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8년 -1980년 언저리
제18화 정희와 민우(1)
3월 19일에 1978년 말 치러진 선거결과로 구성된 제10대 국회가 정식으로 출범했다. 그리고 4월 1일에는 율산그룹이 파산하고, 전 대표 신선호가 업무상 횡령 및 외환관리법 위반 혐의로 구속되는 사건이 있었다. 1974년 9월 20대 중반의 젊은이들이 '율산실업'이라는 오퍼상으로 시작한 회사는 불과 4년여의 짧은 기간에 건설, 무역(종합상사), 해운, 알루미늄 등 계열사 18개를 거느리고 다양한 분야로 급속히 확장하면서 종업원이 8000명이나 되는 재벌로 탈바꿈했다. 따라서 세간에서는 율산그룹을 '재계의 신데렐라'로 불렀다. 파산 직전에 계열사가 14개에 달했으니 그럴 만도 하다. 율산그룹은 수출입국을 경제발전의 모토로 삼고 있는 박정희 정권의 정책에 부응하여 한국기업들의 손길이 미치지 않던 중동시장에 진출하여 엄청난 돈을 벌었다. 그런데 기존의 대형회사인 신진알루미늄을 인수하고 율산건설을 창업하는 등 거침없이 뻗어가던 율산그룹은 신선호 회장이 괴한들에게 납치되는 등 여러 의혹사건에 휘말리면서 결국 부도를 맞았다.
파산 원인을 두고는 '재벌들의 견제'라는 말도 있고, '정치권의 음모'로 희생되었다는 주장도 제기되고 있다. 그러나 급속한 문어발식 확장 과정에서 약 1,523억 원에 달하는 과도한 금융권 대출에 의존하며 자금난이 심화된 것도 있지만, 정경유착, 즉 정권과의 관계 및 정책적 압력 등의 복합적인 요인이 작용했다는 분석이 힘을 얻고 있다. 율산파산사건은 정부의 지원과 금융권 대출에 과도하게 의존하여 내실 없이 외형만을 확장하는 방식의 위험성을 보여준 대표적인 사례라고 할 수 있다. 급격한 성장의 이면에 정부의 육성 정책과 금융 지원이 있었으나, 위기가 닥쳐왔을 때에는 가차 없이 해체되는 모습을 보여주면서, 정부 주도 경제 성장 모델의 어두운 면이 여지없이 드러난 것이다.
한편, 4월 13일에는 가발 수출업체인 YH무역 종업원 약 500명이 회사 측의 일방적인 폐업 통보에 항의하며 농성을 벌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4월 14일에는 강원 정선군 신동읍의 대한석탄공사 함백광업소에서 화약이 폭발하여 광부 26명이 사망하고 38명이 부상당하는 대형 사고가 발생했다.
정희가 근무하고 있는 일동방직은 YH무역 사건이 초미의 관심사다. 관리부장 이상우도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정보를 수집하느라 정신이 없다. 1966년 설립된 YH무역은 한때 종업원이 4,000명에 달하는 국내 최대의 가발 수출 기업으로 성장했다. 그러나 창립자 장용호가 회사의 이윤을 무리한 사업 확장과 개인적인 해외 외화 도피에 사용하면서 경영은 급속도로 악화되었다. 이 과정에서 회사 측은 저임금과 장시간 노동에 시달리던 여성 노동자들에게 불법 해고, 부당 전직 등을 일삼았다. 이에 노동자들은 자신들의 권리를 지키기 위해 1975년 전국섬유노조 YH지부를 결성하고, 민주적 노조 활동을 전개하며 회사와 협의를 시도했다. 그러나 올해 들어 가발산업이 쇠퇴하고 경영난이 심화되자, 회사 측은 노동자들과의 어떠한 합의나 대책 제시 없이 4월에 일방적인 폐업공고를 발표했다. 따라서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던 187명의 여성 노동자들은 밀린 임금조차 받지 못한 채 길거리에 나앉을 위기에 처하게 되었다.
"정희야! YH무역에서 데모가 일어났다는데 알고 있니?"
