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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목교

1978년-1980년 언저리

by 서완석

제13화 유신의 그늘(2)

대형 방적기와 방직기들이 늘어선 작업장에서 인옥이는 천을 짜는 직포과에 근무하고 있다. 그녀는 1분에 140보, 거의 뛰는 수준으로 기계와 기계 사이를 돌아다니며 실 잇는 작업을 해야 한다. 1일 3교대로 하루 8시간씩 노동을 하므로 야간고등학교에 다닐 수 있는 등 공부할 여건이 생기지만, 12시간씩 일하는 다른 여공들에 비해 그만큼 노동강도는 세다. 그래서 휴식은 엄두도 못 내고, 교대할 사람이 없어서 화장실 갈 틈도 없다. 어찌어찌해서 겨우 화장실을 다녀오더라도 기계가 가동을 멈추고 그대로 서있는 경우가 많다.

그럴 때마다 조장은 “야! 너 뭐 하는 년이야! 기계가 서버렸잖아?”라고 소리를 지르면서 난리를 치기 마련이다. 인옥이가 “죄송해요, 화장실이 너무나 급해서”라고 변명을 해보지만, 아무 소용이 없다.

“그러니 물을 최소한으로만 마시고, 만일의 경우를 대비하여 기저귀를 차고 근무하랬잖아”


설상가상으로 똥물 투척 사건으로 여공들의 노조 사무실 점거가 시작되자 회사 측은 음식물 공급을 막고, 공장 화장실 문까지 못을 박아 폐쇄했다. 따라서 인옥이가 본관 화장실까지 다녀오려면 시간이 지체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인옥이는 기본적인 생리현상까지 통제하는 이런 비인도적인 회사를 당장이라도 그만두고 싶지만, 시골에서 자기가 보내는 돈만 바라보고 있는 엄마와 동생들을 생각하면 그럴 수도 없는 노릇이다.


공장 내부 온도가 30도 이하로 떨어지면 실이 끊어져 버린다. 따라서 이를 막기 위해 공장 내부는 섭씨 40도에 육박하는 온도를 유지해야 한다. 그러므로 반팔셔츠를 입고 있어도 숨이 턱턱 막히며, 함박눈 같은 뽀얀 솜먼지가 작업복에 수북하게 쌓이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콧등에까지 내려앉는다. 그리고 여공들이 가장 힘들어하는 것이 한증막 같은 더위 속에서 운동화를 신고 일하는 데서 오는 땀띠와 무좀이다. 인옥이는 가려움을 참을 수 없을 때, 운동화를 벗고 맨발을 시멘트 바닥에 북북 문지르곤 한다. 그러나 잠시 가려움이 사라지는 듯하지만, 시멘트 바닥에 긁힌 상처가 주는 고통과 또다시 찾아오는 가려움은 정말 견디기 어렵다. 땀띠는 인옥이의 등과 목덜미 심지어 얼굴까지 올라오고 있다.


그리고 자정이 가까울 무렵 어김없이 몰려오는 졸음도 견디기 어렵다. 뺨을 때려보고 기합 소리를 내봐도 소용이 없다. 이럴 때는 옆에 있는 친구가 꼬집어 주는 것이 하나의 의리처럼 여겨지고 있다. 인옥이의 팔뚝은 이미 시퍼렇게 멍이 들어 있고, 잠을 자지 못해 얼굴색은 노랗고, 눈은 새빨개져 있다. 게다가 공장에서 나는 굉음 때문에 고무로 만든 귀마개를 하고 있다 보니 옆 사람의 말소리도 알아들을 수 없어서 조장이 내리는 작업명령 등은 호루라기를 이용하고 있다.

