받아들여야 할 세대 차와 그러지 못한 세대 차

by 서완석

언제부터인가 제자들과 노래방에 가는 것이 싫어지기 시작했다. 남들로부터 노래 못한다는 소리는 들어 본 적이 별로 없는 것 같아서 노래방 가는 것이 그리 싫지는 않았는데 왜 이러는 것일까 하고 곰곰이 생각해 본 적이 있다. 그리고 내가 노래방을 싫어하게 된 이유 몇 가지를 찾아냈다.


첫째는 자막을 보지 않으면 노래를 부를 수 없게 되었고, 둘째는 세월이 갈수록 내 노래를 따라 부르는 제자들이 점점 줄어들면서, 내가 노래라도 부를라치면 어서 내 노래가 끝나기를 바라는 눈치가 엿보이며, 셋째는 내가 즐겨 부르던 노래의 제목이 쉽게 떠오르지 않고, 넷째는 시간이 갈수록 자꾸 두꺼워져 가는 노래방 책자에서 내가 부를 노래를 찾아내기가 쉽지 않다는 것이다.


언젠가 80을 바라보는 은사님을 만난 적이 있는데 그분께서 “나는 젊은 시절 나보다 먼저 살아 간 사람들과는 전혀 다른 삶을 살 수 있을 거라고 믿었어. 그러나 어느 순간 나도 그들과 똑같은 궤적을 밟고 있는 것을 알게 되었고 살아가는 일에 대해서 겸손해져야겠다 싶었지.” 남들보다 젊게 살려면 늙고 있는데도 늙지 않게 보이려는 수고를 필요로 하나보다. 젊은이들의 노래를 배우는 일도 그 중 하나일 터이지만 쉽지 않을뿐더러 감흥이 안 생기니 어쩌랴.


참 어려운 말


올해 초 나와 같이 근무하는 교수 한 분이 학생들이 글을 남기는 사이트가 있는데 나에 관한 글도 올라와 있더라는 말을 하며 내용은 얘기 해주지 않으신 채 자꾸 웃으시기만 했다. 호기심 반, 걱정 반으로 그 분이 말씀하신 사이트에 접속을 한 적이 있다. 거기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올라 있었다.


“고시반에 들어가려면 어떤 조건이 있다든지, 들어가면 ‘을 해야 한다.’ 는 의무가 생기든지 하는 게 있나요? 아니면 그냥 독서실 한자리 확보 하는 건가요?

서완석 교수님 포스가 보스몹 같아서 ×× 무서운데....

교수실에 쳐들어가려면 탱커 세우고 파티로 들어가야 할까요?”


××부분은 속어라서 이글에서는 임의로 ××이라고 처리하였으며, 맞춤법상 틀린 부분을 고치되 가급적 원문 그대로 옮겨 적은 것이다. 나에 관한 글은 그 이외에도 몇 개 더 있었지만 모두 해독이 가능했고, 나를 칭찬하는 글들이어서 솔직히 기분이 좋았다. 그러나 위의 글은 글을 남긴 익명의 학생이 내가 지도교수를 맡고 있는 고시관에 입실할 수 있는지를 묻는 것 같기는 한데 보스몹이 무엇인지, 내 교수실에 탱커 세우고 파티로 들어온다는 말이 탱크를 몰고 들어와서 파티를 열겠다는 것인지, 아니면 어떤 다른 의미가 있는지 궁금해 죽을 지경이었다.


다음 날, 나는 궁금증을 참지 못하여 강의하는 도중에 위와 같은 말이 모 사이트에 올라와 있는데 무슨 뜻인지 아느냐고 물었더니 학생들 대다수가 박장대소를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나는 학생들이 웃는 이유를 모른 채 눈만 껌벅여야 했다. 심지어 어떤 학생은 “교수님, ‘눈팅’도 하시는 군요. 교수님께서 그 사이트 ‘눈팅’하시는 것을 다른 학생들이 알면 교수님에 관한 글 올리지 않을 걸요” ‘눈팅’이라는 말도 낯설었지만 ‘들어가 보다’라는 의미가 아닐까 하는 짐작은 하겠는데 여전히 보스몹, 탱커, 파티 등의 말은 해독이 불가능했다.


다행히 몇몇 학생들이 이러한 용어들이 어떤 게임에서 쓰이는 용어라는 말과 함께 나를 비난한 것이 아니라 긍정적인 의미로 말한 것이라 해서 비로소 안심(?)을 했다. 그러나 평소 식당에 가서 복지리, 대구지리 등과 같이 지리((ちり)라는 일본식 말만 들어도 알레르기 반응을 일으키고 대중매체에서 일본식 말이 나오거나 맞춤법이 틀린 경우를 발견하면 홈페이지를 찾아 꼭 지적하고 가야 직성이 풀리는 나로서는 여간 당황스러운 일이 아니었다. 그 순간만은 똑같은 한글 문화권에 살면서 문맹이 되어 버린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덕분에 보스몹이라는 별명이 하나 더 생겼지만 갈수록 불통의 시대가 두려워진다.


대드는 젊은이


얼마 전 내가 근무하는 학교의 복도에서 한 학생이 피우던 담배꽁초를 바닥에 비벼 끄는 것을 보았다. 우리나라는 2005년에 WHO가 발의한 담배규제기본협약(FCTC)을 비준을 했으면서도 화장실이나 건물에 달린 계단, 버스 정류장 등의 공공장소에서의 흡연에 대해 매우 관대하다. 내가 공부한 미국의 경우, 건물내부는 물론 공공장소에서의 흡연을 전면적으로 금지하고 있고, 이를 위반하는 사람도 거의 찾아 볼 수 없으며, 심지어 복도 바닥에 꽁초를 버리는 경우는 한 번도 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나는 그 학생을 불러 크게 혼을 냈다.


바로 부근에서 아주머니 한 분이 열심히 청소를 하고 계셨기 때문에 더욱 그러했다. 그런데 순간 이러다 이 학생으로부터 봉변을 당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어 멈칫하고 있는 내 자신을 발견했다. 하필 며칠 전 모 대학교 화장실에서 어떤 여학생이 청소하고 계신 아주머니께 보통 사람으로서는 상상할 수 없는 패륜적 행위를 했다는 소위 ‘패륜녀’사건이 벌어진 때였다. 다행스럽게도 그 학생은 다소곳한 모습으로 내 꾸중을 듣고 난 후 꽁초를 주워 쓰레기통에 버린 후 “죄송합니다.”라는 말을 남긴 후 쏜 살 같이 도망쳤다.


소크라테스가 살던 시대에도 어느 성전의 벽에 “요즘 젊은 것들이란....”이라고 소위 싸가지 없는 젊은이들을 탓하는 글귀가 적혀 있었다고 하니 싸가지 없는 젊은이는 이 세상에서 문명이라는 것을 만들어 질서를 통해 구성원을 통제하려고 한 때부터 존재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요즘과 같이 어른이 젊은이들로부터 내몰리는 문화에는 일정 부분 우리 기성세대들이 책임이 있다고 본다. 사람은 본만큼, 읽은 만큼, 들은 만큼의 범위 내에서 생각하고 행동하기 마련이다. 자연을 호흡하고, 항상 타인과 소통하며, 타인의 사랑을 느껴본 사람들만이 타인을 존중할 줄 알고 질서에 순응할 줄 안다. 우리 기성세대가 그들을 경쟁으로만 내몰고, 타인과 소통할 수 있는 기회를 봉쇄한 결과는 아닌지 생각해 볼 일이다.



[출처] 대한민국 정책브리핑(www.korea.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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