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목교

1978년-1980년 언저리

by 서완석

제12화 정희와 노동조합

공장 밖은 완연한 가을 날씨다. 창밖으로 보이는 하늘은 유난히도 맑고 높다. 정희가 사무실 창문을 여니 코끝을 스치는 싸늘한 바람이 훅하고 밀려들어 왔다. 정희는 책상 위에 있는 서류철들을 정리한 후, 다시 자리에 앉아 쉼 없이 숫자와 싸우고 있다. 1층 공장의 요란한 기계 소리는 이제 그저 익숙한 배경음악일 뿐이다. 정희는 창문 너머로 여공들의 지친 얼굴들이 스치고 지나갈 때, 안쓰러운 마음이 들면서도 애써 고개를 돌린 적이 많았었다. 여공들의 삶과 자신의 삶은 다르고, 자신은 2층의 공기를 마시는 사람이라고 생각했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그녀들은 이른바 공순이지만, 정희 자신은 어엿한 사무직원이고 비록 야간이지만, 고등학교를 졸업한 사무직원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언젠가 영등포도서관에서 읽은 책들은 정희가 생각을 고쳐먹는 계기가 되었다. 누구의 책인지는 잘 기억나지 않지만, “학력에 의한 차별은 인간 존엄성에 반하며, 교육의 가치보다 개인의 인격과 잠재력을 존중하는 철학적·윤리적 원칙이 중요하다”라는 구절을 읽고, 자신도 대학생들과 동등한 대우를 받을 가치 있는 존재이며, 자신 역시 그러한 생각으로 살아야 한다고 마음먹었었기 때문이다.


정희는 도서관에서 책을 읽은 후 자신이 일기장에 다음과 같이 쓰고 뿌듯한 마음에 몇 번이나 읽었던 기억이 있다.

"인간의 가치는 학력과 무관하다. 대학을 나오지 않았다고 해서 존중받을 권리가 줄어드는 것이 아니며, 박사 학위를 가졌다고 해서 더 큰 인간적 존엄을 누려야 하는 것도 아니다. 인간의 존엄은 단순히 인간이라는 존재 자체에서 비롯되며, 교육이나 지식수준은 그 본질을 평가하는 기준이 될 수 없다. 따라서 모든 사람은 차별 없이 의견을 존중받고, 삶의 기본적 권리를 보장받으며, 사회적 참여와 보호를 받을 동등한 권리를 가진다. 학력은 사회적 수단일 뿐, 인간의 존엄과 동등한 대우의 근거가 될 수 없으며, 이를 지키는 것이 정의롭고 공정한 사회의 핵심이다. 그러니 나도 책을 많이 읽어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을 것이며, 누구에게서든 존경받고 누구든 존경할 것이다."

영등포도서관에는 영석이의 국민학교 동창인 우순이가 말단 공무원인 ‘5급을’ 사무직으로 근무하고 있다. 따라서 책을 빌리거나, 읽고 싶은 책을 찾을 때 큰 도움을 받을 수 있다. 그래서 정희는 틈이 날 때마다 영등포도서관에 갔다. 어린 시절부터 책 읽기를 워낙 좋아한 탓도 있겠지만, 정희에게 영등포도서관은 영석이를 대학에 보내고 자신은 갈 수 없는 현실을 잊기 위한 도피처가 될 수 있었다. 그리고 책을 통해 조금이라도 대학생들이 생각하는 바와 가까워질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면, 자존감이 올라가는 기분을 느꼈다. 정희는 가능하면 철학 관련 책을 찾아 읽었다. 무슨 소리를 하는지 이해가 되지 않을 때가 많지만, 읽고 나면 자신의 지적 능력이 한 뼘 정도는 늘어난 것 같고, 나중에 학력 수준이 높은 사람들과 대화할 때 꿇리지 않을 것 같기도 했다. 영석이는 국민학교 6학년 때, 누나가 정읍 큰집을 떠나 인천으로 간 후, 외롭고 힘들 때면 우순이네 집에 가서 자기도 하고, 밥도 얻어먹는 등 큰 도움을 받고 있다고 편지를 써 보낸 적이 있다. 그래서 정희는 유난히 우순이에게 정이 갔고, 우순이도 이런 정희를 잘 따랐기 때문에, 누나가 도서관에 오면 최선을 다해 돕고 식사도 같이 했다.


