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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목교

1978년-1980년 언저리

by 서완석

제16화 숙희(2)


겨울로 들어가는 초입이라 길거리에 노란 은행잎이 수북하게 떨어져 있었고, 사람들은 은행을 밟아 똥 냄새를 맡을까 싶어 조심스럽게 걸음을 옮기고 있다. 시멘트 담벼락을 타고 올라간 마른 담쟁이덩굴이 찬바람에 바스락 소리를 냈다. 이 골목의 집들은 대개 비슷한 모양새다. 양평동 허름한 슬레이트집 연탄아궁이에서 새어 나온 듯한 퀴퀴한 냄새가 골목 전체를 휘감고 있었다. 그러한 집들 사이로 유난히 큰 양옥집 하나가 눈에 띄었다. 커다란 대문 앞에 조성철 선생이 섰다. 육중한 남색 대문에는 사자 머리 모양의 손잡이가 달려 있었다. 그는 조심스럽게 초인종을 눌렀다.

"누구세요?"

안에서 50대 정도의 아줌마 목소리가 들리더니 한참 있다가 대문이 열렸다.

"아이고 선생님 아니세요? 어서 오세요."

"안녕하세요? 아주머니."

조 선생은 오랫동안 이 집을 드나든 듯, 익숙한 태도로 아줌마와 인사를 나누고 대문을 들어섰다.


"사모님! 선희 선생님 오셨습니다."

벨벳천으로 만든 롱 로브(Robe)를 실내복 위에 걸친 선희 어머니가 실내화를 신은 모습으로 나타나 조 선생에게 고개를 까딱하며 인사를 했다.

"오셨어요? 선희는 제 방에 있습니다."

조 선생은 90도로 허리를 굽혀 선희 어머니에게 인사를 한 후, 선희의 방을 노크했다.

"선희 잘 있었니?"

"학교에서 뵌 지 얼마 되지 않았으니, 무슨 일이 있었겠어요?"

선희는 조 선생을 그리 반기는 눈치가 아니었다.

"자, 오늘도 공부를 좀 해보자. 내일 일제고사가 있으니 더 열심히 공부해야 할 것이다. 우선 산수 문제를 풀어보자."

조 선생은 일제고사에 나올만한 문제를 계속해서 선희에게 제시하며 국어, 사회, 자연 과목 등을 합쳐 두 시간 동안 연습시켰다. 중간에 아줌마가 과일 그릇을 들고 잠시 들렀을 뿐 오직 두 사람만의 시간이었다.

"내일 꼭 1등을 해야 한다. 네 아버지가 의사이시니까 너도 꼭 의사가 되어야 해. 네 어머니께서도 그걸 간절히 바라고 계셔."

"저는 화가가 되고 싶은데요? 그런데 우리 엄마는 자기가 화가면서 왜 저한테는 의사가 되라고 하는지 모르겠어요. 나는 그림 그리고 있을 때가 가장 즐겁고 행복하거든요."

"의사가 되면 돈도 많이 벌고, 사회적으로 존경도 받지 않니?"

"그래도 전 싫어요. 우리 아빠 병원에서 나는 냄새도 싫고, 거기 가면 맨날 얼굴 찡그린 사람들 밖에 없어서 싫어요."

"여하튼 내일 시험 잘 치러야 한다."

조 선생은 선희의 어깨를 도닥여 준 다음, 방문을 열고 거실로 나왔다.


"선생님 수고 하셨습니다. 여기 사모님 드리라고 고려당 빵을 좀 사놓았어요. 일부러 종로 본점까지 다녀왔어요."

"아이고! 이거 너무 황송해서 어쩌지요?"

"일제고사 전날이라 오늘 특별히 신경을 더 썼습니다."

조 선생이 또 어리를 조아리며 말했다.

"네! 그래서 선희 아빠도 특별히 하나밖에 없는 딸이라 노심초사하고 있습니다."

"명심하겠습니다."

"그 반에서 선희를 앞설만한 아이는 누가 있나요?"

"네! 도균이라는 남자애가 있는데 선희랑 엎치락뒤치락하며 경쟁하고 있습니다."

"도균이네 아버지는 뭐 하시는 분이에요?"

"네, 중학교에서 사회를 가르치고 계신 선생님입니다."

"지난번 반장 선거에서 우리 선희를 이긴 아이죠?"

"네, 그렇습니다."

조 선생은 죄라도 지은 양 다시 고개를 숙였다. 베이커리 상자를 든 그의 손에는 빵의 무게가 아닌, 후원자의 기대를 충족시키지 못한 교사의 비굴함이 짓눌러져 있었다. 그렇지만 그 베이커리 상자 안에는 적지 않은 돈이 들어 있음을 조 선생은 알고 있다.

