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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목교

1978년-1980년 언저리

by 서완석

제21화 수아의 큰오빠와 영석

봄날의 압구정동, 오후 3시는 햇살이 가장 길고 나른하게 쏟아지는 시간이다. 한양아파트의 네모난 건물들이 길게 그림자를 드리우기 시작하면, 이 일대에는 묘한 활기가 감돈다. 개발의 열기가 막 피어오르는데, 논과 밭을 밀어 올린 듯 우뚝 솟은 아파트 단지는 아직 서울의 다른 곳과는 이질적인, 신흥 부촌의 낯선 공기를 뿜어내고 있다. 본래 소를 몰고 돼지를 키우며 밭을 갈던 한강 남쪽의 한적한 농촌 지역이었던 강남은 최근 들어 서울의 과밀화된 인구를 분산하고 주택난을 해소하려는 정부의 강력한 정책적 의지와 맞물려 개발이 본격화되고 있다. 이곳은 원래 개발되지 않은 경기 지역의 일부 농촌이거나 행정적으로는 광주(廣州)나 금천(衿川) 등의 관할 구역에 속해 있었다. ‘용비어천가’ 제48장에는 ‘漢水 北(한수 북)’이라는 표현이 나오는데, 이는 조선의 도읍지가 한강 북쪽에 있는 한양(서울 도성 안)만을 뜻하였으므로 이곳은 가히 천지개벽이 이루어진 곳이라 할 것이고, 박정희 정권으로부터 큰 혜택을 입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러나 1960년대 후반부터 폭증한 서울 인구(강북 지역)의 과밀화로 인한 주택난과 교통난을 해소하기 위한 정책적 대안이라는 점, 휴전선과 가까운 강북 지역에 인구가 과도하게 집중되는 것을 안보상의 위험으로 간주하여, 도심 기능과 인구를 한강 이남으로 분산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다는 점, 경부고속도로 건설과 제3한강교(한남대교) 건설을 강남 개발의 신호탄으로 삼고 있다는 점. 무엇보다도 강남 지역에 대법원, 고속터미널 등 공공시설의 이전과 1976년부터 시작된 명문 고등학교(경기고, 서울고 등)의 강제 이전을 통해 강남으로의 인구 이동을 강력하게 유도하고 있으며, 이는 한국 최초의 계획적 신도시로서의 기틀을 마련했다는 점은 긍정적으로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개발 과정이 순수한 도시계획의 관점에서만 이루어진 것이냐에 대해서 의구심을 가진 사람들이 많다. 예를 들어, 정부가 개발 계획을 주도하고 명문 학교 이전 등의 정책적 특혜를 제공하면서 부동산 투기 붐을 전국적으로 일으키고 있는데, 이는 정보와 자본을 가진 일부 계층에게 막대한 불로소득을 안겨주어 부의 불평등을 심화시키고 있다는 비판이 존재한다. 그리고 개발 과정에서 정치권력이 강남땅 투기에 앞장서고, 개발 이익을 선거 자금 등 정권 유지를 위한 비자금으로 활용했다는 의혹도 끊임없이 제기되고 있다. 특히 강남 개발을 촉진하기 위해 강북 지역에는 건축 규제와 시설 제한 등의 ‘강북 억제 정책’이 시행되면서 구도심의 쇠퇴(공동화)를 야기하고 있고, 이는 서울의 강북-강남 간 지역 격차 및 계층 간 위화감이 고착화시키는 결과를 낳을지도 모른다는 비판은 정말 정부가 새겨들어야 할 대목이 아닐 수 없다. 결국 이곳 강남은 ‘천지개벽’을 이루어낸 ‘근대화’의 성과와 ‘검은 욕망의 땅’이라는 비판적 시각이 공존하는 양면적 지역인 것이다.