정희의 조용한 세계에 금이 가기 시작한 건, 한여름이 지나고 가을이 찾아오면서부터였다. 경리 서류에 ‘노조 활동비’라는 항목이 새로 생긴 뒤부터 사무실의 공기가 차가워졌다. 부장님의 얼굴은 늘 찌푸려 있었고, 윗선에서 걸려 오는 전화는 길어졌다. 1층 공장에서도 심상치 않은 기운이 감돌았다. 쉬는 시간마다 삼삼오오 모여 속삭이는 여공들, 그들의 눈빛에 전에는 보지 못했던 분노와 결의가 서려 있었다. 정희는 불안했다. 그들의 싸움이 자신의 그나마 평화로운 삶을 흔들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가장 친한 언니인 은숙이 언니가 노조 활동을 아주 활발하게 한다는 소문이 들려왔다. 관리부장 이상우는 정희를 불러 은숙이 언니와 거리를 두라고 말했다. “너는 똑똑하니까 저런 애들하고는 다르겠지?” 정희는 어색하게 웃었지만, 마음속은 불편했다. 은숙 언니는 정희가 힘들어할 때마다 늘 따뜻한 말 한마디를 건네주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런 은숙이 언니가 최근 회사에서 ‘문제아’로 불리고 있다는 말을 들어 정희는 너무 불편했다. 점심도 같이 먹는 처지인데 회사에서 정희를 바라보는 시선이 조금씩 달라지고 있음을 정희 자신도 느끼고 있었다. 특히 남자 직원들은 은숙이 언니를 타도 대상이고 빨갱이라고 했다.


방직공장의 특성상 정희가 다니는 일동방직 회사의 경우에도 노동자의 대다수가 수진이와 같은 10대 후반에서 20대 초반의 여공들이 80%를 차지하며, 생산 현장에서 그들이 핵심적인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그러나 노조의 주도권은 주로 남성 노동자들이 쥐고 있다. 다시 말해, 여성 노동자들은 실을 뽑아내는 방적기와 천을 짜는 방직기 앞에서 직접 실을 뽑고 천을 짜는 생산 현장 노동을 주로 담당하고 있다면, 남성 노동자들은 기계 정비, 설비 유지보수, 운반, 잡역 등 상대적으로 간접적이고 보조적인 업무에 종사하고 있다. 그런데 문제는 현장 인원으로는 소수였지만, 체력과 기술적 업무를 맡는 경우가 많아 남성 노동자들을 회사와 노조에서 ‘중심 인력’으로 간주하고 있다는 점이다. 정희가 생각하기에 기업주와 보수적 세력은 노조의 민주화 요구를 차단하기 위해 성별 갈등을 의도적으로 부추기고 분열을 조장하고 있다.

최근 일동방직 여성 노동자들은 “노동조합의 민주화”를 요구하면서 보다 적극적인 발언권을 가지려 하고 있다. 그러나 기존의 남성 중심 노조 집행부는 여성 조합원들의 참여 확대를 견제하고, 회사 측과 결탁하여 어떻게든 자신들이 과거에 누리던 자리를 빼앗기지 않으려 하고 있다. 남성 노동자들은 “여자는 집에서 솥뚜껑 운전만 하면 돼”를 입버릇처럼 말하고 있다. 즉 남성 노동자들에게는 여성이 집안일이나 하면 되는 것이지, 뭣 때문에 산업 현장에까지 진출하려 하느냐는 인식이 지배적이고, 어쩌다 공장에서 일하게 되더라도, 별다른 책임이나 권한이 부여되지 않는 보조적인 업무만 수행하면 되는 것이라는 생각이 아주 강하다. 이러한 가부장적 인식 때문에 남성 노동자들은 육체적인 힘이나 기술, 관리 권한을 요구하는 업무는 "남자가 대표해야 한다"는 것을 아주 당연하게 생각하고 있다. 따라서 일동방직의 경우에도 실제 생산을 담당하는 여성들이 다수임에도 불구하고 '대표성'은 남성이 가져가는 구조다.

