까스로 돌아왔다. 카오스가 되어가는 내 삶을 코스모스로 되돌릴 수 있다는 부질없는 희망. 약간의 결벽증은 심한 거식증보다 낫지만 내 삶을 근본적으로 바꿀 수 없다는 건 마찬가지다.
좀 괜찮나 싶으면 죽고 싶은 날은 오랜 친구처럼 찾아온다. 그나마 요즘은 심하던 때보다는 뜸해졌다.
퇴사를 한 이후로 오랜만에 느껴보는 감정이다. 사실은 그동안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도록 열심히 틀어막은 것에 가깝다. 이런 기분이 찾아올 것 같으면, 대학원에서 승승장구하는 행복한 미래를 상상하거나 무한도전을 틀어놓고 생각 없이 낄낄거리며 도망쳤다. 언젠가는 흘려야 할 눈물이었다. 그게 어제였던 것뿐이다.
뭔가 특별해야 할 것 같은 생일 주말이 불행해서 더 우울했던 것 같다. 동시에 모순적이게도 태어난 날을 기념하는 전통이 있다는 것조차 짜증스러웠다. 태어나서 좋은 것보단 싫은 게 훨씬 많은데 말이다. 내게 살아있을 자격이 없다든가, 살아가기 두렵다의 사이에서 마음이 왔다갔다했다. 언제 일인분을 할지 불확실한 채로 늙어가는 부모님에게 의지하는 나 자신도 싫었고 불확실한 미래 안에서 끝까지 잘할 수 있을까 불안했다. 회사에서 힘들던 때와는 또 다른 종류의 괴로움이었다. 내가 선택한 길이니 누구에게 위로를 구할 수도 없다.
그래서 어젯밤에는 늦게까지 정리를 했다.
이럴 때 유일하게 위로가 되는 진통제가 죽음에 대한 생각이다. (물론 지금 죽겠다는 선언을 하는 게 아니니 1393에 전화하거나 하지는 말았으면 좋겠다.) 유한한 삶 속에서 내 짐이 영원하지 않다는 명백한 진리를 다시 떠올리면 그제야 마음이 조금 가벼워진다. 하지만 그 시기를 내가 결정할 수 없다는 게 다시 무거운 짐을 마음에 올려놓는다. 인간이 져야 하는 짐은 인간에게 허락된 지혜와 용기에 비해 조금 더 무거운 것 같다.
사실 내가 브런치에서 가장 쓰고 싶었던 글도 이런 종류의 똥글이었다. 날 아는 이들에게는 보여주지 못하는 감정들을 배설하기 위한 장소로 만들고 싶었다. 하지만 거의 정제된 글만 올렸던 건 검열을 당할까 봐 무서워서였다. 창작활동에 대한 대가는 거의 없는 대신 작가에게 큰 자유를 주는 걸 이 플랫폼의 특징으로 알고 있으니, 우선은 올려보련다. 썰리면 어쩔 수 없고...
자살률 1위 국가에서 자살에 대해 이야기할 자유가 인터넷에서조차 없다는 사실이 웃기다. 죽음에 대해 지나치게 터부시 하는 게 더 안 좋다고 생각한다. 해결책을 찾기 위해선 입만 틀어막기보다는 건강한 토론이 이뤄져야 하지 않을까. 드러내지 못한다고 사라지지 않는 것은 아니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