조장이 호루라기를 불었다. 드디어 식사 시간이다. 주어진 시간은 30분이지만, 20분 이내에 돌아오지 않으면 조장으로부터 욕지거리를 듣는다. 인옥이는 식당까지 전속력으로 달렸다. 그러나 퉁퉁 부은 다리는 맘대로 움직여지지 않는다. 밥이 입으로 들어가는지 코로 들어가는지 모르게 먹고 작업장으로 돌아와도 휴식 시간은 꿈도 꾸지 못한다. 인옥이는 다시 실 잇는 작업을 하느라 이리저리 뛰어다녀야 한다. 그녀가 이러한 고통을 견딜 수 있는 유일한 힘은 직장 동료의 권유로 성당에 나가면서 알게 된 한국 가톨릭 노동청년회(JOC), 또는 도시산업선교회의 소모임에 나가는 것이다. 거기에서는 같은 처지에 놓여 있는 사람들과 어울려 이야기도 할 수 있고, 쉴 수 있으며, 위로도 받을 수 있다. 인옥이는 정치가 무엇이고, 경제는 어떻게 돌아가는지, 사상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모른다. 그러나 도시산업선교회와 가톨릭 노동청년회에 나가면서 그들이 스스로 ‘일동대학교’라고 부르는 소모임에서 배움의 갈증을 풀고, 세상을 배워나갈 수 있다. 예를 들어, 국어, 영어, 한문, 꽃꽂이 등을 배울 수 있고, 탈춤반, 연극반 활동을 통해, 공장에서 쌓인 스트레스를 풀고 자아를 발견하는 시간을 가질 수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근로기준법, 노동조합법 등을 공부하면서 자신들을 보호해 줄 법이 존재하고 있음을 알게 되면서 노동조합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인식하는 계기기 된 점은 인옥이가 가장 자랑스럽게 여기는 것이다. 암흑 같던 미래의 검은 천이 벗겨지고 밝은 세상으로 나갈 수 있으리라는 희망이 생겼기 때문이다.


1972년에 생긴 회사 내의 여성노동조합은 회사의 인사관리를 대신해 줄 정도의 힘을 가지고 있어서 인옥이가 기댈 수 있는 큰 나무 같은 존재다. 그래서 실 만드는 공장인 정방에 근무하는 연순이, 희정이 언니와 함께 열심히 노동조합 활동을 하고 있다. 또한 이번 똥물 투척 사건에 분개한 나머지 플래카드를 들고 시위를 했다. 그들은 전임 여성 노조 집행부가 식사 시간 확보, 남녀 임금차별 철폐, 환풍기 설치, 생리휴가 등을 쟁취해 내는 것을 지켜보았기 때문에, 이번에도 사건 주모자를 잡아 처벌하고 여성 노동자들의 권리가 향상되리라고 굳게 믿고 있다. 몇십 년 동안 남성 노동자들이 주체가 되어 운영되어 오던 노조가 여성 노조 위원장이 들어서면서 남성 노동자들의 영향력은 현저히 줄어들었다. 따라서 인옥이는 남성 노동자들의 상대적 박탈감이 클 것이라고 보고 있다. 여성노조 집행위원장이 노조비 지출 내역을 공개하고, 현장 활동을 강화하며, 생리휴가, 회사창립기념일 유급휴가, 기숙사 온수시설 설치 등의 성과까지 내자, 향후 남성 중심의 노조가 들어설 길은 거의 봉쇄된 것으로 봐도 무방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문제는 반도상사, YH무역 등에도 여성 지부장이 선출되면서 중앙정보부가 민주노조를 와해시키려고 한다는 소식이 들려오고 있다는 점이다. 중앙정보부는 1972년에 일동방직 노조에 여성 노조위원장이 당선되자 자신들의 명령과 지시 아래 일사불란하게 통제·관리가 가능했던 섬유노조연맹 체계에 균열이 생긴 것으로 보았다. 그런데 두 번째 여성노조 집행부 체제에 이어 이번에도 여성집행부가 들어설 가능성이 매우 높은 것으로 보고 있다. 따라서 중앙정보부는 일동방직 노동조합 대의원 선거에 적극 관여하지 않으면 안 되겠다는 결심을 굳힌 것으로 보인다. 만일 이번에도 여성집행부가 들어선다면 더 이상 중앙정보부 등이 섬유노조연맹을 통제·관리할 수 없고, 이러한 현상이 전국적으로 번진다면 큰일 난다는 위기의식 때문이다. 그렇다면 중앙정보부는 물론이거니와 경찰도 한통속이 되어 남성 노동자 중심의 노조 집행부가 들어서는 것을 적극 지지하고 조력할 가능성이 매우 크다.