그렇다면 회사는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 것일까? 정희가 보기에 회사는 다수인 여성 노동자들이 목소리를 내면 파급력이 크다는 점을 두려워하고 있는 것 같았다. 이는 회사 측이 소수인 남성 노동자들을 노조 운영의 중심으로 내세우고 우대하면서 여성 노동자의 정치적 참여를 두려워하는 듯한 태도를 자주 보여주고 있는 것만 보아도 알 수 있다. 이러한 분위기 때문에 20% 정도밖에 안 되는 남성 노동자들은 노조 집행부 자리를 장악하면서 회사와 협조적인 태도를 취하는 경우가 많았고, 노조에 속해 있으면서도 노동조건 개선보다는 자신들의 권한 유지와 여성 노동자 통제를 우선시했다. 구체적으로 그들은 위원장, 간부 등 주요 직책을 거의 독점하는 등 노조 운영권을 장악하고 있고, 회사와의 임금·근로조건 협상에서 주도권을 행사하며, 여성 조합원들이 노조 민주화와 참여 확대를 요구하면 회사와 결탁하여 사측의 의도를 뒷받침하면서 이를 폭력이나 모욕으로 억눌러 오고 있다.


그날 오후, 은숙 언니가 화장실을 가려는 정희에게 슬쩍 쪽지를 건넸다.

“이 쪽지는 화장실에서 읽어 보고 아무도 보지 못하게 잘게 찢어서 화장실에 버려"

쪽지에는 "내가 노조 위원장 선거에 입후보하려고 한다. 좀 도와다오.”라고 쓰여있었다.

은숙 언니는 정희보다 두 살 위의 언니로 7남매의 맏이다. 언니 말에 따르면, 고향인 전라남도 진도에 땅 한 마지기가 없는 아버지를 따라 서울로 와서, 바로 1년 후에 18세의 나이로 일동방직에 입사했다고 한다. 은숙은 가슴이 뛰었다. 정희가 감히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여성 노동자가 노조 위원장이 될 수도 있다는 사실 때문이다.

정희가 은숙 언니를 처음 본 건 구내식당 앞이었다. 그녀는 누구보다 자신 있는 걸음걸이가 아주 인상적이었다. 그리고 그녀의 목소리는 어떤 신념의 지배를 받고 있는 것처럼 확신에 차 있었다. 정희는 그 목소리가 자신을 압도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특히 ‘일동방직 노조의 민주화’를 말할 때면 그녀의 눈빛은 불을 뿜는 듯했다. 그러나 일상적인 대화를 할 때는 누구보다도 다정하고 나긋나긋한 천생 여자였다.


여성 노동자들이 남성 반장의 꾸지람을 듣고 축 처진 어깨로 식판을 든 날, 그녀가 먼저 다가가 말을 건넸다. “너희가 잘못한 게 아니야.” 말은 단순했지만, 그날 식당의 공기는 단번에 바뀌었다.

며칠 뒤, 종이 몇 장이 사무실 책상 위에 놓였다. 누군가 몰래 꽂아둔 전단이었다. “이은숙, 노조위원장 후보 출마.” 정희는 머릿속이 순간 아득해지는 걸 느꼈다. 정희가 맡고 있는 경리의 일은 중립적이어야 한다. 그러나 그녀는 숫자 뒤에 숨은 계산의 불공평함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다, 그러니 누군가가 그 불공평함을 가려낼 수단을 찾는다면, 어쩌면 경리의 손도 불편한 진실을 드러내는 도구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리고 민주주의의 기본원칙에는 다수결의 원리가 포함되어 있다는 것도 알고 있다. 이는 모든 구성원의 의견이 다를 경우, 합리적이고 효율적으로 결정을 내리기 위한 차선책임이라는 것도 잘 알고 있다. 그리고 다수의 의견을 따르되, 소수의 권리와 이익이 부당하게 침해되지 않도록 보장하는 것이 민주주의의 핵심 가치라는 것도 잘 알고 있다. 그런데 일동방직 노조의 현실은 어떤가? 다수결의 원리는 커녕 다수의 권리와 이익마저 부당하게 침해되고 있지 않은가 말이다. 정희는 헌법에 대해서 잘 모른다. 그리고 국민의 기본권 보장에 대해서도 깊이 생각해 본 일이 없다. 그러나 고등학교 다닐 때, 사회 선생님께서 “민주주의는 궁극적으로 상식(common sense)과 이성에 기반한 합리적인 결정을 목표로 하는 사회”라고 하시지 않았던가? 정희는 은숙 언니가 노조 위원장이 되고, 노조와 회사가 반드시 민주적인 조직이 되어 자신도 지금의 심적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랐다.