이 개발 붐의 상징은 바로 대단위 아파트 단지 조성이다. 특히 1970년대 중반부터 건설되기 시작하여 최근 입주가 진행되고 있는 압구정동의 현대아파트는 강남 개발의 신호탄이자 아이콘이다. 경부고속도로 건설 대가로 불하받은 한강 공유수면매립 부지에 지어진 이 아파트는 혁신적인 고층(최대 15층)과 대단지 규모를 자랑하며, 엘리베이터와 수세식 화장실 등 현대적 시설을 갖추고 있다고 한다. 이는 단순한 주거 공간을 넘어 고도 경제성장과 부를 상징하는 표상으로 여겨지고 있다. 이제 ‘강남 아파트’는 중산층 이상의 욕망의 대상으로 자리매김했으며, 압구정 현대아파트의 경우, 1978년의 특혜 분양 사건까지 겹치면서 고위층과 명문가들이 거주하는 부촌의 이미지를 굳히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고 있다. 이처럼 현대아파트는 압구정동 개발의 선두에 서있는데, 바로 이웃해 있는 한양아파트도 1977년 12월에 최초 입주를 시작했다. 그러나 현대아파트의 1, 2차 단지는 한양아파트의 1차 입주 시점에 이미 입주를 마쳤거나 마무리 단계에 있다. 따라서 이 두 대규모 단지를 1970년대 후반 강남 부촌의 상징이자 폭발적인 부동산 붐을 일으키고 있는 주역이라 해도 틀린 말은 아니라 할 것이다.


이러한 강남 개발은 부동산 시장에 엄청난 변화를 불러일으키고 있다. 정부의 정책적 지원과 함께 도로 및 교량 건설(한남대교, 경부고속도로 등)이 속도를 높이면서 강남 지역의 땅값은 짧은 기간 안에 수직으로 상승하고 있다. 이 때문에 농사를 짓던 원주민들은 하루아침에 막대한 보상금을 받고 ‘졸지에 부자’가 되었다. 그래서 세간에서는 이들을 사람 ‘졸부(猝富)’라고 부르고 있다. 그러나 더 큰 이익을 취한 이들은 개발 정보를 미리 알고 강남땅을 사들인 고위 공직자나 투기 세력이다. 압구정동을 포함한 강남 지역의 땅값 폭등 현상은 ‘말죽거리 신화’로 불리기 시작했고, 심각한 부동산 투기 붐을 조성하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열기는 올해 들어 절정에 달하여, ‘강남’이라는 공간은 단순한 지리적 위치를 넘어 부(富)와 신분 상승의 상징이자, 한국 사회의 격변하는 욕망을 응축하는 장소로 자리 잡아가고 있다.


영석은 오후 3시의 햇살 아래, 수아와 약속한 ‘한양쇼핑센터 영동점’ 앞에서 연녹색과 아이보리색이 섞인 588번 버스를 내렸다. ‘한양쇼핑센터 영동점’은 주식회사 ‘한양유통’에서 새로 신축 중인 건물로 올해 9월에 문을 연다는 현수막이 크게 걸려 있었다. 개장을 앞둔 탓인지 어수선한 면이 있지만, 명동의 화려함을 일부 옮겨놓은 듯 사람들의 발길이 분주하다. 사람들의 옷차림은 세련되고, 걸음걸이에는 미세한 여유가 느껴진다. 삼삼오오 모인 아주머니들은 아이들 교육 문제를 이야기하고 있다. 영석은 강남에서 과외수업을 하고 있으므로 아줌마들의 아이들 교육 이야기에 귀가 쫑긋해졌다. 교복을 입은 학생들이 유통 앞 매점에서 껌이나 아이스크림을 사 먹으며 하교하는 친구들을 기다리는 모습도 보였다. 길가에는 드물게 세련된 포니 자동차가 주차되어 있었고, 그 옆을 자전거를 탄 배달부가 쏜살같이 지나갔다. 그리고 덜컹거리며 88번, 560번, 588번 시내버스들이 지나갈 때마다 아직 정비가 제대로 되지 않은 포장도로 위에서 흙먼지가 날리고 있다. 저녁 7시에는 도곡동에서 과외수업이 있다.


