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8년-1980년 언저리
제9화 추석
9월 17일은 추석이다. 그리고 일요일이다. 따라서 토요일인 9월 16일부터 월요일인 9월 18일까지 '추석 연휴'이다. 고향에 내려가려는 사람들이 서울역이나 용산역 그리고 영등포역에서 열차표를 사기 위해 밤샘 줄 서기를 하고 있고, 재작년에 생긴 강남고속버스터미널도 사정은 마찬가지라서 암표상이 극성을 부리고 있다고 한다. TV에서는 정부와 경찰이 암표 매매 행위를 '비시민적 제악(諸惡)으로 규정하고, 대대적인 단속에 나서고 있다는 뉴스가 연일 계속되고 있다.
영석은 현재 자신의 처지도 그렇거니와 중학교 3학년 때 서울역에서 출발하는 호남선 완행열차인 비둘기호를 타고 정읍역까지 갔던 끔찍한 기억 때문에, 고향에 가지 않기로 하고, 누나만 다녀오기로 했다. 누나는 1974년 8월부터 기존의 무궁화호를 제치고 등장하여 주요 역에만 정차하는 새마을호 특급열차는 탈 엄두를 내지 못한다. 그렇다고 1960년대에 '특급열차'로 운행되다가 새마을호가 등장하면서 그 지위를 뺏기고 그저 '무궁화호'라고만 불리는 열차도 탈 형편은 아니다. 또한 그보다 느린 통일호와 같은 보통 급행열차도 누나 형편에 너무 비싸다. 그래서 누나 역시 모든 역에 정차하는 보통 완행열차인 비둘기호를 타고 가기로 했다고 했다. 영석은 정읍까지 7시간 반을 서서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며 고향에 내려가겠다는 누나가 너무 안쓰러웠다. 엄마 얼굴 한번 보려고 가는 길이라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일이지만, 혼자서 가던 고향길이 진저리가 날만큼 힘들었기 때문이다.
영석이 햇수로 4년 전에 서울역에서 완행열차인 비둘기호에 올라탈 때는 전쟁터가 따로 없었다. 누나가 쓰리꾼(スリ, 소매치기)들이 자리를 선점하려는 사람들로 북새통을 이루는 틈을 이용해 호주머니를 털어가는 것을 조심하라 했기 때문에 한시도 긴장을 늦출 수 없었다. 누나가 가다가 배고프면 서대전역에서 가락국수 사 먹으라고 준 300원이 학생복 윗도리 안주머니에 들어 있는데, 누나가 쓰리꾼들은 기가 막히게 돈 냄새를 맡는 재주가 있고, 그들이 손가락에 낀 반지에는 날카로운 면도날이 달려있다고 엄포를 놓았기 때문에 옆을 지나가는 젊은 남자들이 모두 쓰리꾼으로 보였다. 갈 길이 멀어 힘든 것은 그렇다 치더라도, 가는 내내 긴장하고 있어야 하는 스트레스가 영석이를 더 피곤하게 만들었던 것 같다.
영석은 어른들에게 먼저 자리를 양보해야 할 것이므로 어차피 서서 갈 것이니 열차에 천천히 오르기로 했었다. 그러나 그것이 커다란 오산이었음을 알게 된 것은 열차가 출발하고 나서였다. 영석이 서있던 자리는 출입구 바로 옆에 있는 화장실 부근이라 냄새도 심하고, 화장실을 들락거리는 사람들에게 길을 비켜주는 일이 너무 힘들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왜 그렇게 삶은 계란, 사이다, 콜라 등을 파는 판매원이 자주 다니는지 미칠 지경이었다. 열차 안은 너무 더운 데다가 사람들이 뿜어내는 열기와 음식 냄새, 깔고 앉아 있던 큰 통에서 양재기로 한잔씩 따라 마시는 막걸리 냄새, 각종 음식 냄새 등이 어우러져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천장 위에서 돌아가는 선풍기 소리, 술에 취한 사람들이 고래고래 지르는 소리, 자리를 놓고 실랑이하는 소리가 서로 뒤섞이면서 나중에는 그저 ‘웅웅’ 소리로 들릴 뿐이었다.
