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8년-1980년 언저리
제18화 민우와 정희(2)
다음 날 오후 3시. 민우가 다시 관리부 사무실을 찾아왔다.
“김정희 씨, 저 왔슈. 베어링은 어찌 됐슈? 생산라인이 멈춰서 지금 난리여유.”
정희는 민우를 반갑게 맞이했다.
“안녕하세요. 잠시 저기 앉아서 기다리세요. 마실 거라도 좀 드릴까요?”
“괜찮어유. 바쁘실 틴디... 근디 부품 조달 건은 어찌 됐남유?”
“김성태 씨, 죄송해요. 담당자가 부품을 구하느라고 아주 애를 먹었다고 하네요. 그런데 그 부품이 지금 우리 회사로 배송 중이어서 조금 시간이 걸려요. 30분쯤 걸린다는데 여기서 기다렸다 가지고 가실 건지, 아니면 공장에 가서 기다리실 건지 결정하세요.”
“지금 가봤자 헐 일이 없슈. 생산라인 전체가 멈춰버렸으니 뭔 헐 일이 있겄슈.”
“그래요? 그렇다면 커피나 한잔 마시면서 기다리세요. 제가 얼른 타 드릴게요.”
“그런 의도는 아닌디, 이거 죄송시러워서 어쩐데유?”
정희는 커피를 타기 위해 서둘렀다.
그때, 문이 열리면서 관리부장 이상우가 들어섰다. 의자에 앉아 있던 민우가 벌떡 일어섰다.
“어이, 김정희! 여공들이 잡담하는 거 내가 보고하랬지? 그런데 넌 누구야? 왜 생산동에 있어야 할 놈이 관리부에 앉아 있어?”
관리부장의 날카로운 시선이 민우에게 꽂혔다. 민우는 당황했지만, 침착하게 일부러 매우 겁먹은 듯한 표정을 지었다.
“특수 베어링 땜시 와 있슈.”
“특수 베어링이 뭐가 어쨌다는 거야?”
회사 밖에 나가서 YH무역 사건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살피고 돌아다니느라 생산라인이 멈춰 섰다는 사실을 까맣게 모르고 있던 관리부장은 눈을 부릅뜨며 물었다.
“특수 베어링이 마모를 이기지 못하고 산산조각이 났대요. 그래서 급하게 수소문해서 부품을 찾아냈고 지금 우리 회사로 그 부품이 오고 있어요.”
정희가 오히려 당황해서 어쩔 줄 몰라하는 것 같았다.
“그렇다면 지금 어떤 상황인데?”
“생산라인이 멈춰버렸슈.”
“뭐라고?”
민우는 관리부장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르는 모습을 보니 바짝 긴장되었다.
“그런 일이 있는데 왜 내게 보고 안 했어?”
관리부장이 정희를 바라보며 버럭 소리를 질렀다.
“어디 계시는지 알아야 보고를 드리지요. 부장님 자주 가시는 ‘정다방’ 박마담한테 전화했는데 거기 안 계신다고 하던데요?”
관리부장이 머쓱한 표정을 짓더니 다시 민우를 바라봤다. 민우를 위아래로 훑어보는 눈매가 아주 날카로워서 민우는 고개를 떨구며 짐짓 어리숙한 모습을 보이려고 노력했다.
“넌 이름이 뭐야?”
“김성태라고 허는디유.”
“너 멍청도 놈이야?”
“고향이라면 충청도인 데유.”
“부장님, 이분은 생산동 5호 라인의 김성태 씨예요. 중요한 특수 베어링 해외 조달 서류의 현장 확인 사인을 받고 보내려고 제가 기다리라고 했어요. 생산라인이 멈춰서 조달 부서가 난리법석이었어요. 나중에 저희가 책임질 일이 생길까 봐 절차대로 진행 중이었어요.”
침착하게 대응하는 정희의 모습을 보며 민우는 잠시 긴장했던 마음을 추스르고자 작업복을 매만졌다.
“야! 김성태, 네가 하는 일이 뭐냐?”
“생산라인의 설비 보조와 자재 운반을 맡고 있는디유.”
“너 학교는 어디까지 나왔어?”
갑작스러운 질문에 당황했지만 민우는 침착하게 대응해야 한다고 마음을 진정시키면서 대답했다.
