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오목교

1978년-1980년 언저리

by 서완석

제20화 영석과 정화(1)

북악산 자락에 초록색과 노란색, 그리고 분홍색으로 색칠을 한 것 같이 흐드러지게 피었던 개나리와 진달래가 지고, 교정에는 철쭉꽃이 만발해 있다. 영석은 토요일이라 아침 일찍부터 도서관에 앉아 공부하다가 학생 식당에서 점심을 먹고 태종이와의 약속도 지키고 소화도 시킬 겸 천천히 걸어서 후문 부근에 있는 옥류정까지 걸어가보기로 했다. 영석은 학교 입학 후 후문에 가는 일은 불란서 문화원에 영화를 보러 갈 때를 빼고는 거의 없다. 후문으로 가는 길은 가파르다. 그리고 영석이를 비롯한 학생들 대부분이 정문을 이용해 도심으로 이동하므로 사람의 발길이 뜸하다. 호암관을 지나는 길에도 많은 꽃이 피어 봄날의 정취를 흠뻑 느낄 수 있지만, 영석이 보기에 후문 쪽 꽃들은 최루탄 맛을 덜 봐서 더 싱싱한 것처럼 느껴졌다.

그런데 성균관대학교 후문, 바로 그 뒤편으로 솟아오른 북악산은 단순히 웅장한 자연의 풍경만은 아니고, 수도 서울의 숨통을 조이는 군사적 긴장감 그 자체로 보일 때가 있다. 이른 봄의 오후 햇살이 차가운 벤치 위로 비칠지언정, 영석을 비롯한 학생들은 그 햇살 아래서도 산 능선 너머에 감추어진 대공포 기지의 존재를 늘 의식해야 했다. 특히 ‘1. 21 사태’ 이후, 북악산은 철저한 대공 방어망의 최전선이 되었다. 대학의 지척인 고지대에 북한의 침투에 대비한 대공 포대가 굳건히 자리 잡고 있고, 후문 근처에서는 정보과 형사 외에도 군인들의 움직임이 잦다. 따라서 학생들은 야간에는 북악산 쪽으로의 통행이 사실상 통제되는 상황을 익숙하게 받아들여야 한다. 성대 다니는 학생들에게는 성북동에서 삼청터널을 지나 삼청동으로 내려가는 길에서 오줌도 누지 말아야 한다는 이야기가 전설처럼 전해지고 있다. 영석은 그 이유가 하도 궁금해서 선배에게 물어봤다. 선배들은 밤에 군인들이 지키고 있다가 수상한 움직임을 보이는 사람은 바로 체포하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래서 영석은 불란서 문화원을 가기 위한 경우에도 반드시 낮에만 후문을 이용해 삼청동으로 갔다.

그래서 그런지 몰라도 영석에게 북악산은 지식과 낭만의 공간인 종로를 위에서부터 짓누르는 국가 폭력과 억압의 물리적 상징처럼 여겨졌다. 데모가 일어나는 날, 최루탄 가스가 교정을 뒤덮을 때마다, 그는 산 너머의 대공포 기지가 마치 자신들을 향해 포신을 겨누고 있는 듯한 숨 막히는 압박감을 느꼈다. 그에게 미팅에 나갈지 말지를 고민하는 것 자체가 사치처럼 느껴지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언제 포신이 터질지 모르는 전쟁통 같은 불안감이 교정을 감싸고 있는 한, 청춘의 낭만은 늘 시대의 부채 아래 놓일 수밖에 없다.

호암관을 왼쪽에 끼고 언덕길을 오르다 보면 후문 쪽으로 50미터 정도 미치지 못하는 곳에 ‘옥류정’이라는 정자가 있다. 태종이는 대낮부터 정자에 앉아 막걸리를 마시고 있었다.

“여! 친구 드디어 왔구나.”

“대낮부터 웬일로 술을 마시고 있니?”

“야! 세상이 나를 술 마시게 하잖아.”

“왜 또? 무슨 일이 있는 거니?”

“너 오늘 과외 없지?”

“응 과외는 수업이 없는 화요일과 금요일 저녁에만 있어.”

“그럼 됐어.”

“뭐가 됐다는 거야?”

태종은 영석의 물음은 안중에도 없다는 듯이 찌그러진 양재기에 막걸리를 가득 따라 영석에게 내밀었다.

“도서관에 책가방이 있는데?”

“아줌마! 여기 막걸리 한 병 더 줘요.”