이상우가 책상 위에 구둣발을 올려놓은 채 담배를 피워 입에 물고 회전의자에 앉아 좌우로 의자를 까딱까딱 돌리며 물었다.
"네! 들어서 알고 있어요."
"자칫하면 우리 회사에 다시 불똥이 튈 수 있으니 철저히 대비해야 해. 그러니 여공들과 어울려 밥을 먹거나 쉴 때 그들이 어떤 움직임을 보이고 있는지 내게 보고해. 그리고 여공들이 화장실에서 비밀 이야기를 하는 경우가 많으니 혹시 볼일을 보다가 엿들은 게 있는 경우에도 즉각 내게 보고해. 알았지?"
정희는 수치심이 들었다. 그러나 이상우가 어떤 사람인지 너무나 잘 안다. 관상은 과학이라고 했던가? 오늘따라 그의 가늘고 힘이 약한 눈, 얇은 입술, 비웃는 듯 처진 입꼬리, 좁고 뾰쪽한 그의 삼각턱이 너무 싫었다.
"네. 알겠어요."
정희는 이미 마음먹은 바가 있으므로 건성으로 대답할 뿐이었다.
일동방직 경영진은 '똥물 세례'라는 극단적이고 비인도적인 탄압으로 악명이 높았기에, YH사건이 자신들의 과거 행위를 다시 소환함으로써 언론이나 야당의 집중포화를 맞을 것을 극도로 두려워하고 있다. 다시 말해, YH사건으로 인해 노동자와 재야 단체의 투쟁 의지가 고양되고, YH무역 사건의 분위기를 타고 해고된 일동방직 노동자들의 복직투쟁이 더욱 적극화되는 것을 우려하고 있는 것이다. 1975년에 만들어진 YH무역 노동조합이 회사의 부당한 처사에 맞서 꾸준히 민주노조 활동을 전개해 왔다는 점, 그리고 주로 여성노동조합원들이 많다는 점 등은 일동방직 노동조합과 닮은꼴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일동방직 경영진의 우려를 이해할 수 있는 측면도 있다.
"언론 접촉을 최소화해야 하니 혹시라도 언론사에서 전화를 해서 나를 바꿔 달라고 하면 없다고 해. 그리고 해고노동자들의 동태도 계속 감시해야 할 것이고, 다시 분규의 빌미를 주지 않기 위해서는 복직 요구에 대하여 단호하게 거부해야 할 거야. 다시 말해, YH무역사건이 우리 회사에 영향을 미치지 않고 조용히 넘어가도록 하기 위해서는 방어적 대처를 해야 한단 말이지. 내 말 알아들었어?"
"그건 경영진이 알아서 하시겠죠. 저 같은 말단 직원이 할 일이 뭐가 있겠어요?"
"야! 그러니 경영진의 일원인 내가 너한테 이렇게 지시하고 있는 거 아니냐!"
관리부장이 '빽'소리를 질렀다. 정희는 움찔하는 모습을 잠시 보였지만 바로 평정을 되찾았다.
창가에 앉은 정희는 비가 내리는 창밖을 우울한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다. 귓가에 해고된 언니들의 울부짖는 소리가 들리고, 똥물을 투척하던 남성노동자들의 모습, 그리고 여성노동자들에게 곤봉을 내려치던 시위진압대의 모습이 떠올랐다. 정희는 두 손으로 귀를 막았다가 얼굴을 감싸기도 하면서 괴로워했다. 그녀는 회사에서 일어난 일을 정직하게 기록하여 해고된 노동자들이 복직소송에 대비하고 있다. 음울한 공포의 그림자가 그녀 주변을 감싸고 있지만, 눈빛만 마주쳐도 서로의 심장을 읽을 수 있었던 언니들을 떠올리며 정희는 두 손을 불끈 쥐었다.
뜨거운 열기와 섬유 먼지가 자욱한 생산동 5호 라인. 민우가 담당하던 낡은 자재 운반용 컨베이어 벨트가 갑작스러운 굉음과 함께 멈춰 섰다. 중요한 부품 중 하나인 특수 베어링이 마모를 이기지 못하고 산산조각 난 것이다. 생산 라인 전체가 정지되자, 작업반장 최 씨의 얼굴은 새파래졌다. YH무역 사건 이후, 경영진은 생산성 저하에 극도로 예민해져 있었다.