영석은 수원역을 지나면서 다리가 아파오기 시작했다. 배도 고팠지만, 오로지 서대전역에서 사 먹을 가락국수만 생각했다. 열차가 서대전역에 도착하자 사람들은 뛰기 시작했다. 열차가 딱 3분간만 정차를 하기 때문이다. 영석은 200원짜리 가락국수를 단무지와 함께 거의 들이마시다시피 했다.
이리역을 거쳐 정읍역에 도착하면, 버스터미널로 가서 차표를 사고, 빨간색 붓글씨로 아산・심원・해리・동호행(해안선)이라 써붙인 버스로 갈아타야 한다. 그 후로도 먼지가 풀풀 나고, 자갈때문에 덜컹거리는 신작로를 40여 분 달려가야 비로소 엄마를 만날 수 있다. 단 하루 엄마와 꿈같은 시간을 보내고 나면, 다시 똑같은 길을 돌아서 서울로 와야 한다. 엄마와 고향 산천을 보겠다는 열념이 없다면 다시는 겪고 싶지 않은 기억일 것이다.
추석 전날, 영석은 옥수동 형을 찾아뵙기로 했다. 누나가 백화수복 한 병과 3㎏짜리 설탕 하나를 사주면서, 명절이니 꼭 인사를 다녀와야 한다고 했기 때문이다. 옥수동에 도착하니 들기름이며 참기름 냄새가 진동했다. 형수님도 반갑게 맞아주고, 경숙이도 전을 부치고 있다가 영석을 보고 손을 흔들었다. 경숙이 말에 따르면, 다른 조카들은 친구들을 만나러 나갔다고 했다.
“형님은 어디 가셨나요?”
“또 순댓국집 마나님 만나 한잔하고 계시겠지요”
형수님이 비아냥거리는 소리를 했다.
“아이고, 형수님! 순대국집도 명절에는 쉬지 않나요? 그리고 지난번에 형님과 같이 그 집에서 한잔했는데, 두 분이 전혀 형수님께서 의심할 만한 사이가 아닌 것처럼 보이던 데요?”
“아니, 누가 남들 앞에서 대놓고 사귄답디까?”
“주인아주머니는 형님을 존경하는 눈치였어요, 그러니 의심은 거두시는 게 어떠실지?”
“그래 맞아, 우리 아빠가 그럴 사람은 아니지”
경숙이가 영석 편을 들었다.
“아이고 부녀지간에 짝짜꿍이 잘 맞아요”
말씀은 그렇게 하시지만, 형수님은 영석이가 가져온 정보가 싫지 않은 눈치였다.
영석은 경숙이가 전을 부치는 자리 옆에 앉으며 뭘 도와줄 일은 없나 찾았다. 그러나 마땅히 할 일이 없어 멀뚱히 경국이 전 부치는 모습만 보고 있었다.
“삼촌! 수아는 잘 만나고 있어? 계집애가 내숭이 심해서 나한테는 아무 이야기도 안 하니 알 수가 없어서 말이야”
경숙이가 자기 엄마 들을까 싶어 아주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순간 영석이는 수아가 선물도 사주고, 밥도 사주고, 도시락도 싸 온 이야기를 경숙이에게 해야 하나 잠시 고민에 빠졌다.
“고 계집애 별명이 ‘여우’거든”
“친한 친구니, 너에게 다 말하지 않던?”
“아이고! 그럼, 그동안 진도가 많이 나가셨다는 말씀?”
경숙은 낮으나 말꼬리를 올리며 눈을 흘겼다.
“아니 뭐, 한두 번 만났을 뿐이지”
“한두 번? 한 번이면 한 번이지 한두 번은 또 뭐야?”
“응 체력장 잘 보고 공부 열심히 하라더라”
“손은 잡았어?”
경숙은 낮은 목소리지만 속사포처럼 질문을 해댔다.