태종이의 얼굴은 봄에 취해서 그런지 막걸리에 취해서 그런지 몰라도 여하튼 벌써 발그레하다.

“마셔! 너 나랑 술 마신 지 꽤 오래되었잖니? 그동안 내가 너 공부하라고 그만큼 배려했으면 된 거잖아. 오늘도 안 마신다고 하면 나 너랑 절교할지도 몰라. 나 네가 학사경고받지 말라고 해서 평일에 꼬박꼬박 출석했다. 물론 중간에 나와버렸지만, 출석 체크는 꼭 했다는 거지.”

“아줌마! 막걸리 한 병 더 달라는데 왜 안 주셔?”

“학생 대낮부터 취하면 안 돼. 조금만 마셔.”

옥류정 정자 밑에서 막걸리 한 병을 들고 올라온 아주머니가 태종이를 보며 말했다. 태종이 말에 따르면 정자 밑에는 아주머니의 가족이 기거하는 공간이 있다고 했다.

“아줌마! 제가 취하려는 게 아니라 세상이 날 취하게 한다니까요.”

“왜 세상 탓을 하고 그래?”

“아줌마! 그렇다면 이렇게 숨을 틀어막는 세상에서 막걸리 한잔도 못 마시고 살아야 하겠습니까?”

태종이는 자못 민주투사라도 된 듯 목소리를 높였다.


“야! 영석아! 내가 데모를 하지 않고 여자나 만나고 돌아다니니까 이 빌어먹을 독재정권에 박수라도 보내는 놈인 줄 아니? 나도 세상 보는 눈은 가지고 있어.”

“너 이번 주 ‘TIME’ 지 봤어?”

“응! 아직 못 봤는데?”

“도서관에 들어와 있는지 모르겠는데, 내가 어제 본 TIME 지 기사에는 매직펜으로 일부 단어에 까맣게 칠한 부분들이 있더란 말이다.”

“그래? 왜?”

“내가 그 부분을 햇빛이나 불빛에 비춰 보니 ‘dictator’라고 적혀 있더라고.”

“아 그래? 나도 ‘Newsweek’ 지에서 봤는데 너도 봤구나.”

요즘 대학생들에게는 종로서적 수입 코너에 놓인 미국의 시사 주간지 ‘TIME’은 유일한 탈출구이자 고통스러운 진실이다. 특히 박정희 정권을 비판하는 기사가 실린 주간지가 국내에 들어올 때면, 그 페이지는 언제나 난도질당해 있다. 한국 관련 기사의 핵심 문단 위에는 검은 매직이 칠해져 있기 마련이다. ‘독재’라는 비판적 단어가 아닌, 문장 전체가 짓이겨진 채, 흑색으로 봉인되어 있는 때도 있다. 영석은 그때마다 검게 가려진 부분을 햇빛이나 전등불에 비추어보았다. ‘가려진 곳에 진실이 있다.’ 그는 그 매직 칠 아래 숨겨진 비판의 목소리를 머릿속으로 상상하며, 자신이 학교에서 배우는 것과 사회에서 접하는 현실 사이에 얼마나 거대한 검은 장막이 드리워져 있는지 새삼 깨달았다.

“영석아! 오늘 우리도 수주 변영로 선생이 되어 볼까나?”

막걸리 한 주전자를 비워갈 무렵, 태종은 술기운이 오른 듯 눈을 빛내며 영석에게 몸을 더 가까이 숙였다. 그는 이제 단순한 친구가 아닌, 영석의 깊은 고뇌를 이해하는 동반자이자 교묘한 선동가였다.

“‘논개’를 쓴 수주 변영로 선생 말이야?”

“그래.”

“그분이 되어 보자는 말이 무슨 말이야?”

“야, 김영석. 너 진짜 바보냐? 네가 아무리 고결하게 앉아서 책을 본들, 저 독재자 놈들이 바뀌냐? 아니면 수아 오빠 같은 사람들이 고통받는 게 멈추냐?”

태종은 막걸릿잔을 들어 단숨에 들이켜고는 ‘탁’ 소리 나게 내려놓았다. 그는 강의실의 무력함을 상기시키며 영석의 방어선을 다시 무너뜨리려고 했다.

“봐. 이 시국에 우리가 할 수 있는 ‘숨통’은 웃고, 마시고, 그리고 사람을 만나는 거야. 네가 미팅 한 번 나간다고 해서 수아를 배신하는 게 아니라고. 오히려 그 반대라는 거지.”

