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감독 방식’과 ‘신독’ 그리고 ‘공정한 사회’

by 서완석

22년 전만 하더라도 일반인이 해외에 나가려면 유학, 출장, 취업과 같은 특별한 목적이 있음을 입증해야 했고, 순수한 관광 목적의 출국은 허용되지 않았었다. 그러다가 1989년 1월 1일부터 관광 목적의 출국 허용 연령기준이 철폐되면서 전 국민 해외여행 자유화 조치가 시행되었다. 그리고 1989년 11월 9일 저녁 9시 베를린 장벽이 붕괴되었다.


그런데 1990년 여름에 운 좋게도 제자와 함께 그토록 어렵던 해외여행을 할 기회를 얻었다. 소위 배낭여행이라는 것이었는데 정부는 국민들의 의식수준이 낮다는 판단을 해서인지 소양교육이라는 것을 받고 나가도록 했다. 소양교육 내용 중에 아직도 기억나는 것이 있는데, 외국에서 친절을 베푸는 사람은 무조건 피하고 보라는 것이었다. 아마도 외국물정을 모르는 배낭여행족들의 등을 치는 자들이 있을 것이라는 정부당국의 친절한 배려였을 것이다. 이 말이 틀리지만은 않았던 것은 기차를 타고 도착한 어느 동구권 국가의 역 앞에 진을 치고 있던 암달러상들이 여행객들에게 다가와 은행보다 좋은 조건으로 환전을 해주겠다며 달러를 받고서 환전해주는 척하다가 갑자기 ‘폴리스(Police)’라고 외치며 도망치는 경우가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반드시 그런 것만도 아닌 것이 영국의 도버해협을 건너 벨기에의 오스땅드역에 도착했을 때 아주 잘 생긴 금발의 청년이 다가와 여행 중에 만나 친해진 우리 한국인 일행을 안내해주겠다며 친절을 베푼 일 때문이다. 나와 제자를 제외한 일행들 대부분은 그의 친절을 외면하며 피했는데 나는 왠지 그 사람을 믿고 싶었다. 이야기를 나누어 보니 한국 출신 유학생과 결혼한 직업군인이었다. 자기는 아내의 나라 사람들을 사랑하며 자신에게 가이드를 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다면 220여명이 넘는 한국 사람의 가이드를 할 수 있다고 했다. 그는 왈론어를 쓰는 지역 사람들보다 플레미쉬어를 쓰는 사람들이 훨씬 멋지다며 브뤼셀에 가봤자 별 것 없으니 브뤼헤라는 곳을 구경하라며 친절히 안내해주었고, 그의 아내와 통화도 할 수 있게 해주었다.


우리 일행이 그녀의 집을 방문해도 좋으냐고 물었을 때 “of course”라고 큰 소리로 외치던 그녀의 목소리가 20여년이 지난 지금도 생생하다. 나는 그녀와 그녀의 남편을 통해 벨기에라는 나라에도 서로 다른 언어를 쓰는 서로 다른 감정을 지닌 사람들이 살고 있음을 알게 되었고, 고국이 그리워 우리가 끓여줄 수 있느냐며 가져간 라면 다섯 봉지를 압수한 그녀가 “당신들이야 곧 한국으로 돌아가지만 저는 남편과 싸웠을 때, 고국이 그리울 때, 고국에 계신 부모가 그리울 때 라면을 끓여먹어야 한다”며 맛있는 스테이크를 구어 고춧가루를 듬뿍 쳐주던 모습에서 한 인간에게 체득된 문화적 습성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 지 알 수 있었다.


그런데 정작 내가 하고자 하는 이야기는 영국 런던의 기차역에서의 일이다. 기차를 타고자 표를 끊고 들어가는 데 개찰구라는 곳이 없었다. 개찰구가 없으니 당연히 지키는 사람도 없었다. 표를 들고 황당한 모습으로 서 있으면서 사람들이 어찌하나 보아하니 네모진 모양의 작은 기계 속에 자기가 구입한 표를 집어넣었다 빼는 동작을 하고서 플랫폼으로 들어가는 것이었다. 표를 사지 않고 기차를 타더라도 들키지만 않으면 큰 문제가 생기지 않을 테니, 가난한 배낭여행객들에게는 아주 달콤한 유혹이 될 것 같았다. 나중에 알고 보니 이는 영국인들이 자랑스럽게 내세우는 ‘무감독 방식(honour system)’의 일종이었다. 영국이라는 나라의 국격이 그렇게 높아 보일 수 없었다.