은숙 언니의 선거 운동은 소문을 타고 밤마다 여성노동자들에게 퍼졌다. 기숙사 복도에서, 식당 뒤편 돌담 아래에서 여자들은 서로의 눈을 보며 속삭였다.

“이제 우리도 목소리를 내보자.”

작은 모임들은 곧 조직으로 모였다. 충남 보령에서 올라온 미영이, 강원도 양양에서 온 순덕이, 경상북도 문경에서 올라온 영자 같은 이름들이 불리어졌다. 그들의 기계 돌리는 손은 거칠었고, 숨결은 차가웠다. 그러나 누구 하나 흔들리지 않는 굳은 표정이었다.

“정희야, 우리에게 힘을 줄 수 있겠니?”

화장실에서 만난 은숙 언니가 정희를 바라보며 물었다.

중립적인 위치에 있어야 할 경리의 자리를 넘나드는 건, 위험을 자초하는 일이다. 사측은 기록을 숨기려 하고, 관리부서의 장들은 불편한 것들에 대해 질문을 받으면 악을 쓰듯 덤벼들었다. 하지만 정희는 자신이 기록해 온 불편한 진실들이 곪아서 언젠가는 반드시 터질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정희는 주위의 눈치를 보면서 가슴이 쿵쾅거리는 느낌을 받았다. 그러나 은숙 언니를 꼭 껴안아 주었다.

“언니는 반드시 승리할 거야, 그러나 언니는 내가 처해 있는 입장도 이해해 줄 것이라고 믿어, 내 마음 알지? 언니 힘내!”

작지만 힘이 잔뜩 들어간 정희 목소리에 은숙 언니도 정희를 꼭 껴안았다.


사실 그동안 정희는 은숙 언니와 점심을 같이 먹는 것도 피했다. 관리직에 있는 사람들이나 남성 반장 또는 조장들의 눈치가 보였기 때문이고, 무엇보다도 노조에 가입하지 않은 중립적인 위치에 있었기 때문이다.

한국 노동법과 관행상, 노조 조직이 주로 생산직 중심으로 구성되었고, 사무직은 회사와 가까운 위치에 있기 때문에 사무직 노동자들은 노조 가입을 아예 고려하지 않거나, ‘중립’ 위치를 유지하며 노조와 일정 거리를 두는 선택을 하는 것이 불문율처럼 여겨지고 관리부장도 이를 자신의 신념처럼 말하곤 했었다. 따라서 정희는 비록 관리직이 아니고 사무실 안에서 장부와 문서를 관리하는 낮은 지위에 있지만 감히 노조에 가입할 생각을 하지 못했다. 그래서 자료 제공, 은밀한 메모, 정황 전달과 같은 간접적 지원으로만 여성 노동자들의 노조 활동을 도울 수 있었다.


한편 주로 여성 노동자들로 이루어진 일동방직 노동조합 간부들과 대의원들은 내일 아침에 있을 대의원 선거를 치르기 위해 밤을 새워 투표함과 용지 등을 준비하며 퇴근 시간을 기다리고 있었다.


선거일 새벽 날이 채 밝기 전, 공장은 긴장으로 팽팽했다. 남성 반장이나 조장들은 위협적이었다. 그들 가운데 일부는 사측의 눈치를 보며 은숙 언니와 그녀의 지지자들을 은근히 협박했다. 그들은 “너희가 시끄럽게 하면 회사가 힘들어지고, 너희들의 일자리도 사라진다”라는 말을 반복했다. 하지만 여공들은 이번이 기회라는 심정으로 똘똘 뭉친 듯했다.