“대술중학교를 졸업혔슈.”
“그게 어디 있는 학교인데?”
“충청남도 예산군 대술면에 있슈.”
“영어 잘해?”
“시골 촌구석에 있는 학교 나온 놈이 뭔 놈의 영어를 허겄슈. 그저 ABC 정도는 구별 헐 줄 알고, 굿모닝!, 생큐!, 유아 웰컴 정도는 헐 수 있슈.”
“손 좀 내밀어봐.”
민우는 손톱에 기름때가 가득 낀 손을 관리부장 앞에 내밀었다.
“요즘 다른 회사들은 위장취업자 때문에 골치를 앓고 있단 말이야. 우리 회사에도 그런 놈들이 들어오면 큰일 나. 너도 의심이 가는 놈들이 있으면 나한테 바로 뛰어와서 보고 해야 해. 알았어?”
“그럼유. 걱정 마세유.”
관리부장이 ‘태양’ 담배 한 개를 빼어 물어 불을 붙이더니 밖으로 나갔다.
민우는 두근거리던 마음이 서서히 진정되는 느낌이 들었다.
드디어 특수 베어링이 도착했다. 정희는 민우에게 서류 밑에 활자로 적혀있는 '인수자'란에 이름을 쓰라고 했다. 민우는 ‘김성태’라는 이름을 애써 또박또박 썼다. 정희는 때가 낀 민우의 손가락이 유난히 길고 예쁘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른 사람들은 사인을 하라고 하면 이름 위에 다시 이름을 휘갈겨 쓰는데 이름아닌 사인을 하는 것이 멋들어져 보였다.
“다 됐슈? 그럼 지는 이제 가도 되유?"
“휴... 죄송해요, 김성태 씨. 부장님 때문에. 그런데 사인이 아주 멋있어요.”
민우는 아차 싶었지만 침착하게 대응했다.
“아녀유. 배운 게 없으니 사인이라도 멋져야 헌다 싶어서 대학 나온 친구헌티 부탁혀서 수도 없이 연습헌거유. 그나저나 김정희 씨는 이런 복잡한 서류 혼자 처리 허느라 얼마나 힘들겄슈. 지는 생산동으로 얼른 가봐야 허겄어유.”
민우가 특수 베어링을 받아 들고 나가려는데 정희가 민우를 막아서며 말했다.
“부장님 때문에 커피도 못 마셨잖아요? 커피가 다 식었는데 다시 타드릴 테니 마시고 가세요.”
“아녀유. 그놈의 커피 개나 줘유. 어디 불안혀서 먹겄슈?”
정희가 갑자기 웃음을 터뜨렸다. TBC에 단역으로 출연한 김학래의 말투를 닮은 것도 그렇거니와 개나 줘버리라는 말이 충청도식 느린 말투와 어울리며 사람을 웃게 만드는 매력이 있었다.
“그렇다면 전번에 이야기 한 대로 광산김가끼리 커피 한잔 마시는 거 어때요?”
“대환영이유. 저야 싫다고 헐 이유가 있겄슈?”
“그럼 어디가 좋을까요? 쉬는 날이 언제지요?”
“지 겉은 생산직 노동자는 3교대 8시간 노동이고 잔업이 있는 날도 많으니 정확허게 말씀드릴 수 있는 날은 일요일 밖에 없는디 정희 씨가 어쩔랑가 몰라서유.”
“좋아요. 저도 일요일 하루 정도는 시간 낼 수 있어요.”
“그라믄 저는 회사에서 좀 멀리 떨어진 곳이 좋겄는디 어떤가유?”
“저도 그러고 싶어요. 남들 눈에 띄어 오해받고 싶지 않아요.”
“그라믄 연세대학교 부근에 있는 ‘독수리다방’은 어떤가유?”
“대학생들이 가는 다방이라 우리 같은 사람들이 가는 게 좀 그렇지 않나요?”
“아따! 그 사람들이나 우리나 별반 다를 거 있남유? 다 하늘 아래 살고 있슈.”
다시 정희가 웃음을 터뜨렸다.
“맞아요. 제가 괜한 자격지심이었네요.”