"일동방직 문제 해결하라! 똥을 먹고살 수는 없다!!"


강당 안은 숨이 턱턱 막힐 정도로 덥다. 징과 북소리에 맞춰 여공들은 구호를 외치며 땀범벅이 된 얼굴을 연신 닦고 있다. 시간이 어느 정도 흘렀을 때, 강당 앞에 걸었던 플래카드를 떼어 든 참가자 수백 명이 행진을 시작했다. 인옥이도 미영이, 순덕이, 영자, 연순이, 그리고 희정이와 함께 맨 앞줄에 섰다. 건물은 이미 영등포경찰서 기동 경찰과 사복경찰 사오백 명이 포위하고 있다. 구경꾼들 뒤로 차들이 경적을 울리며 되돌아 나갔다. 시위 참가자들은 2층 강당에서 계단을 통해 1층으로 내려갔다. 그리고 현관 앞에서 경찰과 마주쳤다. 정희는 2층에서 이 광경을 안타까운 마음으로 바라보고 있다.


시위 참가자들이 현관 앞에 이르자, ‘작전 개시’라는 명령과 함께 방패를 든 경찰들이 곤봉을 휘두르며 시위대를 향해 달려들었다. 사복경찰까지 합세한 경찰은 참가자들의 머리끄덩이를 잡거나 바지춤을 잡아 쥐고 옆구리를 주먹으로 가격했다. 여기저기서 “어이구! 이놈들이 사람 잡는다”, “안돼!”, “하지 마!”하고 외치는 처절한 소리가 들려왔다. 정희는 어찌할 바를 몰라 발만 동동 구를 뿐이었다. 가진 것은 없어도 까르르까르르 웃으며 점심을 같이 나누고, 호떡을 사서 나눠 먹던 언니와 동생들이 비참하게 끌려서 호송차에 짐짝처럼 실리는 장면을 바라보니 정희의 눈에서 주르륵 눈물이 흘러내렸다. 정희는 근무하는 장소가 2층 사무실과 1층 작업장이라는 차이만 있을 뿐 똑같은 노동자인데 누구는 펜대를 잡고, 누구는 기계를 돌린다는 차이로 인해 저런 대접을 받는구나 싶어 세상은 정말 모순덩어리라는 생각을 했다.


사실 정희는 일동방직에 조순화라는 도시산업선교회 여성 목사가 위장취업을 해서 6개월간 노동자들의 삶을 체험하고 간 사실을 알고 있다. 이러한 사실을 회사가 알게 되면 난리가 날 것이고 그러한 사실을 알고도 묵인한 자들을 색출해 내서 해고할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알기에 지금까지 입을 닫고 있다. 그리고 조목사가 생생한 노동 현장을 체험하고 공장 노동자들에게 그들이 누려야 함에도 누리지 못하는 권리가 있음을 알려줌으로써 노동 현장이 조금이라도 바뀔 수 있는 계기를 만들어주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다. 다행스럽게도 조목사는 체험을 끝내고 나가 도시산업선교회의 소그룹 활동을 통해 한문으로 된 근로기준법이나 노동조합법을 알기 쉽게 설명함으로써 그들을 깨우침의 길로 이끌어주고 있다.