희뿌연 매연 냄새, 그리고 왁자지껄한 사람들의 목소리가 한데 섞여 길거리로 흘러나오고 있다. 교복을 입은 한 무리의 여학생들이 계단을 뛰어 내려왔고, 정류장에서 기다리던 몇몇 승객들이 버스에 오른다. 버스는 잠시 숨을 고르더니, 다시금 검은 매연을 뿜으며 ‘덜컹’ 소리를 내며 출발한다. 유리창 너머로 승객들의 지친 듯, 혹은 기대에 찬 듯한 얼굴들이 짧게 스쳐 지나간다. 그들의 종착지가 어디든, 이 버스는 압구정동의 신흥 욕망을 서울 도심으로 실어 나르는 하나의 동맥이다. 버스가 떠난 자리에는 다시금 아파트 단지의 고요함과 흙냄새 섞인 오후의 따뜻한 공기만이 감돌고 있다. 영석은 자신이 살고 있는 오목교 판잣집과 너무나 다른 풍경에 넋을 잃고 그저 멍하니 서있었다.

“삼춘! 언제 왔어?”

수아의 밝은 목소리가 들리자, 영석은 고개를 돌렸다. 수아는 이 '신흥 부촌'으로 넘어오기 위해 최대한 격식 있으면서도 젊은 세련미를 잃지 않으려 신경 쓴 모습이었다. 얇은 아이보리색 트렌치 코트를 어깨에 걸친 채, 안으로는 작은 꽃무늬가 들어간 짙은 녹색 실크 원피스를 입었다. 원피스는 허리선이 높게 잡혀 있어 아직 개발의 먼지가 덜 가신 이 신도시의 삭막함을 상쇄시키는 듯, 단정하면서도 화사했다. 손에는 최근 유행하는 악어가죽 패턴의 갈색 핸드백을 들었고, 머리카락은 어깨를 살짝 덮는 길이로 깔끔하게 안으로 말아 넣은 단발이다. 신발은 굽이 너무 높지 않은 베이지색의 둥근 코 펌프스(Round-toe Pumps)를 신어 걸음을 조심스럽게 만들고 있는 듯했다. 수아의 표정은 밝은 목소리와 달리 이질적인 풍경 속에서 미묘하게 굳어 있었다. 정면에는 똑같이 반복되는 거대한 회색 콘크리트 병풍 같은 아파트 건물들이 위압적으로 솟아 있고, 길가에는 막 입주를 마친 듯 새로 포장된 아스팔트와 함께 간간이 흙먼지가 날리고 있어서인지 그녀의 눈빛에는 호기심과 함께 약간의 긴장이 서려 있었다. 이 땅이 가져다주는 새로운 부와 계층 상승의 기회를 상징하는 이 거대한 건물들 앞에서, 수아는 자신이 이 세계에 발을 들여놓을 자격이 있는지, 혹은 영석을 통해 이 세계에 닿을 수 있을지 가늠하는 듯 조심스럽고 복잡한 감정을 드러내고 있었다. 그녀는 한 손으로 코트 깃을 살짝 여미며, 약속된 장소를 정확히 찾았는지 재차 확인하려는 듯 주변을 천천히 둘러보았다.


“큰오빠네 집을 다니러 몇 번 와 봤지만, 올 때마다 이상하게 낯이 설은 동네가 이곳이야.”

“응! 나는 도곡동 과외하러 자주 오지만 내게도 낯선 곳이야.”

“오늘 7시에 과외가 있다고 했지?”

“응! 그런데 오늘 왜 여기서 만나자고 한 거야?”

“오빠가 자꾸 시집을 가라고 해서 오늘 내게 남자 친구가 있다는 것을 보여주려고.”

“어? 그런 거였어?”

영석은 매우 당황했다.

“그렇다면 오늘 큰오빠를 만나는 거야?”

“그래 내가 미리 말하면 삼촌이 안 나올 것 같아 말을 안 했어. 미안해.”

“미안해할 필요는 없지만 좀 당황스럽네. 이럴 줄 알았으면 이발도 하고 마음의 준비라도 하고 올 걸 그랬네.”