정희는 약속 시간보다 10분 먼저 도착했다. 평소 단정한 사무복이나 간편한 외출복 대신, 그녀는 회색 트렌치코트에 새로 산 듯한 옅은 분홍색 스카프를 두르고 있었다. 공장과는 완전히 단절된 공간에서, 사무직원 김정희가 아닌 20대 여성 김정희의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그녀는 유리창 너머로 다방 안을 살폈다. 독수리다방은 대학생들 특유의 자유롭고 활기찬 분위기로 가득 차 있었다. 구석 테이블에서는 몇몇 학생들이 신문이나 ‘TIME’ 지를 펼쳐 놓고 무거운 시사 이야기를 진지하게 나누고 있었다.
약속 시간이 되자, 민우가 다방 문을 열고 들어섰다. 정희는 그의 모습에 순간 숨을 멈췄다.
그는 공장에서 보던 꾀죄죄한 작업복 대신, 검은색 면바지와 약간은 낡았지만 깨끗하게 다려진 아이보리색 셔츠를 입고 있었다. 여전히 수수하고 투박한 차림이었지만, 기름때가 사라지고 헝클어져 있던 머리가 단정하게 정리되자 그의 뚜렷한 이목구비와 잘생긴 얼굴이 두드러졌다. 그의 손은 거칠었지만, 그녀의 기억 속 길고 예쁜 손가락은 여전했다.
민우는 잠시 주위를 두리번거리더니, 창가 쪽에 앉아 자신을 응시하는 정희를 발견하고는 특유의 느린 걸음으로 다가왔다.
“워메! 김정희 씨. 일요일에 만나니께 진짜 다른 사람 같구만유.”
“김성태 씨도요. 작업복 입은 모습만 보다가 이렇게 보니... 많이 다르네요.”
민우의 칭찬에 얼굴이 붉어진 정희가 맞장구를 쳤다.
“당연허쥬. 옷이 날개인디유. 지는 여기 대학생들 사이에 껴서 촌놈 티 날까 봐 걱정했슈.”
"촌놈이라니요? 이곳 분위기에 너무잘 어울리세요."
정말 그랬다. 정희가 무심코 넘겼지만, 민우는 '독수리 다방' 분위기와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어울리는 사람이었다.
두 사람은 테이블에 마주 앉았다. 웨이터가 주문받은 커피 두 잔을 가져다 놓았다. 쓴 커피의 향과 담배 연기가 뒤섞인 다방의 공기가 두 사람을 감쌌다.
“오늘은 부장님 눈치 안 봐도 되니까 좋네요. 솔직히 지난번에 부장님 들어오셨을 때 심장이 덜컥했어요.”
“그럼유. 지를 위장취업자로 의심하는 것 같어서 오줌 지릴 뻔했슈.”
민우의 과장된 충청도식 표현에 정희는 다시 한번 까르르 웃음을 터뜨렸다. 그녀는 민우가 의도적으로 자신의 불안감을 해소해주려 한다는 것을 어렴풋이 느꼈다.
“하하, 그래도 김성태 씨 중학교 졸업장에다가 예산군 대술면 출신이라는 이야기까지 들으니... 부장님 의심은 좀 풀렸을 거예요.”
“그려유. 지는 배운 것도 없고 뱃속 편하게 사는 게 최고인디, 괜히 신경 쓸 일이 많어유. 김정희 씨처럼 사무실에서 깔끔허게 일하는 게 제일 부러워유.”
민우는 커피잔을 들며 정희의 시선을 살짝 피했다. 그리고 자신의 낮은 학력과 단순한 삶을 강조하며, ‘대학생’이라는 진짜 정체와 정반대 되는 이미지를 공고히 했다.
정희가 커피 잔을 내려놓자, 민우는 몸을 앞으로 살짝 기울이며 목소리를 한층 낮췄다. 다방의 소음이 잠시 잦아든 틈이었다. 그의 얼굴에는 이전의 능글맞은 농담 대신, 진중하고 조심스러운 빛이 감돌았다.
“정희 씨. 사실 지가... 오늘 이렇게 뵙자고 헐 때부터 꼭 여쭤보고 싶은 거가 있었슈.”
“네? 뭐... 뭔데요, 김성태 씨?”
정희는 그의 갑작스러운 태도 변화에 순간 긴장했다. 민우의 시선은 그녀의 눈을 피하지 않고 있었다.