"그때 선생님께서 학생들이 눈치채지 못하도록 선희를 띄워주었더라면 충분히 반장이 되었을 텐데, 한 표 차라니 아휴 분해!"

조선생은 베이커리 상자를 든 채 어찌할 바를 모르는 모습이었다.


"엄마는 내가 반장이 되는 것이 그렇게 중요해?"

갑자기 선희가 나타나며 제 엄마에게 대들 듯이 말했다. 선희 어머니는 당황한 모습이었다.

"공부나 할 것이지 어른들 대화하고 있는데 왜 끼어드니? 왜 그렇게 예의가 없어?"

"엄마는 딸의 행복은 중요하지 않지?"

"요 계집애가 못 하는 소리가 없어, 어서 들어가서 공부하지 못해?"

"난 의사 같은 것은 되기 싫으니 알아서 해."

선희가 뾰로통한 모습으로 방으로 들어갔다.

"아유 저 못된 것, 하는 짓이 꼭 제 아빠 닮았어요."

"아이고 이제 저는 가보겠습니다."

어서 이 집에서 탈출할 기회만 보고 있던 조 선생이 인사를 했다. 그러나 선희 어머니는 마지막까지 끈을 놓지 않았다.

"지난번에 제가 생선 장사한다는 아줌마한테서 심한 모욕을 당해 아직도 분이 풀리지 않았어요. 그 아줌마 딸하고 우리 선희가 같이 놀지 못하도록 선생님께서 각별히 신경을 좀 써주세요."

"네, 명심하겠습니다."

선희네 집을 나온 조 선생은 터덜터덜 집으로 가는 쪽 버스정류장을 향해 걸어갔다. 그의 걸음걸이에는 패배자의 힘없는 기색이 역력했다.


오늘은 일제고사를 치르는 날이다. 이 시험은 아이들의 학업 성취도를 넘어, 학교의 평가와 서열, 그리고 교직원 개개인의 인사고과를 결정짓는 중대한 사건이기에, 교장, 교감, 그리고 담임 교사들은 저마다 숨 막히는 압박감을 감수해야 한다. 언론에서는 일제고사가 전국의 모든 학생을 대상으로 동일한 문제로 학력을 평가함으로써 여러 교육적 문제점을 낳고 있다고 연일 비판하고 있다. 그중에서도 가장 큰 비판은 평가 결과가 학생과 학교의 서열화를 조장하여 과도한 경쟁을 유발한다는 것이다. 이로 인해 교육 현장은 점수 올리기 위주의 주입식· 암기식 교육에 치중하게 되고, 학생들의 전인적 성장이나 창의적 사고를 기르는 본래의 교육 목표가 퇴색되었다고 한다. 또한, 공교육만으로는 시험 대비가 어렵다는 인식이 퍼지면서 과외(사교육)가 성행하여 학부모의 경제적 부담을 가중시키는 결과를 초래한다는 비판도 받고 있다. 결국, 일제고사에 대한 비판의 초점은 기초 학력 진단이라는 본래의 취지를 잃고 성적 경쟁을 부추기는 비교육적 제도라는 것이다.


교실에서 조 선생은 문제를 풀고 있는 선희와 도균이 옆을 번갈아 가며 둘을 비교하고 있었다. 숙희는 선희 옆자리였으나, 그들 사이에는 가방과 책이 놓여 경계선을 만들고 있었다. 숙희는 선희 답을 보고 싶은 마음이 추호도 없다. 자신은 선희와 다른 부류의 사람이라는 것을 애초에 마음에 품고 있었고, 곰소댁 역시 숙희에게 공부 잘할 것을 강요한 일이 없었기 때문이다. 숙희는 평생 숙제만 잘하면 잘 살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세상에서 제일 예쁜 엄마가 시장에서도 학교에서도 남들에게 꿀리지 않고 사는 모습이 너무 멋있어서 앞으로 꿈은 엄마 같은 사람이 되는 것이었다.


일제고사의 마지막 종이 울렸다. 교실에는 해방감 대신 눅진한 침묵이 감돌았다. 아이들은 지친 얼굴로 교실을 나섰다. 숙희는 묵묵히 책가방을 챙겨서 교실을 나와 집으로 가기 위해 정문을 나섰다. 오늘도 '복음자리 교회' 공부방에 가기 위해서였다.

"숙희야."

선희였다. 늘 당당하던 걸음걸이는 온데 간데없고, 선희가 불안하게 서 있었다. 선희는 숙희를 쳐다보지 못하고 바닥만 응시했다.