"야! 김성태! 너, 이거 안 보이냐? 생산이 멈췄잖아! 지금 같은 때에!" 최 반장이 기름때 묻은 손으로 베어링 조각을 가리키며 악을 썼다.
민우는 침착하게 대답했다. "반장님, 이건 특수 부품이라 재고가 없을 틴디유. 아마 관리부에 긴급 구매 요청을 올려야 할 겁니다유."
"알아! 그걸 모르겠냐! 관리부장님 오기 전에 당장 처리해야 한다! 어서! 네가 지금 당장 본관 관리부로 뛰어가! 긴급부품 구매요청서를 들고 가서 김정희 씨를 찾아!"
민우의 심장이 잠시 멈칫했다. '김정희'. 자신이 접근해야 할 가장 위험하고도 중요한 내부 협력자. 그는 침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것이 바로 그가 바라던, 가장 자연스러운 만남의 기회가 될 것 같았다.
함민우는 중앙대학교에서 경제학을 전공하던 학생이었다. 1970년대 후반, 캠퍼스에 불어닥친 사회 비판의 물결은 그를 단순히 책상에 앉아 이론을 논하는 지식인이 아닌, 현장으로 뛰어드는 실천가로 만들었다. 그는 이미 2년 전부터 ‘섬유 산업 노동 실태 조사회’라는 재야 그룹의 핵심 멤버로 활동하며 노동 야학을 이끌고 있었다.
YH무역 사건이 터지자 민우와 그의 동료들은 섬유업계의 상징적인 악명 높은 현장을 보호하고, 추가적인 탄압을 막아야 한다는 결론을 내렸다. 특히 ‘똥물 투척’이라는 비인도적인 전력이 있는 일동방직이야말로 정권과 자본이 다음번에 노동 운동의 씨앗을 말려버리기 위해 가장 잔혹한 수단을 쓸 가능성이 높은 곳이었다. 그들의 목표는 명확했다. 노조 지도부 재건을 지원하고, 회사의 비리와 부당 노동 행위의 증거를 확보하는 것이다.
1978년 말, 함민우는 '김성태'라는 가명을 쓰고 입사했다. 그리고 충청남도 예산군 대술면 출신이다. 그는 고등학교를 중퇴하고 돈을 벌기 위해 상경한 20대 초반 청년이라는 위조된 신분으로 일동방직 생산 라인의 설비 보조 및 자재운반직으로 들어왔다. 민우에게 가장 중요한 과제는 '티가 나지 않는 평범함'을 유지하는 것이다. 그는 자신을 철저히 노동자 계층에 동화시키기 위해 외모와 언행 전반을 바꾸었다. 또한 대학생 특유의 깔끔한 용모 대신, 머리는 짧게 깎고, 손톱은 늘 기름때가 묻은 채 거칠게 유지했다. 학력이 높은 사람이 티가 나는 깨끗한 손이나 안경은 바로 감시 대상이 되기 쉬웠기 때문이다. 옷차림 역시 마찬가지였다. 공장에서 지급하는 작업복 외에는 낡고 수수한 옷, 그리고 노동자들이 흔히 신던 고무신이나 낡은 운동화만을 고집했다. 튀는 색깔이나 유행하는 스타일은 감시자들의 눈에 띄는 불필요한 위험을 초래할 뿐이기 때문이다.
가장 위험한 순간은 대화할 때였다. 민우는 표준어를 쓰지 않고 어눌한 충청도 사투리를 사용하며 학력을 숨겼다. 그는 어려운 한자어, 정치적 용어, 혹은 논리적인 사고방식을 드러내는 것을 극도로 경계했다. 노동자들이 일상적으로 쓰는 비속어나 은어를 익혀 자연스럽게 섞어 쓰는 것이 그의 생존 방식이었다. 그리고 지적 호기심도 숨겨야 했다. 대학생 시절 탐독했던 책들은 공장 근처에 절대 들여놓지 않았고, 신문도 공장 사람들이 흔히 보는 스포츠지나 가십거리만 읽는 척했다. 누군가 시사 문제를 꺼내도, 그는 "아따, 나야 먹고살기도 바쁜디 그런 거까지 신경 쓸 겨를이 있겄슈?"라고 하며 우직한 노동자인 척 얼버무리고 빠져나오는 것이 습관이 되었다.