“정희 씨가... 회사에서 해고된 언니들 땜시 맘고생을 허고 있다는 말을 들어서유. 사무실에서 일하는 예쁜 아가씨가, 왜 그렇게 그 언니들 일에 마음이 쓰이는지?”
민우는 일부러 ‘예쁜 아가씨’와 ‘해고된 언니들의 슬픔’을 대비시키며, 관리부 직원인 정희와 노동자 편에 선 정희 사이의 괴리를 건드렸다. 이는 정희의 감정적 동기를 확인하려는, 민우의 가장 위험하면서도 중요한 타진이었다.
정희는 민우의 직설적인 질문에 당황하여 커피잔을 다시 잡았다. 그녀의 얼굴에 미묘한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상대방이 말한 ‘맘고생’이라는 표현이 그녀가 짊어진 비밀의 무게를 꿰뚫어 본 듯해 섬뜩했다.
“그야... 같이 일하던 사람들이잖아요. 갑자기 길거리로 내몰리고, 똥물 세례까지 당하면서... 회사는 제가 일하는 곳이지만, 그 언니들의 사정을 보면... 마음이 아프지 않을 수 없어요.”
그녀는 말을 아꼈지만, 그녀의 눈빛은 과거의 고통스러운 기억을 떠올리듯 흔들렸다.
“그럼유. 맞는 말씀이쥬. 지들 같은 노동자끼리도 그 소식 들으믄 속이 뒤집혀유. 근디 김정희 씨는 사무실 안에 있는 분이라... 다르지 않을까 생각했슈.”
“솔직히... 우리 공장 남성 노동자들은 그 언니들 욕만 허는디, 정희 씨는 마음이 따뜻한 사람 같아유. 혹시 회사밖에서 그 언니들이 나쁜 소리를 많이 듣는가유? 지는 밖에서 듣는 소리가 궁금혀서유.”
민우는 자신을 철저히 ‘생산직 노동자’의 시선에 가두면서, 정희의 내부자 시선을 유도했다. 그는 정희가 고립된 내부 협력자임을 확인하고, 그녀의 도덕적 용기에 기반한 신뢰를 구축하려는 것이다. 정희는 무슨 말을 하려다가 잠시 멈췄다. 그리고 다시 결심한 듯 말했다.
“우리 부장님은 ‘똥물 세례’ 이야기가 다시 나올까 봐 전전긍긍하세요. YH무역 사건이 터지고 나서, 우리 회사의 해고 노동자 복직 투쟁이 다시 불붙을까 봐 노심초사하시고요.”
“관리부에서는 ‘'여공들의 잡담’까지 보고하라는 지시가 내려왔어요. 하지만 저는... 그렇게 할 수가 없어요.”
정희는 마지막 말을 하면서 고개를 살짝 떨구었다. 그녀는 자신이 겪는 갈등과 수치심을 민우에게 솔직하게 노출했다. 그녀에게 민우는 이 무거운 짐을 잠시나마 내려놓을 수 있는 유일한 통로처럼 보였다.
민우는 정희의 말과 행동을 통해 그녀가 ‘내부 협력자’로서의 잠재력이 충분하며, 현재 도덕적 압박감에 시달리고 있다는 것을 확실히 파악했다. 그는 그녀의 용기에 대한 공감과 지지를 표현해 줄 때임을 알았다.
“김정희 씨. 김정희 씨는 좋은 사람 같어유. 지는 그 마음 알 것 같구만유.”
정희는 커피 잔을 들었지만, 마시지 않고 그저 두 손으로 감싼 채 창밖과 다방 안을 천천히 살폈다. 다방 안은 활기찬 젊음의 에너지로 가득 차 있었다. 구석 테이블의 대학생들은 펼쳐진 신문과 노트 위에 진한 커피 얼룩을 남기며, 미래와 사회에 대한 열띤 토론을 이어가고 있다. 그들의 표정에는 지식인 특유의 자신감과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희망이 어려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리고 동생 영석의 모습이 오버랩되었다. 그리고 그녀의 귀에 “민주화”, “노동 3권”, “정부의 역할” 같은 단어들이 파편처럼 들려왔다.