“아이고! 내 눈에는 멋지기만 한데 그래. 올해 ‘난다랑’이라는 원두커피 전문점이 강너머 중구에 생겼다는데 여기에는 안 보이네. 저기 다방으로 가서 오빠한테 전화하자.”

수아는 특유의 보이시한 걸음걸이로 성큼성큼 앞장서 걸었다.


다방에 들어선 수아는 오빠에게 공중전화를 걸어 도착했다는 보고를 하는 것 같았다.

“내가 삼춘에게 우리 큰오빠에 대해 이야기한 적 있지?”

“그래. 남산에서도 이야기한 적이 있지.”

영석은 수아의 둘째 오빠를 만나 적이 있지만, 수아가 큰 오빠는 완전히 정반대의 성격과 가치관을 가진 사람이라고 했었기에 만나기 전부터 가슴이 답답해졌다.

수아의 안내에 따라 다방에 들어선 영석은 좁고 퀴퀴한 담배 연기와 커피 냄새가 섞인 듯한 냄새에 살짝 인상을 찌푸렸다. 한양쇼핑센터 근처의 다방은, 바깥의 세련된 아파트촌과는 달리, 급격한 개발 속에서 잠시 숨을 고르는 듯한 낡고 허름한 공간이었다. 벽에는 촌스러운 여배우 포스터가 붙어 있고, 낡은 벨벳 소파에는 듬성듬성 구멍이 나 있었다.


공중전화를 끊고 돌아온 수아는 영석의 옆자리에 앉았다. 20여 분의 시간이 흐른 후, 입구의 낡은 나무문이 ‘덜컹’ 소리를 내며 열리더니, 바깥의 강렬한 햇살을 잠시 가려버리는 큼직한 실루엣이 들어섰다.

“오빠! 여기야.”

수아가 손을 들어 신호를 보냈다.

“어!”

수아의 큰 오빠는 수아의 걸음걸이를 닮았다. 영석은 유전자의 힘은 대단하다는 생각을 잠시 했다. 수아의 큰오빠는 영석이 상상했던 ‘큰오빠’의 이미지보다 훨씬 더 단단하고 세련된 인상이었다. 그는 최근 유행하는 굵은 줄무늬가 들어간 짙은 회색 정장 차림인데 얼핏 보아도 비싸 보였다. 넥타이는 단정하게 매여 있었고, 빗으로 눌러 넘긴 머리에서는 은은한 포마드 향이 풍겼다. 특히 그의 눈빛은 맹수처럼 예리했고, 새롭게 등장한 부촌에 산다는 자신감과 권위가 서려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리고 나이는 30대 중후반으로 보였다. 수아에게 오빠들의 나이를 물어본 적이 없어서 영석은 나중에 물어봐야겠다고 생각했다.


영석과 수아는 벌떡 일어섰고, 큰오빠는 잠시 동생을 바라보더니 시선을 영석에게로 돌렸다. 그 시선은 영석의 전신을 스캔하듯 위아래를 훑고 지나갔다.

“이 친구가 네가 말한 그 사람인가?”

큰오빠는 수아에게 묻는 척하며 사실상 영석을 향해 말하고 있었다.

영석은 당황스러웠지만, 자리에서 일어나 허리를 숙여 깍듯하게 인사했다.

“안녕하십니까. 김영석이라고 합니다.”

“그래. 난 이수길이야.”

영석이가 기억을 더듬어 보니 군복의 명찰에 수아의 둘째 오빠 이름이 ‘이수혁’이었다는 생각이 떠올랐다.

수길은 영석에게 악수를 청하지 않았다. 그저 턱을 살짝 들어 영석의 소파에 앉으라는 시늉을 했을 뿐이다. 영석과 수아는 다시 자리에 앉았고, 세 사람 사이에는 잠시 침묵이 흘렀다.

수길은 다방 종업원이 가져다 놓은 냉커피를 한 모금 마시더니, 영석을 향해 질문을 던졌다. 질문은 마치 취직 면접이나 신원 조회를 하는 듯한 날카로운 톤이었다.