"같이... 같이 집에 가자."

선희의 목소리는 미세하게 떨렸다. 두 아이는 말없이 학교 정문을 나섰다. 찬바람이 불어닥쳤지만, 그들 사이에 흐르는 침묵은 외부의 추위보다 더 차가웠다. 선희는 마침내 숙희를 올려다보았다. 그녀의 눈에는 오랫동안 숨겨왔던 수치심과 후회가 가득 차 있었다.

"숙희야! 내가 정말로 너한테 사과하고 싶어."

선희는 말을 이었다. "내가 지난번에 반장 선거 때, 네가 도균이 찍은 표를 접어서 투표함에 넣는 것을 봤어. 나는 네가 바로 옆자리에 앉은 나를 찍어줄 것으로 생각했는데, 그 장면을 보니 네가 갑자기 너무나 미워졌어. 그래서 오랫동안 속으로 너를 미워했고, 너한테 해서는 안 될 말을 했던 거야."

선희는 숨을 골랐다. "얼마 전에 아빠 서재에 있던 문학 전집에서 김유정의 '동백꽃'을 읽었어. 거기서 점순이가 소년에게 감자를 주면서 '느 집에 이거 없지?'라고 말하며 턱을 들었다 놓는 장면이 나오는데, 그 오만함과 무시가 너무 미웠어. 그때 깨달았지. 내가 너에게 했던 말이 바로 그 점순이의 행동과 같았다는 걸."

선희는 숙희의 손을 조심스럽게 잡았다. "정말 미안해. 내 사과를 받아줄래?"

숙희는 처음 들어보는 책 이름이었지만, 선희가 자신에게 진심으로 사과하고 있다는 것만은 확실히 느낄 수 있었다. 숙희의 기분이 아주 좋아졌다.


"나 너희 집에 놀러 가도 될까?"

선희의 갑작스러운 말에 숙희는 매우 당황했다.

"아니! 그게....."

"네가 싫다면 안 갈게."

"아니, 그게 아니고.... 엄마한테 여쭤봐야 할 것 같아서."

"그래 그렇다면 너희 엄마가 장사하시는 데 가서 허락받고 가자."

"알았어."


"워메 이게 누구 당가?"

"이 예쁘장한 숙녀님은 얼매 전에 학교에서 봤던...."

"네 맞습니다. 저 선희예요. 그날 너무 죄송했고, 지금까지 제가 숙희에게 못되게 굴었던 것 용서해 주세요."

"암시랑토 안혀. 아무 꺽정 말어. 공부도 잘 허고, 이쁘고, 부잣집 따님이 우리 숙희랑 친구랑게 월매나 좋은지 모르겄는디? 그렁게 그런 소리 하덜 말어."

"감사합니다. 그런데 제가 오늘 숙희한테 집에 놀러 갈 수 있느냐고 물었더니 엄마한테 물어봐야 한다고 해서 여기 왔어요."

"그려? 그런디 우리 집은 너무 누추해서 안 되고 오늘은 이 아줌마가 맛있는 순댓국을 사줄팅게 먹고 나종에 우리 집에 놀러 와. 어뗘?"

"네! 좋아요. 저도 순댓국 먹어보고 싶었어요."

곰소댁은 좌판을 잠시 고창댁에게 맡기고 선희와 숙희를 데리고 최사장네 집으로 갔다.


잠시 후, 최사장이 펄펄 끓는 순댓국과 머리고기 한 접시를 가지고 왔다. 선희는 이 세상에 태어나서 처음 먹어 보는 음식이다. 곰소댁이 순댓국 먹는 법을 알려주었다.

"선희야, 여그다가 새우젓을 조금 넣고, 매운 걸 좋아허면 이 다진 양념을 조금 넣고 먹어도 되는디 어떨까 모르겄다. 들깻가루 허고 후추도 마찬가지여. 우덜 어른들은 그렇게 먹는디 어떻게 헐텨?"

"그래야 더 맛있어." 숙희가 능숙하게 양념을 섞으며 말했다.

선희는 평생 엄마의 엄격한 감독 아래 무균실처럼 깨끗한 음식만 먹어왔다. 이 순댓국은 그녀에게 '허락되지 않은 세상' 그 자체였다. 그녀는 조심스럽게 숟가락을 들어 올렸다. 그리고 숟가락이 입술에 닿자마자 느껴지는 뜨거운 충격에 하마터면 숟가락을 놓칠 뻔했다. 허겁지겁 입안으로 밀어 넣은 국물은 온몸에 진한 열기를 퍼뜨렸다.