그녀의 시선은 그들의 깨끗한 옷차림과 세련된 안경, 그리고 자유롭게 펼쳐진 책들에 머물렀다. 이들은 꿈을 이야기할 수 있는 사람들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이 활기찬 풍경은 정희의 머릿속에 극명한 대비를 만들어냈다.
그녀의 눈앞에는 먼지가 자욱한 생산라인, 피곤에 절어 누렇게 뜬 얼굴로 방직기나 방적기를 돌리던 해고된 언니들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들의 손은 기계나 실에 베어 상처투성이였고, 그들의 입에서는 희망 대신 밀린 임금과 생계의 불안함만이 터져 나왔다.
“저 대학생들은 민주화를 논하지만, 우리 언니들은 인간답게 살 권리를 위해 똥물을 맞았지.”
그녀는 특히, 해고 통보를 받고 회사 앞에서 울부짖던 은숙, 미영, 영자, 순덕이 언니들의 모습이 떠올랐다. 언니들은 그녀에게 친언니들처럼 따뜻하게 대해주었고, ‘복직 소송에 쓸 증거’를 모아달라고 눈물로 부탁했던 사람들이다.
그들의 외침과 곤봉을 휘두르던 진압대의 모습, 그리고 이상우 부장의 비열한 명령이 귓가에 울리는 듯했다. 순간, 그녀의 눈가가 촉촉해지기 시작했다. 코끝이 시큰해지며 감정이 복받쳐 올랐다. 그녀는 재빨리 고개를 숙여 흐트러진 스카프를 매만지는 척했지만, 곁에 앉은 민우는 그녀의 떨리는 어깨와 젖은 눈망울을 놓치지 않았다.
민우는 “쉽게 무시하고 떠나버릴 수 있는 환경의 사람임에도... 저리 괴로워하는구나. 그녀는 이 투쟁의 가장 약하지만 가장 중요한 통로가 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희는 숨을 깊게 들이마시고는 눈물을 가까스로 참아냈다.
“김성태 씨, 저는... 우리 언니들이 저 대학생들처럼 적어도 정의가 무엇인지 이야기할 수 있는 세상이 되었으면 좋겠어요. 억울함만이라도 풀 수 있도록 말이요.”
그녀의 말은 단순한 노동자의 동정이 아닌, 지식인의 언어와 맞닿아 있었다.
그런데 그 순간 정희는 퍼뜩 정신이 돌아왔다.
“저 사람은 남성 노동자인데 내가 뭘 믿고 이런 소리를 하고 있지?” 하는 생각에 바로 자리를 고쳐 앉았다.
“죄송해요. 제가 되잖은 소리를 한 것 같아요.”
민우의 따뜻한 공감과, 다방 안의 자유로운 분위기에 취해 너무 깊은 속이야기를 꺼냈다는 섬뜩한 자각이 그녀를 덮쳤다.
“미쳤지, 김정희! 내가 지금 뭘 이야기한 거야? ‘관리부의 지시’, ‘부장님의 전전긍긍’, 나는 지금껏 관리부장에게도 감추던 가장 위험한 비밀을, 고작 두 번 만난 생산동 노동자에게 털어놓은 거야?”
그녀의 얼굴에서 아까의 슬픔과 감격은 사라지고, 차가운 경계심과 당황한 기색이 빠르게 뒤섞였다. 그녀의 손은 테이블 위의 커피잔 대신 트렌치코트의 깃을 꽉 붙잡았다.
그녀는 방금 전의 진심을 ‘업무 스트레스로 인한 일탈’로 치부하며 수습하려 했다.
“김성태 씨. 아까 제가 아까 말한 ‘언니들 복직 이야기’같은 건... 그냥 순간적인 감정이었어요. 아시다시피 저는 회사 '관리부 직원'이고, 김성태 씨는 '생산직 직원'이잖아요? 저희의 주된 관심사는 회사 일이 되어야죠.”
그녀는 스스로 '관리부 직원'이라는 방패를 다시 꺼내 들며, 두 사람 사이에 명확한 벽을 세웠다. 이는 “우리의 관계는 업무를 위한 것 이상은 아니다”라고 민우에게 선을 긋는 행동이었다.
민우는 정희의 갑작스러운 변화를 예상했다는 듯 순박한 표정을 유지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그녀의 후회와 불안함을 이해했고, 지금 그녀의 이성적인 방어막을 건드리는 것은 위험하다는 것을 알았다.