또한 과거의 자신과의 접촉은 철저히 차단했다. 가족이나 대학 친구들과의 연락은 비정기적이고 일방적이었으며, 발신지가 노출되지 않도록 공중전화를 이용했다. 연고지를 벗어나 생활하는 것은 기본이었다. 동료 운동가들과의 비밀 접선은 더욱 치밀했다. 그들은 다방이나 공원 같은 정기적인 장소를 절대 피했고, 만날 때마다 가명을 사용했다. 공공장소에서 메모를 하거나 주위의 이목을 끌 만한 격앙된 어조로 대화하는 것은 철저하게 금지되었다. 또한, 출퇴근 시에는 항상 뒤를 돌아보며 미행하는 사람이 없는지 확인하는 습관을 들여 '요시찰 인물'로 분류되는 것을 막기 위해 노력했다.
민우는 공장 내에서도 지나치게 눈에 띄지 않으면서도 신뢰를 쌓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그는 작업장에서 성실하고 우직한 노동자로 인정받아야 하므로 작업 능률이 너무 뛰어나 '기술자'로 인정받거나 사무직으로 전출되는 것을 경계하고 있다. 이는 현장 노동자와의 연대를 유지하는 데 방해가 되기 때문이다. 휴일에는 일부러 외로워하는 동료들에게 접근해 함께 등산이나 영화 관람 같은 '건전한' 활동을 주선했다. 이는 노동자들의 단결심을 은연중에 키우면서도, 회사나 공안의 감시망에는 단순한 친목 모임으로 보이게끔 위장하는 이중적인 목적이 있다.
민우의 삶은 이처럼 '김성태'라는 가상의 방패 뒤에서, 자신의 진실을 숨기고 노동자의 권리를 찾기 위한 기나긴 싸움의 연속이었다. 그의 손은 금방 굳은살로 뒤덮였고, 땀과 기름에 절은 작업복은 그의 대학생 시절 흔적을 완벽하게 지워주었다. 그는 공장의 거친 환경 속에서 누구보다 성실하게 일하며 감시의 눈을 피하는 데 성공했다. 밤이 되면, 노동자들이 모여 사는 합숙소 근처에서 조용히 그들의 이야기를 귀담아들었고, 회사가 제공하는 식사나 휴식 공간에서 노동자들의 불만을 파악하며 계속해서 동료나 간부들로부터 신뢰를 쌓았다.
민우는 잠입 후 며칠이 지나지 않아 한 가지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일동방직의 내부에는 '해고된 언니들의 복직'을 위해 비밀리에 정보를 모으고 있는 정희라는 여직원이 있다는 것이다. 사무실에서 일하지만, 노동자들의 곤경을 외면하지 않는 그녀의 존재는 민우에게 예상치 못한 희망이자, 가장 위험한 접촉 대상이었다. 관리부는 공장의 돈과 서류가 오가는 곳. 만약 정희가 확보하고 있는 자료를 민우가 가진 조직력과 연결할 수 있다면, 해고 노동자들의 복직 소송과 회사 비리 고발은 단순한 투쟁이 아닌 정의 실현이 될 터였다.
"저기! 김정희 씨유?"
"누구시죠?"
정희는 불쑥 사무실 문을 열고 들어 온 낯선 사내의 모습을 보고 물었다.
"지는 생산동 5호 라인에 근무하는 김성태인데유"
"그런데요? 무슨 일이시죠?"
민우는 맨날 공장에서 정신없이 뛰어다니며 작업하는 여공들만 보다가 사무실에서 일하는 정희를 보니 환한 달덩이를 보는 느낌이 들었다. 관리부는 정희가 사다가 꽂아 놓은 듯 사이다병에 몇 송이 꽃이 꽂혀 있고, 은은하게 커피 향 냄새가 난다. 민우는 기름냄새와 땀냄새 등 퀴퀴한 분위기의 공장과 너무도 달라서 위화감이 들었다.
