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공탈희 Jun 30. 2023

2. 잊을 수 없는 첫 발령

9급 1호봉

2015년, 스물여섯.

지방행정 9급으로 합격.


설레는 마음으로 임명장을 받고 발령받은 부서로 인사하러 가는 길.


오리엔테이션에는 나의 발령지가 '세무과'라고 적혀 있었는데, 앞으로 근무하게 될 곳이라며 인사한 곳은 '농업기술센터'였다.


어라? 이게 무슨 상황이지?


나중에 들은 얘기로는 농업기술센터에서 신규직원을 더 달라 요구하여 급히 변경된 거라고 했다.


인사이동이란 내 의지와는 다르게 가라면 가고 오라면 와야 하는 것.


행정직이지만 농업직 업무를 하게 됐고 '넌 이 지역 출신 아니라서 인사에 불이익이 많을 테니, 나중에 고향으로 전출 가던지 상위기관으로 전입하라.'라고 주변에서 많이 말씀해 주셨다.


연고가 없는 사람이라 행정직은 잘 가지 않는 곳으로 보낸 걸까?




작고 좁은 지역일수록 학연, 지연, 혈연의 영향을 많이 받는다는 걸 예상하지 못했다.


부부 공무원부터 부모자식, 형제자매, 같은 학교 선후배, 친구, 사돈의 팔촌까지 섞여 있는 이곳은 평온하면서도 이상한 나라였다.




행정직은 모든 직렬에 대체인력으로 넣어질 위험이 있는 직렬이다.

좋게 말하면 어디서든 일할 수 있는 능력자이지만, 어디서든 땜빵을 해야 하는 상황에 놓이기 쉽다는 얘기이기도 하다.

그리고 그런 땜빵 담당은 주로 연고가 없는 직원이 맡을 확률이 높다. (내가 현재 근무하있는 지역은 그렇다.)




센터에서의 생활은 농민분들에게 각종 보조금 혜택과 도움을 드릴 수 있어서 보람이 있었다.


업무는 힘들어도 잘 가르쳐 주시는 몇몇 선배님들 덕분에 헤쳐나갈 힘이 났다.


그러나 회식은 정말 힘들었다.

어찌나 자주 회식과 모임이 생기는지.


센터 전체 회식, 과 회식, 팀 회식, 여직원 모임, 7급 이하 직원 모임, 번개 회식 등등....


온갖 회식도 회식이지만, 자주 술자리를 만드는 팀장님으로 인해 고달팠다.


그 당시(코로나 팬데믹 이전) 회식 문화는 입을 대고 마시던 잔으로 이 사람 저 사람에게 잔을 돌렸고 돌아가며 한 명씩 건배사시키는 것은 기본이었다.


같은 상에 앉은 사람들끼리 원샷 후 

옆 상에 앉은 사람들에게 똑같이 마시라고 하는 일명 '상뜨기' 같은 이상한 문화들도 있었다.


2차 노래주점, 노래와 춤은 기본이고 운이 나쁘면 늙은 남자 상사와 부루스를 춰야 했다.


그러고 나서도 이어지는 3차, 4차...

거기서 생겨나는 성추행 문제, 19금 농담 등...


회식 중간에 도망가면 다음날 한 소리 듣는 건 기본이고 그다음 회식부터는 도망갈 수 없게 감시를 받아야 한다.


술 분해 능력이 없지 않은 이상, 몇십 개의 반짝이는 눈동자가 나의 잔과 입술을 쳐다보며 무언의 압박을 가해온다.

마실 때까지 쳐다본다.

마시지 않으면 분위기 깼다는 핀잔을 들어야 한다.


촌구석이라 그런가?

원래 술자리가 많은 부서인가?

공무원은 다 그런 건가?

이러려고 내가 공부한 건가?


무엇보다...

벗어날 수 있을까?


지금은 그때만큼 회식이 많지도 않고 회식문화도 바뀌고 있는 추세이지만, 부서의 구성원과 분위기에 따라 조금씩 다른 것 같다.




9급 1호봉, 기본급이 130이 안 됐다.

각종 수당이 있다지만, 개정된 공무원연금법으로 인해 선배공무원들보다 높은 비율로 기여금을 떼고 더 적은 금액을 돌려받게 됐다.


퇴직 이후는 먼 훗날의 일이니 그건 그렇다 쳐도 당장 생활하기 빠듯한 봉급에 또 한 번 놀랐다.


세금, 건강보험료, 기여금, 각종 회비를 떼고

고정지출(월세, 보험료, 통신비, 교통비 등) 떼고 나면 생활은 할 수 있었지만 1원도 저금하기 힘들었다.


현재는 9급 1호봉 기본급이 그때보다 많이 올랐지만, 사실상 물가상승률과 최저시급을 고려하면 여전히 부족하다.




지방직은 지역 곳곳을 돌아다녀야 하는 업무가 많아서 운전면허는 필수이고, 대중교통이 대도시처럼 잘되어 있지 않아서 자차도 필수이다.


서울에서 지하철과 버스만 갈아탈 줄 알고 따놓지 않았던 면허를 땄고, 자차를 굴리며 만만치 않은 차량유지비도 고정지출 항목에 넣게 되었다.




업무에 따라서 출장이 많은 경우, 출장을 다녀오고 나면 업무는 업무대로 쌓여 야근을 해야 한다.


꼭 출장이 아니더라도 야근을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생겼고 워라밸은 꿈만 같은 이야기였다.


인수인계가 제대로 되지 않아서 적응하기까지 일일이 찾아보고 물어보며 공부해야 하기에 인사이동을 하면 초반 몇 개월은 정말 힘들다.


그리고 그 과정을 퇴직할 때까지 반복한다.


운이 나쁘면 가자마자 전임자가 기한이 다 되도록 처리하지 않았거나 잘못처리한 일을 해결해야 한다.




임용되자마자 그만두고 싶었다.

하지만 주변에서는 아깝게 왜 그만두냐, 시간이 지나면 괜찮아진다, 인사이동하면 괜찮아질 거다, 그만두고 후회하지 말라는 말들로 회유했다.


그러나 후회한다.

빨리 그만두고 도망치지 못한 것을.

미련하게 용쓰고 참고 열심히 일했던 것을.

젊고 예쁜 20대를 그렇게 보내버린 것을.

작가의 이전글 1. 공무원을 선택했던 이유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