“아따! 그래유. 김정희 씨가 힘든 건 힘들다고 허는 것도 사람 사는 정인디 뭐 어때유.”
짧은 정적이 흐른 후, 두 사람은 어색하게 커피를 마셨다. 진심과 비밀이 오갔던 시간은 순식간에 경계와 이성의 막으로 덮여버렸다.
“근디 광산김가끼리 오늘 종친회 한번 허는 건 어뗘유?”
“종친회요?”
정희가 다시 밝은 얼굴을 하며 물었다.
“저기 신촌역에서 교외선 기차를 타고 '백마'나 가볼래요?”
“'백마'라는 곳이 있어요?”
정희가 호기심 가득한 얼굴로 물었다.
“가봐유! 지도 한두 번 친구들 따라 가봤는디 참 좋아유.”
“여기서 시간이 얼마나 걸리는데요?”
정희는 혹시나 열차가 끊기지나 않을까 걱정되었다.
“걱정 마셔유. 여그서 얼추 한 시간 정도면 가는 거리닌께요.”
오후 2시, 신촌역의 플랫폼은 여전히 분주했지만, 교외선을 타려는 사람들에게는 느슨하고 목가적인 분위기가 감돌았다. 낡은 목조 간이역을 연상시키는 신촌역의 오래된 역사에는 젊은 남녀 대학생들이나 연인들이 많이 서 있다. 사실 민우는 백마에 있는 '화사랑'에 다녀오려는 것이다. '화사랑'은 원래 홍대 미대와 민우가 다니고 있는 중앙대 미대 출신들이 모여 미술 세미나, 음악회, 전시회 등을 열던 '그림이 있는 사랑채'라는 이름의 문화 공간이었다. 그러나 손님들이 많아지면서 카페의 형태를 갖추어 '화사랑'이라는 이름으로 바꾼 곳이다.
플랫폼으로 들어서는 교외선 열차는 푸른색과 흰색의 낡은 도색을 하고 있었으며, 객차는 많지 않은 2~3량 정도다. 창문은 덜컹거리는 소리를 낼 것처럼 오래되었고, 내부에는 나무 합판으로 된 좌석과 짐을 올리는 낡은 선반이 보였다. 열차 내부에서는 석탄 난로 대신 봄의 햇살이 스며들어 훈훈한 냄새가 났다.
디젤 기관차 특유의 덜컹거리는 소리를 내며 느린 속도로 열차가 신촌역을 떠나자 도시의 풍경은 빠르게 바뀐다. 처음에는 빽빽하게 들어선 붉은 벽돌집과 신축 아파트 단지의 공사 현장을 지나간다. 창밖으로는 빨랫줄에 걸린 옷가지와 작은 건널목을 지키는 철도원의 모습이 보인다.
서울 외곽으로 완전히 빠져나가자 풍경은 급격히 달라졌다. 열차는 푸른 천막으로 가려진 군부대 철조망 옆을 지나가기도 하고, 논밭이 펼쳐진 한적한 시골길을 달린다. 농부들이 경운기를 모는 모습이 보이고, 갓 심은 모와 파릇하게 돋아난 보리밭이 봄의 싱그러움을 알려준다. 승객들은 창문을 열고 봄바람을 맞으며 여유를 즐긴다. 기타를 치거나 노래를 부르는 대학생들이 보이고, 나이 지긋한 어르신들은 창밖을 바라보며 옛 추억에 잠긴듯하다.
열차는 잠시 창릉천이나 작은 하천을 따라 달린다. 햇살에 반짝이는 물결과 버드나무의 연둣빛 새싹이 봄의 절정을 알린다. 기차는 능곡, 대곡 등 몇몇 간이역을 지나쳤다. 승객들은 점점 줄어들고, 열차 안은 한층 더 조용해졌다. 창밖에는 넓게 펼쳐진 들판과 아직은 개발되지 않은 탁 트인 자연의 고요함이 느껴진다. 목적지인 백마역에 가까워지자 역 근처에 옹기종기 모여 있는 작은 음식점과 유원지 입구가 보이기 시작했다.