며칠 전, 똥물 투척 사건이 벌어지기 전에도 일동방직 민주노조 4년 차인 1976년, 회사는 중앙정보부 노사문제 담당자들의 지휘·감독 아래 남성 노동자들을 사주하여 공포 분위기 속에서 대의원 선거를 치름으로써, 남성 노동자들을 대거 대의원으로 진출시키는 작업에 돌입했었다. 그들은 먼저 민주노조 측에서 개최한 대의원대회에 집단으로 불참해 네 차례나 회의를 무산시킨 후, 기숙사 출입문에 대못을 박아 여성 노동자들의 출입을 봉쇄하고, 기숙사 강당 문을 걸어 잠갔었다. 그리고 남성 노동자 대의원 24명만으로 대의원대회를 개최하였었다.

이에 분노한 여성 노동자들은 기숙사 유리창을 깨고 2층에서 뛰어내리거나 출입문을 부수고 나와 파업 농성에 돌입하였다. 회사는 정문을 걸어 잠그고, 음식물 공급을 막았으며, 화장실마저 못을 박아버리는 등의 천인공노할 만행을 저질렀다. 그러나 여성 노동자들은 결코 흔들리지 않았다. 그리고 농성 사흘째 되는 날에 방석복과 곤봉으로 무장한 전투경찰대의 강제해산이 시작되었다. 그때 시위대 중에서 누군가가 외쳤다.

“벗고 있는 여자 몸에는 경찰 아니라 누구도 손을 못 댄단다!”

시위대는 누구랄 것도 없이 브래지어와 팬티만 남기고 옷을 벗어 버렸다. 그리고 반나체로 팔짱을 끼고 경찰에 맞섰다.

“대의원 이상의 주동자만 내놓으면 다른 사람들은 귀가시킬 것이다. 그러니 경찰에 협조하라”

당황한 경찰이 메가폰을 들고 외쳤다.

“주동자? 우리 모두 주동자니 우리 모두를 잡아가라”

“무릎을 꿇고 사느니 서서 죽기를 원한다”

시위대는 물러설 기미를 전혀 보이지 않았다.


잠자코 사태를 지켜보고 있던 이상우 관리부장이 경찰들에게 노조 간부를 손가락질로 지목했다. 그러자 경찰은 지목된 노조 간부들에게 달려가 닥치는 대로 곤봉을 휘두르고 머리채를 잡아 질질 끌고 갔었다. 결국 72명이 연행되었다. 이러한 알몸 시위는 어느 언론에도 보도되지 않았다. 그러나 민주파인 여성 노동자들은 어용 노조세력과 맞서 싸워 1977년에 새 집행부를 탄생시키고 다시 여성을 노조위원장으로 당선시켰다.

그러자 중앙정보부와 회사 측에서는 민주파 지도부를 도시산업선교회와 가톨릭노동청년회 등의 종교계 노동단체에서 교육받은 빨갱이로 몰기 시작했었다. 그러나 두 단체는 공산주의와 달리 매우 보수적인 단체였다. 그런데도 이 두 단체를 언론 보도를 통해 공산주의자 단체로 몰아감으로써 조합원들의 분열을 획책하려 들었던 것이었다. 그러나 조합원들이 분열하기는커녕 똘똘 뭉치자, 최후의 수단으로 똥물 투척 사건을 획책하였던 것이다. 그래서 어용노조원들이 방화수통에 똥물을 담아서 들고 노조 사무실에 뛰어 들어오며 외쳤던 소리가 “이 빨갱이 년들아”였던 것이다.

1972년 유신체제 수립 후, 박정희 정권은 국가의 안보와 효율성을 명분으로 개인의 자유와 민주주의를 억압하고 있다. 그리고 '빨갱이'라는 딱지는 이러한 독재 통치를 정당화하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하고 있다. 정부에 비판적인 지식인, 민주화 운동가, 학생, 노동운동가, 그리고 심지어 종교인까지도 '빨갱이' 또는 '용공(容共) 분자'로 몰아 체포, 고문, 투옥하는 데 이 용어가 무분별하게 사용되고 있다. 이는 정치적 반대파를 침묵시키는 가장 효과적이고 쉬운 수단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대통령에게 절대적인 권한을 부여한 긴급조치들이 연이어 발동되면서, 정부 비판 행위 자체를 '체제 전복 기도'로 몰아가는 공포 분위기가 조성되고 있다.