"특수 베어링이 망가져서 긴급부품 구매요청서를 접수하러 왔구만유. 반장님이 저한테 댕겨오라고 했슈."
"잘 오셨어요. 제가 해야 할 일이네요."
민우는 정희가 매우 사무적으로 대할 것이라고 생각했던 터라 활짝 웃는 정희의 모습이 더할 나위 없이 예뻐 보였다.
"그런데 접수자의 성함을 누구라고 적을까요?"
"지 이름은 김성태유."
"김성태 씨?"
"야. 그렇구만유."
"저는 김정희예요."
"알고 있구만유."
"예? 제 이름을 알고 있다고요?"
정희가 놀란 표정을 지으며 민우를 바라봤다.
민우는 '아차' 싶었지만 애써 태연한 태도를 취하며 말했다.
"김정희 씨는 우리 공장 남자들에게 이쁜 것으로 소문이 나 있슈."
"에이 그럴 리가요. 괜히 흰소리 마세요."
"아따! 지가 밥을 안 먹는 것도 아닌디 밥묵고 허튼소리 허겄슈?"
정희는 얼굴이 발그레해진 얼굴을 감추기라도 하려는 듯이 고개를 숙였다.
"어서 서류나 주세요."
"여기 있슈."
"그런데 김성태 씨는 어디 김 씨예요?"
"워따! 그런 건 왜 묻는 데유?"
"제가 광산김가거든요."
"그류? 지도 광산김가면 커피 한잔 사주시는규?"
정희가 민우의 능글능글한 농담에 까르르 웃음을 터뜨렸다. 민우는 그 모습이 너무 좋았다. 칙칙한 공장에서 누렇게 뜬 얼굴의 여공들 모습만 보다가 밝은 정희의 얼굴을 보니 마치 봄날 피어난 한 송이 모란꽃을 보는 듯 아찔했다.
"지도 광산김가요. 우리는 결혼할 수 없는 사이유."
"네에? 그게 결혼하고 무슨 상관이 있다고...."
정희는 민우의 농담이 왠지 싫지 않았다. 그리고 민우는 의외로 쉽게 정희와 가까워질 수 있을 거라는 예감이 들었다.
"하기야 민법이 바뀌어서 동성동본끼리 혼인할 수 있는 날도 온다는 소리를 들었지만..."
혼잣말처럼 민우가 중얼거린 소리를 정희가 들었다.
"아니 공장에서 일하시는 분이 언제 또 민법까지 공부하실 시간이 있으시대요?"
민우는 아차 싶었다.
"우리 사촌형이 동성동본끼리 사랑허고 있는디 민법이 바뀌면 혼인할 수 있다고 허면서 엄청나게 기대허고 있슈."
"아! 진따로 그런 분들이 있기는 하군요?'"
정희는 의심하지 않는 눈치였다. 그리고 민우는 속으로 '휴'하고 가슴을 쓸어내렸다.
"자 이제 접수되었어요. 최대한 빠르게 부품조달이 이루어지도록 노력할게요."
"그라믄 커피 사주신다는 약속은 어떻게 되는규?"
"저는 약속한 일이 없는데요?"
"아따! 같은 광산김가끼리 커피 한잔도 못 헌단 것은 조상님들에 대한 도리가 아닌 것 같은디유?"
정희는 왜 이 사람이 이렇게 능글능글하게 접근하는 것이 싫지 않은지 자신도 잘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요. 시간 나면 한잔 해요."
"아이고 이렇게 기분 좋을 수가 없네유. 그럼 언제 마셔유?"
"성급한 바늘이 실을 끊는다는 말 몰라요? 공장에서 실 끊어지면 안 되는 것 아시죠?"
민우는 정희의 말에 할 말을 잃었다.
"부품조달이 끝나면 그때 마시도록 해요."
"웜마! 참말로 기분 좋네유. 그때 뵈유."
사무실 문을 밀고 나가는 민우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정희가 함박웃음을 지어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