태종은 미팅의 본질을 ‘생존’과 ‘재정비’의 문제로 치환하던 지난번의 논리를 또 꺼내 들었다.

“그 이야기는 지난번에 했잖아. 왜 또?”

"네가 말하는 미안함과 죄책감. 그게 네가 이 시대와 수아에게 지고 있는 부채라고 치자. 그런데 너는 그 부채를 갚기 위해 뭘 하고 있니? 자신을 고립시키고 있잖아. 네가 자신을 짓누르고, 결국 지쳐 쓰러져 버린다면, 그게 수아한테 도움이 될 것 같아? 네가 가진 ‘진짜’가 소진되도록 방치하는 게, 수아의 믿음에 보답하는 길이라 할 수 있을까?"

“태종이 너도 참 집요하구나.”

영석은 빙그레 웃으며 막걸릿잔을 들어 마셨다. 오늘도 태종이가 주는 잔을 거부했다가는 진짜로 태종이가 절교할 것 같은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너 같은 고민을 했던 선배들이 이 학교와 종로 바닥에는 넘치고 넘쳤어. 수주 변영로 선생이 횡보 염상섭 선생, 공초 오상순 선생, 성제 이관구 선생 등과 함께 성북동 골짜기의 ‘사발정 약수터’에서 술 마시고 취해 벌거벗은 채 소를 거꾸로 타고 종로 보신각까지 내려왔다는 전설 같은 이야기가 있어. 그리고 ‘사발정 약수터’가 바로 여기야.”

태종은 흥분하여 말했다.

“1953년 서울신문사에서 간행되었고, 수주 선생의 솔직한 심정과 풍자와 해학, 그리고 기지를 엿볼 수 있는 수필집으로, ‘명정사십년 무류실태기(酩酊四十年 無類失態記)’라는 책이 있어. 그 책에는 이런 구절이 있어.”

“혜화동 우거(寓居)에서 지낼 때이었다. 어느 하룻밤 바커스(Bacchus)의 후예(後裔)들인지, 유명의 직손들인지는 몰라도 주도의 명인들인 공초, 성제, 횡보 주 삼선(三仙)이 내방하였다.....”

태종은 아주 자랑스럽다는 듯이 수주 선생의 수필집에 나오는 ‘백주에 소를 타고’라는 수필 한 구절을 멋들어지게 외웠다. 국민학교 다닐 때부터 백일장에 나가서 수많은 상을 받았던 영석이지만 이 순간만은 태종이에게 흠뻑 빠질 수밖에 없었다. 영석이도 여러 사람으로부터 수주 선생이 성균관대학교에 교수로 재직하셨다는 이야기를 들은 바는 있지만 그런 호쾌한 일화는 오늘 태종이로부터 처음 들었다.

“‘바커스’가 무슨 의미인지는 아는 거니?”

영석이가 태종이를 바라보며 물었다.

“‘박카스’는 동아제약에서 만든 피로회복제 아니냐?”

“푸흡”

영석은 태종이의 대답에 웃음이 터졌다.

“‘바커스’는 그리스 로마 신화에 나오는 ‘술과 추수의 신’에서 유래한 말이야.”

“‘박카스’는 독일 유학 중이던 동아제약의 강신호 사장이 함부르크 시청 지하홀 입구에 서 있던 신의 조각상에서 아이디어를 얻어 간장 보호 이미지를 담아 작명했다더라.”

“아하! 그래?”

태종은 영석의 무릎을 치며 하나 배웠다는 듯이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웠다.

“하나 더 알려줄까? ‘암브로시아’와 ‘넥타르’의 의미는 아니?”

“모르는데?”

“‘암브로시아’는 올림포스의 신들이 먹는 ‘신성한 음식’이라는 뜻이고 ‘넥타르’는 ‘신들의 음료’라는 뜻이야. 그래서 이 둘을 섭취하면 ‘불로불사(不老不死)’의 능력을 유지할 수 있다는 거야.”

“와! 우리 영석이 대단한데 그런 걸 어디서 배운 거야?”

“응! 교양과목으로 철학개론 시간에 교수님께서 고대철학 부분을 가르치시며 이야기해 주신 거야.”


“그렇다면 오늘 우리 둘이서 두 명의 바커스 즉 이신(二神)이 되어 보자,”

태종이가 호쾌하게 외쳤다.