학교에서는 철저한 반공 교육이 이루어지고 있고, 공산주의의 잔혹성을 강조하는 교육 자료와 구호가 넘쳐나고 있다. 학생들은 어릴 때부터 '빨갱이'는 멸해야 할 악이라는 인식을 주입받고 있다. 반공 글짓기 대회, 반공 웅변대회, 반공 사생대회, 반공 표어 짓기 등등 ‘반공’은 그냥 일상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신문, 라디오, 텔레비전 등 모든 대중 매체는 정부의 통제 하에 반공 메시지를 반복적으로 송출하고 있고, ‘빨갱이는 우리의 주적’이라는 인식이 일상 용어처럼 굳어졌다. 또한 '빨갱이'라는 단어는 감시와 신고를 장려하는 분위기를 만들었다. 이웃끼리 서로를 의심하고 감시하게 만드는 사회적 분위기 속에서, 이 용어는 사람들 간의 연대를 끊고 사회를 쉽게 통제하는 데 사용되고 있다.


결론적으로, '빨갱이'는 단순한 이데올로기 용어를 넘어 권력이 국민을 통제하고 반대파를 제거하며 공포를 확산하는 데 사용하는 강력한 정치적 무기인 것이다.

“아이고! 저 '빨갱이'년들을 어떻게 해야 하나?"

출근해서 의자에 앉자마자 관리부장 이상우는 거북선 담배 한 개비에 불을 붙여 연기로 하얀 동그라미를 만들어 보이며 짜증이 난 소리를 했다.

“정희야! 노루모 한 봉지와 물 한 컵 가져와”

“경찰서장 하고 중정 놈들 술대접하느라고 속이 쓰려 죽겠다.”

관리부장은 음주 후 숙취해소를 위해 일양약품이 내놓은 제산제와 소화제가 섞인 파우더(가루약) 형태의 위장약 '노루모(Norumo)'를 통째로 사놓고 작은 네모 용지에 한 숟가락씩 담아 포장해 놓고 먹고 있었다. 물론 포장 담당은 정희의 몫이다.

“경비는 내 판공비에서 썼으니 그렇게 알고 처리해”

이상우는 정희에게 영수증 몇 개를 툭 던졌다.


정희는 이 영수증들이 가공의 영수증이거나 부풀려진 영수증으로 이상우가 절반은 떼어먹고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특히 권력기관에 대한 접대는 공식적인 기록을 남기지 않기 위해 현금으로 이루어지므로 어제 정희에게 접대비로 받아 간 현금 일부를 이상우가 먹었을 것임은 두말할 나위조차 없다는 것을 정희는 안다. 이상우는 이를 '정치적 보험료' 또는 '사업 안정을 위한 필수비용'이라고 포장해 말하곤 한다. 정희는 이런 일이 있을 때마다 영수증 부풀리기나 위조 사실을 알면서도 이상우의 지시나 압력 때문에 이를 묵인하고 장부에 기재해야 하는 자신의 처지가 너무 싫었다. 자신 역시 횡령의 공범이 되거나, 최소한 그 행위를 은폐하는 역할을 강요받고 있기 때문이다.