“영석이라고 했나. 수아와는 언제부터 만났지? 그리고 수아와는 진지한 관계인가?”

“네 김영석입니다. 수아를 만난 지는 1년 정도 되었고 수아로부터 많은 도움을 받고 있습니다.”

영석은 수아와 진지한 관계가 어떤 것인지. 그리고 수아가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몰라 그 대답은 생략했다.

수길은 그의 대답에 고개를 끄덕였지만, 만족스러운 눈치는 아니었다.

“나는 수아가 우리 집안의 외동딸로서 합당한 짝을 만나 빨리 결혼하기를 바라고 있어. 영석 이 자네 집은 어디지? 부모님께서는 뭘 하시나.”

수길은 지금 이 압구정동이라는 공간이 상징하는 계층의 벽을 확인하고 있는 것처럼 보여서 영석의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저는 영등포구 목동에 살고 있습니다. 아버지께서는 아주 오래전에 돌아가셨고, 어머니는 시골에 살고 계십니다.”

영석은 차마 오목교 판자촌에 산다는 말은 할 수 없었다. 수길의 표정에 미세한 변화가 나타났다. 경멸이라기보다는, 확인된 사실에 대한 냉정한 정리와 같았다. 그는 곧바로 다음 질문으로 넘어갔다.

“학교는 어디 다니나? 지금은 몇 학년인가?”

“성균관대학교에 다니고 있습니다. 재수를 해서 이제 법학과 1학년입니다.”

간신히 후기 명문대라는 사실이 위안이 되었을까. 수길의 얼굴이 살짝 풀리는 듯했으나, 그는 곧바로 다음 질문으로 넘어갔다.

“좋아! 공부는 잘했구먼. 그렇다면 졸업 후 판검사나 변호사가 되는 건가?”

“아닙니다. 저는 교수가 되고 싶습니다.”

“교수?”

다시 수길이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교수가 된다는 게 어디 쉬운 일인가?”

“네! 쉬운 일은 아니죠.”

“사법고시 합격도 어렵지만 교수는 시간이 아주 많이 걸리는 일이잖아?”

“사법고시는 합격하면 바로 명예와 부가 따라오지만, 교수라는 직업은 석사, 박사학위를 취득해야만 하고, 요즘은 외국 유학도 다녀와야 하며, 설령 그런 자격을 취득했다 하더라도 교수가 되기 위한 절차가 얼마나 복잡한가? 내가 보기에 자네는 든든한 백을 가지고 있는 것 같지도 않은데 말이야.”

“그렇습니다.”

영석은 마지못해 대답은 했지만, 어서 이 자리를 털고 일어나고 싶은 심정뿐이었다.

“오빠! 이런 질문 하려고 우리 삼춘 데려오라고 한 거야?”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있던 수아가 급하게 끼어드는데 목소리가 잔뜩 화가 난 듯했다.

“사법고시에 합격하면 마담뚜들이 줄을 설 텐데 말이야?”

수길은 수아가 하는 말은 귓등으로 흘리고 계속 말을 이어갔다.

“네!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저는 애초에 그런 것에 대해서는 큰 관심이 없고 막연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학생을 가르칠 때 가장 큰 행복을 느낄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자네! 데모는 안 하나?”

수길이가 갑자기 대화 주제를 바꿨다.

수길은 팔짱을 풀고 상체를 테이블 쪽으로 숙였다. 다방 안의 눅진한 공기마저 긴장으로 얼어붙는 듯했다.

“자네, 성대 다닌다고 했지? 거기가 좀. 시끄러운 데 아닌가.”

수길은 갑자기 목소리를 낮추며 말했다.

“요즘 대학생들은 말야. 공부나 열심히 할 것이지, 왜 그렇게 데모하고 난리들인가?”

수길은 혀를 찼다. 그의 시선은 영석에게서 잠시도 벗어나지 않았다.