영석이 가만히 생각해 보니 경숙이가 먼저 영석의 팔짱을 낀 적은 있지만 둘이서 손을 잡은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만난 지 얼마나 되었다고 벌써 손을 잡니?”
영석이도 형수님의 눈치를 살피며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럼 오늘 수아에게 연락해서 영화나 한 편 보자고 해”
“무슨 영화? 수아가 나에게 시간을 내줄까?”
“단성사와 피카디리는 잘 모르겠는데, 중앙극장에서 존 트라볼타가 주연한 미국 영화 ‘토요일 밤의 열기를 상영하고 있고, 서울극장에서는 이영하, 유지인, 김동현이 주연하는 ‘마지막 겨울’을 상영하고 있어, 애들이 디스코 영화인 ‘토요일 밤의 열기’를 보겠다고 모두 난리야. 그러니 삼촌이 전화해서 그 영화 보자고 해봐”
“야, 내가 어떻게 전화를 해?”
“뭐 어때? 공휴일에는 모든 도서관이 휴관을 하고, 삼촌도 하루쯤 쉬는 게 좋지 않을까?”
“제발 샌님처럼 굴지 말라고” 경숙이는 급기야 영석을 샌님으로 몰아가고 있었다.
“전화번호도 모르는데 어떻게 하니?”
사실 영석은 지난번에 수아가 가르쳐 준 전화번호를 잘 외우고 있었지만, 경숙에게 말하면 수아에게 왠지 혼이 날 것만 같았다. 그리고 생텍쥐페리가 “가장 깊은 사랑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라고 말했던 것처럼, 사랑은 촛불과 같으니 바람에 흔들리지 않도록 숨겨야 할 것만 같았다.
“전화번호는 내가 알고 있잖아”
“엄마 삼촌하고 잠시 바람 좀 쐬면서 이야기하고 올게, 전은 다 부쳤으니 내 할 일은 다한 거야 나머지는 언니 오거든 시켜”
“아니 얘들이 왜 이래? 엄마만 죽으란 거야?”
형수님의 목소리를 뒤로 하고 영석은 경숙이에게 끌려 나왔다.
경숙은 영석을 공중전화 부스 앞까지 데리고 갔다.
“수아네는 가게로 전화를 걸면 일하는 아저씨가 받거든, 그러니 내가 수아를 바꿔 달래서 수아가 받으면 바로 삼촌한테 전화기를 건네줄 테니 아무 소리 말고 오늘 영화나 한 편 보자고 해, 그리고 걔 춤추는 것을 매우 좋아하니까 ‘토요일 밤의 열기’를 보자고 해, 그렇지만 내가 옆에 있다거나 시켰다는 말은 절대 해서는 안돼, 알았지?”
경숙은 손가락을 입에 대며 ‘쉿’ 소리를 냈다.
“여보세요, 수아 좀 바꿔주세요. 친구 경숙이예요. 그리고 다른 친구 바꿔줄 거니까 수아한테는 제가 전화했다고 하시면 안 돼요. 아셨죠?”
아저씨와 경숙이 간에 무언의 신뢰 관계가 형성되어 있는 것처럼 보였다.
수아가 전화기를 바꿔주고 15초 정도의 시간이 15년은 지난 것 같다고 생각될 때쯤 수아의 목소리가 들렸다.
“여보세요?”
“안녕! 나야 영석이”
영석의 목소리는 덜덜 떨렸다.
“와우 진짜 삼춘이 전화를 했네”
“오늘 시간 있으면 중앙극장에서 ‘토요일 밤의 열기’라는 영화나 볼 수 있을까 해서”
영석은 경숙이 시킨 대로 다짜고짜 영화를 보자고 했다.
“와우! 박력도 있는데? 마음에 들어”
“그런데 공부는 안 해?”
수아가 꽥하고 소리 지르듯 던진 한방에 영석은 어질어질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수아의 목소리가 너무 커서 경숙이 귀에도 들렸는지 경숙이가 한 손으로 자기 입을 가리며 몸을 움츠렸다. 영석은 하마터면 전화기를 손에서 놓칠 뻔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