정희는 자신이 회사에서 쫓겨나지 않으면서도 정의를 실현하는 방법이 무엇일지 고민하다가 겉으로는 회사 규율을 따르는 듯 보이지만 내부적으로는 노동자들에게 결정적인 도움을 주는 '정보의 중개자'이자 '은밀한 기록자' 역할을 수행하기로 마음먹었다. 즉 자신의 목표는 자신을 보호하면서 동시에 노동자 투쟁의 명분을 강화하고 회사의 부당함을 기록하는 것에 있다고 생각했다. 정희는 이것만이 현실적인 생존전략을 동반한 ‘지능적이고 은밀한 정의 실현’ 일 수 있다고 생각했다.


정희 자신에게 가장 강력한 무기는 정보이다. 회계 및 인사 정보를 다루므로, 이를 노조 측에 전략적으로 전달할 수 있다. 그리고 해고당한 노조원들의 근무 평가, 근태 기록, 임금 내역 등에서 흠잡을 데 없는 깨끗한 자료를 몰래 복사해 노조 측 변호인이나 외부 지원 단체에 전달할 수도 있다. 이를 통해 회사가 내세우는 근무 태만 등의 해고 사유가 허위임을 입증하는 데 결정적인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이다. 또한 관리부장이 경찰이나 중정 직원에게 제공한 접대비의 과다 계상 기록이나 비자금 처리 방식을 파악하고, 영수증 사본, 계정 조작 기록 등과 같은 증거를 확보할 수도 있다. 이는 회사의 도덕성을 공격하고 부당 노동행위를 폭로할 강력한 무기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노조 측이 회사와의 복직 투쟁이나 손해배상 소송을 진행할 경우에 대비하여, 회사가 노조 탄압을 계획하거나 지시한 회의록, 내부 메모 등을 은밀히 기록하고 보관할 수도 있다.


또한 정희는 자신의 업무 영역에서 노동자들의 피해를 최소화하는 방식으로 정의를 실현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예를 들어, 해고된 노조원들의 퇴직금 정산 과정에서 징계금, 손해배상금 등 회사가 부당하게 공제하려는 항목이 있다면, 합법적인 회계 원칙을 내세워 최대한 유리하게 산정되도록 서류 작업을 할 수도 있다. 그리고 회사에서 노조 관련 문건이나 노조원들에게 유리할 수 있는 자료를 파기하라는 지시가 내려왔을 때, '장부 정리 중'이나 '감사 대비' 등의 이유를 들어 파기를 지연시키거나, 핵심 자료의 사본을 확보한 후 원본을 파기할 수도 있다.


정희는 마지막으로 가장 안전하면서도 역사적으로 의미 있는 자신의 역할은 자신의 개인 일기장이나 비밀 노트에 똥물 사건의 구체적 날짜와 가해자, 관리부장의 접대 대상과 내용 등 자신이 목격하거나 알게 된 부당한 사실을 객관적이고 상세하게 기록는 것이라 생각했다. 이 기록은 훗날 이 사건을 증언할 수 있는 가장 확실한 '시간의 화석'이 될 수도 있으니까 말이다. 그리고 정희는 앞으로 회사 내에서는 철저히 중립적이거나 심지어 회사 편인 척 행동하여 의심을 피하기로 했다. 이상우의 지시에는 겉으로 복종하되, 자료 처리에 있어서는 최대한 노동자들에게 피해가 가지 않는 '합법적인' 선을 유지하며 버텨내려는 것이다.


그런데 정희를 괴롭히는 것이 하나 있는데, 자신이 똥물 사건이라는 끔찍한 탄압 현장에서 창문 뒤에 숨어 있는 목격자 역할에 머물렀다는 것이다. 이는 직접적으로 위험을 감수하고 연대하여 투쟁하는 여공들의 용기와 대비되기 때문이다. 특히 해고되지 않기 위해 상사의 지시와 회사의 규율을 따르는 척한 것은 원칙적인 정의 실현 대신 개인의 안위를 우선시한 비겁한 행위로 비칠 수 있다는 점이 괴로웠다.