정희는 어젯밤에 집에 가지 못했다. 며칠 전부터 일부 남성 노동자들이 불안과 분노를 무기로 여성들을 공격할 준비를 하고 있다는 정보를 들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확한지 알 수 없는 정보를 은숙 언니 측에 전달하여 혼란이 왔을 때 감당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래서 만약을 대비해 집에 가지 않고 사태를 지켜보기로 했다. 동이 트고 있었다. 갑자기 노조 사무실 쪽에서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렸다. 은숙은 불길한 예감이 들어 노조 사무실로 달려갔다.


노조사무실에서는 남성 노동자 5=6명이 고함을 지르고 있었다. 이들은 양동이로 만든 방화수통에 화장실에서 퍼온 똥물을 가득 담아 들고 서있었다. 지독한 악취 때문에 정희는 코를 감싸 쥐었다. 남성 노동자들은 고무장갑이나 가죽 장갑을 끼고 있었다.

“이게 뭐 하는 짓이에요?”

정희가 소리쳤다.

그 순간 그들은 장갑을 낀 손으로 똥물을 퍼서 여성노동자들의 얼굴과 몸에 닥치는 대로 뿌렸다.

“야, 오늘 누가 우릴 농락하려는 거냐?” 양동이를 들어 똥물을 뿌리던 한 남성이 입술을 비틀며 소리쳤다.

다른 남성이 덧붙였다. “저런 년들이 우리 기계까지 쥐고 흔들면 안 되지. 제대로 한 번 보여주자고.”

말은 비웃음으로 떨렸고, 눈빛에는 분노와 불안이 뒤섞였다.

“꺼져, 새끼들아! 이럴 줄 알았다!”

“네놈들이 뭔데 우리한테 덤벼!”

여성 노동자 한 명이 소리쳤다.

그녀의 외침이 끝나자마자, 양동이 속 오물이 그녀의 하늘색 작업복 위로 쏟아졌다. 똥냄새가 진동을 했다. 여성 노동자들은 비명을 질렀고, 순식간에 바닥은 미끄럽게 젖었다. 머리카락과 얼굴, 손끝까지 똥물이 튀었다.

미영은 바닥에 쓰러지며 몸을 비틀었다.

“으악! 이런…!” 그녀의 비명에 순덕과 영자도 울음을 터뜨렸지만, 움직일 수밖에 없었다. 똥물이 흘러내리는 사이, 남성들은 그 위에서 발을 굴렀다.

“야, 이런 년들이 뭘 배웠다고 떠들어! 이게 바로 네 년들이 한 대가다!”

“네 년들이 성당이나 선교회 등에 다니면서 글자를 좀 익히니 세상에 뵈는 게 없지?”

“야, 이 어용노조 새끼들아, 부끄럽지도 않니? 불알 달린 사내놈들이 할 짓이 없어 똥물을 퍼부어? 이런 더러운 놈들아!”

순덕이가 소리쳤다. 그러자 한 놈이 양동이 속에서 똥물을 푸더니 순덕이의 얼굴에 묻히고 입을 강제로 벌려 입에도 넣고, 그녀의 브래지어 속과 바지춤까지 들쳐 집어넣었다.

정희도 가만히 있을 수 없어 그놈에게 달려들었다.

“이게 사람이 할 짓입니까? 그만두지 못해요? 이건 심각한 범죄행위입니다.”

“정희 씨는 가만히 계세요. 정희 씨는 노조원이 아니지 않습니까?”

“지금 이러한 행동이 노조원이나 비노조원과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당장 그만둬요.”

정희의 손과 옷에도 똥물이 묻었다.

양동이를 들고 있는 자 중에는 낯 모르는 건장한 사람도 섞여 있었다.

“너희들 깡패도 섞여 있지?”

은숙 언니가 소리쳤다.

"처음 보는 얼굴인데?"

그 소리를 듣자 한 놈이 양동이를 들고 뒷문으로 도망쳤다.

“야, 이 더러운 놈들아, 우리가 아무리 가난해도 똥물을 먹고살지는 않았다.”

영자의 피울음소리가 새벽하늘 멀리 퍼져나갔다.

“너희들이 이런다고 우리가 투쟁을 멈출 것 같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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