“그런데 옷 벗자는 이야기는 하지 마라.”

영석이가 다시 호쾌하게 웃으며 말했다.

“그게 바로 암울한 시대에 지식인들이 보여준 저항의 방식이었어. 지독하게 술에 취해, "나는 너희 시대의 속박에 매이지 않는다"라고 온몸으로 외친 거지.”

다시 태종이가 말했다.

“우리가 지금 미팅 한 번 나가는 게, 그 벌거벗은 용기에 비하면 얼마나 사소하냐? 하지만 그 본질은 같아. 그리고 수아 오빠에 대한 미안함 때문에 네 청춘까지 바칠 필요는 없어. 암울할수록 낭만을 잃지 않는 것, 그게 이 시대를 이겨내는 우리의 최소한의 저항일 수 있어.”

태종은 미팅을 ‘낭만적 저항의 계승’으로 격상시키며 영석에게 새로운 명분을 부여했다.

영석이에게서 죄책감은 이미 저만치 물러나 있었다.

영석은 묵직하게 채워진 막걸릿잔을 들어 올렸다. 그 잔은 더 이상 죄책감의 상징이 아니었다. 태종은 환하게 웃으며 영석의 어깨를 꽉 붙잡았다.

“대신에 약속을 해줘.”

영석은 흔들리는 눈빛으로 태종을 바라보았다.

“강의실에서 배울 수 없는 진짜 청년들의 고민을 들어보게 해 줘.”

영석은 막걸리를 단숨에 들이켰다. 그의 마음속에서 미팅은 이제 수아를 배신하는 행위가 아닌, 책임을 다하기 위해 경계인이 잠시 숨을 쉬는 ‘간이 쉼터’가 된 것이다. 다만 청춘의 낭만을 누리는 것이 이 ‘TIME’이나 ‘Newsweek’ 등에 있던 검은 칠처럼 자신을 기만하고 진실로부터 멀어지게 하는 행위는 아닐까?라고 하는 의구심은 계속되었다.

“그런데 말이다. 태종아! 나 돈이 없는데 어떡하냐?”

“친구야! 수주 선생님의 수필집에는 "딱한 노릇은 네 사람이 주머니를 다 털어도 불과 수삼원 밖에 없어서 사동(使童) 하나를 불러다가 몇 자 적어 화동 납작 집에 있던 동아일보사 편집국장 고하(古下) 송진우 선생에게 좋은 기고를 하여 줄 터이니 오십 원을 보내 달라는 편지를 보냈다"구절이 나와. 그런데 고하 선생이 과연 그만한 돈을 보내주었을까?”

“그러게?”

그다음 이야기가 영석의 궁금증을 자극했다.

“그때만 해도 오십원이면 아주 큰돈이라 아무리 넷이 술을 잘 마신대도 선술집에 가서는 도저히 다 쓸 수 없었던 반면에, 낮부터 요정에 가서 서둘다가는 안심이 안 될 정도였다고 해. 그리고 마침내 돌아온 사동이 들고 온 봉투 안에는 오십원이 들어 있었다는 거야. 얼마나 낭만이 있는 사람들이냐?”

“그다음에는 어떻게 된 거냐?”

영석이 조급증을 냈다.

“일기도 좋고 하니 술 말이나 사고 고기 근이나 사 가지고 나 있는 곳에서 지척인 사발정 약수터에 갔다"고 쓰여있어. 그리고 아까 말한 대로 사발정 약수터가 바로 저기야.”

태종이가 가리키는 손가락을 바라보던 아줌마가 깜짝 놀라는 시늉을 했다.

옥류정 바로 옆에 약수터가 있고, 태종이의 손가락은 정확하게 거기를 가리키고 있었다.

“비슷한 이야기를 여기 오시는 노인네들이 할 때 흘려들었는데 그런 배경이 있구먼. 학생 때문에 정말 자랑스럽네.”

“그럼요. 아줌마는 지금 역사적 현장을 지키고 계신 거예요.”

"옛다. 짜장면 다섯 그릇은 먹을 수 있을 게다"

태종이가 영석의 손에 천 원짜리 지폐 한 장을 쥐어주었 다.


“가자. ‘아폴로’로”

태종이가 벌떡 일어섰다.

영석이가 가만히 생각해 보니 오늘이 바로 미팅을 하기로 한 날이었다.