그 맛은 충격이었다. 그녀가 알던 깔끔한 세상과는 완전히 달랐다. 돼지 뼈의 고소하고 텁텁한 맛, 순대 특유의 묵직하고 비릿한 듯 진한 풍미, 그리고 들깻가루가 만들어 낸 구수한 흙내음까지. 그 모든 맛이 섞여 입안에서 거친 폭풍을 일으켰다.

"세상에! 이렇게 맛있는 음식도 있다니."

"우리 엄마는 떡볶이, 순대, 번데기, 붕어빵, 달고나, 쫀디기 이런 것 절대 못 먹게 해요. 더럽대요. 그러니 애들이 먹는데 나는 지켜보고만 있어야 해요. 너무 먹고 싶은데. ..."

선희는 크게 한숨을 쉬었다.

선희가 내뱉는 감탄과 한숨에 옆에서 지켜보던 최사장이 빙그레 웃었다. 선희는 다시 숟가락을 떴다. 칼칼한 매운맛이 구수한 맛을 더 선명하게 만들자, 선희의 미간이 찌푸려졌다가 이내 따뜻한 미소로 바뀌었다.

"숙희야, "

선희가 입가에 묻은 국물을 닦으며 말했다.

"이거... 진짜 맛있다."

그것은 단순한 음식 평이 아니었다. 그것은 어머니의 통제와 어른들의 가치관으로부터 벗어나, 순수하고 진실한 세상의 맛을 처음으로 인정하는 선희의 해방 선언이었다.

"아줌마는 성적과 돈이 최고라고 생각해요?"

선희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공부 잘 허문 좋제. 그리고 돈도 많으면 좋은 거 아녀?" 곰소댁이 현실적으로 답했다.

"하지만, 우리 예쁜 아가씨가 책에서 배웠다는 것처럼 사람답게 사는 것이 가장 중요한 거여."

곰소댁은 따뜻한 눈으로 두 소녀를 바라봤다.

"나는 우리 선희랑 숙희가 사람 차별은 말고 살기를 간절히 바랄 뿐이여. 하늘의 별을 생각해 봐라 잉. 어떤 별은 크고 밝고, 어떤 별은 작고 희미허지? 그런디 만약에 우리가 '저 별은 작으니까 필요 없어!'라고 말한다면 어떻게 될 것 같어?"

"세상이 많이 어두워질 것 같은데요?"

숙희가 답했다.

"맞아, 엄마! 선희 말이 맞아." 숙희도 동의했다.

"그렇제? 세상에 쓸모없는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어. 모도 다 자기 헐 일이 있고, 그걸 통혀서 서로 돕고 사는 거여. 공부 잘 허는 사람은 공부 잘 허는 것으로, 빵 맹그는 사람과 자동차 고치는 사람은 그 기술로 딴 사람 도와주며 사는 거여. 차별은 우리가 서로에게서 배울 수 있는 기회를 뺏어 가버리는 거여. 알아 먹겄냐?"

"맞어! 맞어!" 최사장이 곰소댁을 거들었다.

"아줌마 이야기는 따로따로 있을 때보다 그것이 모여 있을 때 재미있고 아름다운 세상이 된다는 거죠?" 선희가 수육 한 점을 새우젓에 찍어 먹으며 물었다.

"그라제! 그라제!" 곰소댁과 최사장이 동시에 웃었다.

"아줌마! 이제 우리 엄마 미워하지 않는 거예요?" 선희가 용기를 내 물었다.

"내가 지금까장 뭐라고 말혔냐? 네 엄마 고등어 한 마리 자시고 싶으문 나헌티 올 거 아녀? 나허고 우리 숙희 아프면 네 아빠 병원 가야 헐 것이고, 네 엄마 우리 핵교 좋은 핵교 맹글라고 노력허면 느들 좋을 거 아녀? 다 서로 도와가며 사는 거여."

선희와 숙희의 뚝배기 속 국물이 다 없어졌다.

"아줌마! 저 자주 여기 놀러 와도 돼요?"

선희의 눈이 빛났다.

"아먼! 그렇고 말고!"

"아니 오늘 장사는 고만허는 거여?"

고창댁이 들어오며 소리쳤다.

"아녀! 아녀! 야들 인자 보내고 나갈 거여."

"아따! 고놈들 이쁘게도 생겼다. 최사장님! 이런 딸 갖고 싶지 않어?"

고창댁이 최사장을 의미심장하게 바라보며 눈을 흘겼다.

"나야 갖고 싶지, 근디 나만 원헌다고 되는 일이간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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