이 시스템은 영국의 학교 시험장에서 감독하는 교사나 교수가 없이도 부정행위를 하지 않고 정직하게 자기 실력대로 시험답안을 쓰고 나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하는데, 중세의 기사도 정신뿐만 아니라 신사도의 자격을 갖춘 자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하니 참 부러웠다. 어느 자리에 있는지, 얼마나 가졌는지, 얼마나 화려한지 등으로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얼마나 깨끗한지, 얼마나 존경받는지, 얼마나 선한지, 얼마나 사람다운지, 얼마나 인간을 존중하는지 등으로 평가하는 시스템이니 시공을 초월하는 도덕과 정의감이라는 보편적 가치에 가장 충실한 시스템이라고 할 수 있다. 어느 책에서 읽었는지 잘 기억이 나지 않지만 서양에서 거짓말과 배신은 동의어로 쓰이며, 그들이 쓰는 ‘미안하다’라는 말 속에는 우리가 건성으로 던지는 미안하다는 말의 의미를 훨씬 뛰어넘어 책임을 지겠다는 도덕적 의지가 담겨 있다고 한다.


도덕이라는 것은 시공을 초월하는 일반적이고 객관적인 성질을 띠지만 법이라는 것은 반드시 그렇지만은 않다. 우리가 자주 쓰는 말 중에 ‘법 없이도 살 사람’이라는 말이 있다. 평생 법의 심판을 받을 일을 저지르지 않고 살 정도로 착한 사람이라는 의미이니 아주 좋은 사람이라는 말이다. 그런데 요즘 이런 사람은 현실 사회에 매우 둔감한 사람이며 멍청한 사람이라는 말로 이해되는 세상에 살고 있다. 다시 말해 ‘법 없이도 살 사람’이라는 말은 매우 도덕적인 사람이지만 현실세계와는 어울리지 못해 기회주의적이고, 잔머리 잘 굴리며, 법의 허점을 매우 잘 아는 사람들로부터 항상 당하고 사는 사람을 의미하기도 한다.


그렇다면 이 ‘무감독 방식(Honour System)’은 우리에게는 찾아볼 수 없는 색다른 제도이던가? 물론 아니다. 우리 조상들은 ‘신독(愼獨)’이라 하여 다른 사람과 함께 있을 때는 물론이거니와 혼자일 때라도 도리에 어긋나는 행동이나 생각을 하지 않는 마음과 태도‘를 강조하였으니 이보다 더 ‘Honour System’과 어울리는 말도 없을 것이다. 사실 우리 마음이라는 것은 자유분방하고 단속하기가 매우 어렵다. 그래서 법이라는 시스템을 통해 개개인이 가진 자유분방한 마음들을 단속하고자 하는 것인데 법이라는 것은 구멍이 너무 많아 인간의 도덕심이 보완해주지 않으면 안 되는 매우 불완전한 시스템이다. 하지만 우리가 살고 있는 복잡한 현대사회는 익명성이 강조되어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아도 되는 경우가 너무 많기에 도덕만으로 규율되기를 기대할 수 없고 마냥 개개인의 양심에 기댈 수만도 없다. 그러다 보니 시스템 개혁을 통해 규율하는 방식을 택하는 것이다.


내가 퇴근길에 반드시 거쳐야 하는 내부순환도로의 월곡 램프는 상습체증 지역으로 끼어들기가 기승을 부리는 곳이다. 3킬로 정도는 족히 될 정도로 길게 늘어서 있는 차들 틈바구니로 끼어드는 차를 볼 때 장시간 기다리고 있던 내가 느끼는 열패감은 이루 말할 수 없다. 뿐만 아니라 룰을 지키는 것이 옳다고 생각해 시간과 에너지를 낭비하며 기다리는 다수의 사람들에게 룰이라는 것이 매우 거추장스럽고 손해만 준다는 사고를 심어줄 수도 있다. 나는 개인적으로 복잡한 현대사회에서 의식개혁을 부르짖는 것보다 차라리 시스템을 바꾸는 것이 더 효과적이라는 견해를 가지고 있다. 어느 택시운전자의 말처럼 마장램프와 월곡 램프 사이에 램프 하나를 더 만들거나 CCTV를 설치하는 것도 하나의 방법일 것이다.


그러나 역시 남이 안 보는 데서도 자신의 행동을 조심하는 ‘신독’의 정신이 보완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라는 데 이견을 제시하는 자는 없을 것이라 본다. 그런데 이것도 우리 사회에 존경받는 사람들이 많아지고 그들이 더 대접을 받는 사회가 될 때 더욱 빛을 발할 텐데, 왜 우리 사회는 그런 자들이 더 손해를 본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더 많은 것일까? 답은 매우 간단하다. 그렇지 못한 자들에게 우리가 너무 관대하기 때문일 것이다. 나보다 남을 위한 사람들이, 자신의 영달보다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사람들이, 불의에 눈감기보다 정의를 위해 목숨을 바친 사람들이 더 대접받는 사회가 공정한 사회이다.


[출처] 대한민국 정책브리핑(www.korea.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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