영석이는 도서관에서 책가방을 챙겨 태종이를 따라 20번 버스를 타고 종로에 내렸다. 종로는 역시 젊은이들의 거리였다. 오후 5시의 종로 거리는 하루 중 가장 뜨겁게 끓어오르는 청춘의 도가니였다. 옆구리에 책을 든 롱스커트 차림의 여학생들이 거리를 메웠고, 거리에는 포크송과 담배 연기가 새어 나와, 이 시대 젊은 지성들의 낭만과 고뇌가 교차하고 있음을 알리고 있다. 이곳은 언제든 터져 나올 듯한 시위대의 함성과 미팅의 설렘이 공존하는 청년 문화의 심장부다. ‘아폴로’에도 수많은 젊은이가 자리를 차지하고 앉아 대화를 나누거나 담배를 피우거나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

태종이는 낯선 친구 두 명이 앉아 있는 곳으로 영석을 이끌었다.

“서로 인사해, 여기는 영석이, 그리고 두 명은 내 고등학교 친구야.”

내성적 성격의 소유자인 영석으로서는 서먹서먹해서 인사를 나누고 다방 내부를 살피고 있었다.


“태종이가 약속을 잘 지키는구나.”

낯선 여자 목소리에 영석은 다시 긴장했다.

“야 모두 인사해. 내 친구, 봉숙이야.”

“김봉숙입니다. 안녕하세요?”

영석이와 두 명의 친구도 고개를 숙여 인사를 했다.

“그런데 태종아. 우리는 한 명이 아직 안 왔어. 인천에서 오느라 좀 시간이 걸리는 것 같아.”

“인천? 숙대는 남영동에 있잖아?”

“응. 그게 말이야 숙대생 네 명 중 한 명이 펑크를 내서 갑자기 우리 동생 봉자의 도움을 또 받아 다른 한 명의 친구를 급하게 섭외했으니 조금만 기다려줘. 어때요. 기다려 주실 수 있는 거죠?”

“당연히 기다려야죠. 인천이 먼 곳이잖아요.”

태종이의 한 친구가 말했다.

“아이고! 감사합니다. 태종아 너 돈 많으니까 기다릴 동안 이분들 마실 것 좀 사드리면서 시간 좀 끌어줘. 알았지?”

“우와! 우리 봉숙이 리더십 좀 봐라.”

태종이가 봉숙이 엉덩이를 손바닥으로 ‘탁’ 치며 말했다.

“어머, 어머! 이게 무슨 짓이야?”

그러나 봉숙이는 더 이상 아무 말 없이 2층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30여분이 흐른 후에 다시 1층 태종이네 자리로 왔다.

“자! 각자 주머니에 들어 있는 물건 하나씩을 꺼내 보세요.”

미팅이란 걸 생전 처음 해보는 영석으로서는 뭘 꺼내 놓으라는 건지 몰라 주머니에 들어 있는 손수건과 수아가 준 볼펜, 그리고 동전 두 개를 꺼내 놓았다.

“영석아! 그중에 하나만 선택해서 내놓으란 거야.”

영석은 땀 냄새가 나는 손수건과 동전을 주머니에 다시 집어넣고는 볼펜만 봉숙이에게 내밀었다.

“그런데 여러분! 오늘 가장 늦게 온 여학생이 내가 보기에는 퀸카인데 누구 파트너가 될지 아주 궁금하네요.”

봉숙이가 아주 의미심장한 미소를 띠며 말했다.

순간 영석이는 태종이가 봉숙에게 뭔가 신호를 보내는 듯이 눈을 찡긋거리는 것을 보았고, 봉숙이가 이를 애써 외면하는 듯한 모습을 보았다.

봉숙이는 네 명을 각자 다른 자리에 앉도록 배치하고 다시 2층으로 올라갔다.

영석이는 수아의 화난 모습을 떠올리며 이번이 마지막이고 그냥 태종이의 성화에 못 이겨 나온 것이니 커피만 마시고 헤어지기로 마음먹었다.

“안녕하세요?”

영석이의 눈앞에는 단발머리에 눈이 크고, 키도 상당히 큰 빼어난 미모의 여학생이 서 있었다.

“네! 어서 오세요. 이리 앉으세요.”

영석의 손이 많이 당황한 듯 갈 곳을 잃고 헤맸다.

그녀는 당황한 영석과 달리 매우 침착한 모습이다.

“언니한테 이야기 들었어요. 성대 법대생이라고.”