“대통령 각하의 강력한 리더십이 없었다면, 이 나라가 이만큼 발전했겠으며, 강남이 지금의 천지개벽을 이룰 수 있었겠나? 이 모든 것이 국정안정과 개발 덕분이야. 그런데 자기들 공부할 시간에 나라를 흔들어? 빨갱이 새끼들!”

수아는 아까 큰오빠에게 대들 듯하던 기세는 없어지고 고개를 숙이고 가만히 앉아 있기만 했다. 언젠가 남산에서 영석에게 큰오빠와 작은오빠의 가치관 차이가 극명하다는 말을 영석에게 했었던 터라 그러려니 하고 체념한 모습 같았다.

“나는 내 동생이, 그리고 내 동생이 만나는 사람이, 이 사회의 안정과 발전을 저해하는 어리석은 행동에 동조하는 걸 절대 용납할 수 없어.”

수길의 눈빛은 경고를 넘어 협박에 가까웠다.

“자네는 그런 데모 같은 것과 거리가 멀겠지? 혹시나 이상한 사상에 물들어, 쓸데없이 정의로운 척하면서 현실을 외면하는 건 아닌가?”

영석은 침을 삼켰다. 강북의 가난한 학생, 지식인으로서의 양심과 수아와의 관계를 유지하기 위한 현실적인 타협 사이에서 그의 머릿속은 복잡해졌다.

“저도 당연히 국가의 안정과 발전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영석은 신중하게 단어를 골랐다.

“다만 가끔 사회를 바라보며 개선되어야 할 부분이 너무 많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는 말을 잠시 끊었다가, 방금 자신을 낮춘 화법을 다시 사용했다.

“하지만 저는 당장 제 생계와 학업을 책임져야 하는 처지입니다. 과외와 공부 외에는 다른 것에 정신을 쏟을 여유가 없습니다. 아직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똑바로 볼 수 있는 눈도 없고요. 그래서 저는 교수님들 말씀대로 학업에만 충실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시끄러운 일과는 거리를 두고 있습니다.”

영석은 대답을 해놓고 갑자기 부끄러운 생각이 들었다. 경계인의 틀에 자신을 가두고 비겁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영석은 ‘나태하거나 무능하다’라고 하는 평가를 받지 않기 위해, 자신의 가난한 처지를 방패로 삼아 정치적 중립을 가장했다. 그것이 수길이 원하는 대답이라는 것을 본능적으로 알고 있었다.

수길은 그제야 입꼬리를 올리며 잔잔하게 웃었다.

“좋아. 그 점은 다행이군. 자기 앞가림이 우선이지. 명심하게. 이 압구정동은 시끄러운 소리보다는 돈소리가 더 잘 들리는 곳이니까.”


“그런데 수아야! 너 시집 빨리 가야 하지 않겠어?”

영석이를 한번 바라본 수아의 모습이 적잖이 당황한 듯했다.

“오빠 난 이제 20대 초반이라고. 대학도 가지 말라더니 이제 시집가라고 난리야.”

“너 아버지 친구분 아들 만나봤어?”

“오빠는 삼촌 앞에서 별소리를 다 하네.”

수아는 더욱더 당황한 모습으로 어찌할 바를 모르는 듯했다.

“나는 자네가 교수가 되기보다 사법고시에 합격해 이 나라를 이끌어갈 인재가 되든지, 아니면 돈을 많이 벌어 강남에서 큰 사업을 하여 앞으로 부촌이 될 이곳에서 아파트 한 채 정도는 살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네. 요즘 강북 부자들이 모두 이곳으로 몰려들고 있잖아?”

수길이는 사업가로서의 냉철함으로 영석의 미래를 재단하려 했다. 영석은 그의 마지막 말에서 묘한 모욕감을 느꼈다. 압구정동 사람들에게는 교수라는 타이틀보다 ‘강남 아파트 한 채’를 살 수 있는 현실적인 능력이 더 중요한 것 같았기 때문이다. 영석은 창밖으로 눈을 돌렸다. 봄날 오후의 햇살 아래, 저 밖에는 새로 솟아오른 현대아파트의 회색 콘크리트 벽이 눈부시게 빛나고 있었다. 저 벽들은 단순한 건물이 아니라, 그와 수아 사이에 놓인 거대한 계층의 장벽 같았다.