정희는 이 과정에서 자신이 어떻게 하는 것이 가장 현명한지, 그리고 자신이 결심한 바가 옳은지 알아보기 위해 영등포도서관을 찾아갔다. 그리고 우순이로부터 책을 많이 읽고, 좋은 책을 골라 주는 사서를 소개해 달라고 해서 그녀의 도움을 받았다. 사서가 추천한 책은 앨버트 허쉬만(Albert O. Hirschman)의 '이탈, 발언, 충성'(Exit, Voice, and Loyalty, 1970)이었다. 정희는 그 책에서 이야기하고 있는 핵심적인 내용 세 가지를 자신의 경우에 대입해 보았다.


'이탈' 전략은 자신이 조직을 떠나거나 관계를 끊는 행위이다. 즉 당장 회사를 그만두고 자신의 윤리적 부담을 회피하는 것이다. 이는 개인적 평화를 얻을 수 있지만, 부당함을 시정하는 데는 아무런 영향도 미치지 못하며, 내부 정보의 유출 경로가 완전히 차단되어 노동자들에게 가장 불리한 결과만 초래한다고 생각되었다. 그래서 정희는 이탈을 거부하기로 했다.


'발언' 전략은 조직 내부에 머물면서 조직의 비효율성이나 부당성에 대해 직접적으로 항의하거나 비판, 개선을 요구하는 행위이다. 정보를 기록하고 유출하거나 내부에 남아 시스템의 취약점을 공격하는 것이다. 가장 위험하지만 가장 지속적이고 효과적인 방법이다. 정희는 이 전략이 자신이 결심한 바와 딱 들어맞는다고 생각했다.


조직의 비효율성을 알면서도 떠나거나 비판하지 않고 묵인하며 남아 있는 행위는 어떨까? 부당함을 알고도 자신의 안정만을 위해 침묵하고 회사의 지시를 맹목적으로 따르는 것이다. 정희는 양심상 도저히 이 전략은 따를 수 없기에 거부하기로 했다. 즉, 겉으로는 회사에 순응하는 척 하지만 내면의 윤리적 충성을 노동자들의 정의 실현에 바치기로 했다.

정희가 생각하기에 허쉬먼의 이론은 자신의 행위를 단순히 ‘비겁함’으로 치부하는 대신, 극단적인 상황에서 한 개인이 시스템 내부에 남아 변화를 유도하려는 가장 전략적이고 지능적인 ‘발언’ 형태로 해석할 수 있는 강력한 틀을 제공하는 것 같았다. 그래서 안전을 위한 ‘충성’의 외피를 쓰되, 그 안에서 정의를 위한 '발언'의 실천을 택하는 편이 좋을 것 같았다. 그러자 정희의 내적 갈등도 어느 정도는 사라진 듯했다.

이상우 관리부장은 똥물 투척 사건이 일어난 후, 경찰이나 중앙정보부 사람들과 협력하여 똥물 투척에 항의하며 단식 농성을 벌인 여성 노동자들을 포함하여 120여 명 이상의 노동자를 집단 해고했다.

"해고된 년들, 다시는 이 회사에 발을 붙이지 못하도록 할 거야. 그리고 중앙정보부에서는 이년들이 다른 회사에도 취업하지 못하도록 블랙리스트를 만들어 모든 회사에 뿌리기로 했어, 그러니 너도 회사 방침에 적극 협조하고 그년들과 회사 밖에서도 절대로 접촉하면 안 돼! 알았어?"

"네! 알겠습니다."

그러나 정희는 집에 돌아가서 자신이 보고 들은 바를 일기 형식으로 기록하였다. 그리고 관련 자료는 이중으로 만들어 훗날 피해자들의 재판에 유리한 자료들은 집으로 가져가 보관하기로 했다.

오늘은 수업이 있어 글쓰기를 하지 못할 것 같습니다 오목교 다음 편은 내일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이번 13회는 수아를 등장시킬 예정입니다.

그리고 글에 나오는 동방방직을 일동방직으로 수정했음을 이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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