“네 그렇습니다. 김영석입니다.”

“네 저는 인천교대 다니는 이정화입니다.”

“그럼 혹시, 오늘 늦으신다던 분이세요?”

“네 맞아요. 정말 죄송해요. 강의를 듣고 있는데 과사무실로 연락이 왔고 조교가 메모를 전해줬어요. 봉숙이 언니 동생 봉자가 성대 다니는데 그 친구의 친구가 제 친구예요. 오늘 미팅 참여할 숙대생 네 명 중 한 명이 펑크를 냈는데 올 수 있느냐는 메모였어요. 그런데 다시 연락할 방법도 없고, 오죽했으면 이렇게 급히 연락했겠느냐 싶은 생각에 오게 된 거예요.”

“아 그러시군요. 아까 봉숙 씨가 퀸카라고 하시던데 그 말이 맞네요. 정말 예쁘십니다.”

“아니에요. 언니가 거짓말을 잘하시네요.”

정화는 두 손을 가지런히 모으고서 자꾸 손을 가리려고 했다.

그때 봉숙이가 영석이 자리에 와서 손짓하며 잠시만 보자는 신호를 보냈다.

“태종이 저 ‘카사노바’놈이 자꾸 자기가 꺼내 놓은 자동차 키를 정화가 선택하도록 유도하라고 했는데 저는 그러지 않았고 정화가 볼펜을 고른 거예요. 정화집이 수원이라 멀잖아요. 그리고 오늘 고맙게도 대타로 와줬잖아요. 그러니 섭섭하게 해서 보내면 안 됩니다. 마음에 안 들더라도 저를 봐서 한 번은 애프터 신청하고 만나줘야 제 체면이 섭니다. 물론 정화가 애프터 신청을 안 받아들이면 얘기가 다르지만요.”

영석은 난감했다. 오늘 태종이가 하도 졸라대며 궤변까지 동원하니 친구 얼굴 봐서 나온 것인데 일이 묘하게 꼬이고, 그렇다고 정화가 싫은 것도 아니다.

“저기, 제가 고백할 게 하나 있는데요.”

정화가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뭔데요. 말씀하세요.”

만나자마자 고백이라니 이게 어떤 상황인가 싶어 영석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제 손톱이 보시다시피 안 예뻐요.”

정화가 보여준 엄지손톱은 보통 사람보다 짧았다.

“그게 뭐 어때서요?”

영석은 정말로 아무렇지도 않았다.

“평생의 콤플렉스예요.”

“그렇게 따지자면 저는 정말 추남이네요.”

“아니에요. 멋진 분이세요.”

정화는 영석이에게 잘 생겨 보인다는 말은 안 했다.

“댁이 어디세요?”

이미 봉숙이로부터 정화가 수원에 살고 있다는 이야기는 들었지만, 확인하는 차원에서 다시 물었다.

“수원시 인계동에 살아요.”

“그렇다면 전철을 타고 가셔야겠네요? 시간이 얼마나 걸려요?”

“대충 1시간 30분 정도 걸려요.”

“그렇다면 제가 같이 전철 타고 모셔다 드려도 될까요?”

“그런데 배가 고픈데.”

정화가 자기 배를 살짝 가리키며 말했다.

“당연히 제가 밥을 사드려야겠죠.”

“야! 영석아! 부럽다. 정말 미인이시네요.”

언제 왔는지 태종이가 이죽거렸다.

그때 태종이를 따라온 여학생이 태종이 팔을 거칠게 잡아끌었다.

“저 친구, 잘 생겼죠?”

영석이가 정화에게 물었다.

“아뇨. 저는 저렇게 느끼하게 생긴 사람은 싫어요.”

“굉장히 솔직하시네요.”

“네 제가 그런 소리 자주 들어요. 제가 고등학교 학도호국단 연대장을 했거든요. 좀 남성다운 데가 있어요.”

“와우!”

“그런데 왜 교대를 가셨죠?”

“애들 가르치는 일이 너무 좋을 것 같아서요. 그래서 지금 과외도 하고 있어요.”

영석이와 정화는 '이문설농탕'에서 설렁탕을 먹었다. 그리고 태종이는 자기 파트너와 '스타더스트'에 간다고 했다. 영석은 수원 갔다가 다시 영등포까지 돌아오는 시간을 감안해서 정화를 재촉해 수원 가는 전철에 올랐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글쓰기 3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