'화사랑'은 낡은 나무와 은은한 황갈색 조명, 짙은 커피 향이 섞인 예술가들의 은신처 같았다. 창밖의 논밭 풍경과 대비되는 실내 한구석, 쓸쓸한 표정의 무명 가수들이 낡은 기타나 피아노를 치며 시대의 고독과 낭만을 담은 포크송을 나지막이 불렀다. 그들의 진솔한 목소리는 불안한 청춘들의 마음을 깊숙이 파고들어, 다방 안을 무거운 서정과 희미한 위로로 가득 채워주는 것 같다.
다시 낡은 피아노 건반 위를 오가는 연주자의 손가락은 느리고 애틋한 멜로디를 빚어냈다. 가사가 없는 연주곡이었지만 그 멜로디는 도시 외곽의 쓸쓸함과 청춘의 고민을 담고 있는 듯했다.
“음악들이 참 좋네요. 슬프기도 하고.”
정희가 나지막이 말했다.
“그러게유. 저런 곱고 슬픈 가수의 목소리나 기타 그리고 피아노 소리는 고운 마음을 가진 사람이나 낼 수 있겄슈. 지처럼 기름때 묻은 놈은 평생 들어볼 기회도 별로 없슈.”
민우가 정희를 똑바로 바라보지 못한 채 피아노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러면서 다시 한번 자신을 낮추고 '생산직 노동자'의 경계 속에 머물렀다. 하지만 그의 고운 눈매와 음악에 집중하는 진지한 옆모습은 그의 말과는 전혀 달랐다.
정희는 그가 농담처럼 말하는 '기름때 묻은 놈'이라는 단어에 순간 날카로운 반감을 느꼈다. 그녀는 무심코 민우의 손이 아닌, 그의 단정하게 다려진 셔츠 칼라와 날렵한 턱선을 바라봤다.
“저 사람이 정말 중학교만 나온 시골 청년일까? 아까 부장님 앞에서는 그렇게 어리숙하더니... 음악을 듣는 눈빛은 저기 앉아 있는 대학생들보다 더 깊은데.?”
그녀는 의문이 들었지만, 굳이 그 의문을 파고들지는 않았다. 오히려 민우의 순박한 미남형 얼굴과 따뜻한 공감 능력 사이의 묘한 괴리감이 그녀의 마음을 더욱 궁금하고 설레게 만들었다.
정희는 커피를 한 모금 마시려다가 멈췄다. 그녀의 시선은 자신의 작고 깨끗한 손을 거쳐, 커피잔 옆에 놓인 민우의 거친 손으로 옮겨갔다.
“김성태 씨 손... 참 거칠고 단단하네요.”
그녀의 목소리는 자신도 모르게 감탄과 연민이 섞여 있었다. 민우는 잠시 당황했지만, 이내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며 씩 웃었다.
“아따, 이런 손이 있어야 기계도 고치고, 무거운 베어링도 나르쥬. 김정희 씨처럼 곱고 깨끗한 손은 종이 만지기엔 좋지만, 현장에선 하루도 못 버틸 틴디유.”
그의 말은 '다른 세상 사람'임을 다시 강조했지만, 정희는 그의 거친 손을 바라보며 뜨거운 노동의 땀과 건강한 사내의 힘을 연상했다. 그녀는 문득, 자신이 그의 거친 손과 고운 마음 사이의 매력적인 경계에 이끌리고 있음을 깨달았다.
카페 안의 피아노 소리가 절정에 달했다가 느린 여운을 남기며 멈췄다. 두 사람 사이에는 미묘한 온기가 감돌았다.
“저기요! 김성태 씨. 우리 다음번에 또 커피 마실 수 있을까요? 회사 이야기 말고.”
그녀는 '화사랑'의 분위기에 취해서 '관리부 직원'으로서의 경계를 허물고 있었다.
민우는 그녀의 진심이 담긴 눈빛을 읽었다. 그리고 따뜻한 눈빛으로 정희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럼유. 광산 김가끼리 커피 한 잔 더 못 마실 이유가 뭐 있겄슈.”
그의 넉넉한 미소는 정희의 마음속에 따스한 봄볕처럼 번져나갔다. 두 사람 사이에는 위장 취업자와 내부 협력자라는 위험한 비밀이 있었지만, 그보다 더 강렬한 이끌림이 피어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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