“내가 매우 바빠. 식사라도 한 끼 사줘야 옳겠지만 다음 기회에 하기로 하고 수아와 좋은 시간 보내게.”

수길이 자리에서 일어나 처음으로 영석에게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하고 계산을 한 후 다방을 나갔다.


수길이 다방 문을 닫고 나간 후에도, 영석은 한참 동안 멍하니 앉아 있었다. 좁은 다방 안은 수길의 냉철하고 압도적인 존재감이 남긴 연기처럼 무거운 공기로 가득했다. 테이블 위에는 방금까지 수길이 마셨던 냉커피 잔이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영석은 아까 자신이 내뱉었던 말들이 떠올라 부끄러웠다. “학업에만 충실하고 시끄러운 일과는 거리를 둔다.” 그 말은 현실의 비겁함을 포장하기 위해 급조한 변명이었다. 하지만 수길의 입꼬리가 올라가는 것을 보았을 때, 그것이 바로 그가 듣고 싶어 하는 대답임을 알 수 있었다.

수아가 영석의 곁으로 바싹 다가앉아 그의 손을 잡았다. 그녀의 손은 따뜻했고, 눈에는 미안함과 자책감이 가득해 보였다.

“삼춘… 정말 미안해."

수아는 속삭이듯 영석의 귀에 입술을 가까이 대면서 말했다. 그녀의 목소리는 오빠에게 대들던 기세가 온데간데없이 축 처져 있었다.

“우리 큰오빠가 원래 저런 사람이야. 압구정동에 살기 시작하면서부터 더 심해졌어. 모든 걸 돈과 성공, 그리고 안정이라는 잣대로만 재단하거든. 삼춘을 데려와서 그 벽을 보게 한 내 자신이 정말 밉다.”

영석은 수아의 손을 꽉 잡아주었다.

“수아 잘못이 아니야. 나는 괜찮아.”

“괜찮을 리가 없잖아. 아까 오빠 말에 얼마나 모욕감을 느꼈을지 알아. 교수는 꿈도 아니라는 듯이 말하고, 데모를 안 하는 것이 마치 자격을 증명하는 일인 것처럼…”

수아는 다 이상 말을 잇지 못하고 울먹였다.

“나 때문에 삼춘이 힘들어하는 모습을 보니까 너무 가슴이 아팠어.”

“아냐. 그건 사실이야. 나는 아직 내 힘으로 너와 오빠 사이에 놓인 그 장벽, 저 밖에 빛나는 콘크리트 벽(아파트)을 넘을 수 있는 처지가 못 돼. 나는 겨우 과외해서 등록금이나 버는 강북 학생일 뿐이야.”

“그만해.”

수아는 영석의 입을 검지로 막았다.

“나는 강북이 좋아. 삼춘이 꿈꾸는 교수라는 이상이 좋아. 큰오빠가 말하는 저 돈소리가 나는 말은 듣기 싫어. 오빠의 말로 삼촌 자신을 평가하지 마. 삼춘이 내 옆에 있다는 사실이, 내게는 가장 큰 힘이야.”

수아는 영석에게 힘을 실어주려는 듯, 그의 손을 꼭 쥐고 눈을 맞췄다.

“오늘은 내가 저녁 살게. 큰오빠 때문에 기분 망쳤으니까, 맛있는 거 먹자. 그리고 도곡동 과외수업, 늦지 않게 내가 직접 데려다줄게.”


오후 늦은 시간, 두 사람은 다방을 나와 압구정동을 벗어났다. 수아는 왠지 모르게 초라해진 영석을 위해 한양쇼핑센터 근처의 돈가스 전문점으로 그를 데리고 갔다. 영석은 수아의 따뜻한 위로 덕분에 점차 긴장을 풀고 원래의 활기를 되찾았다. 식사를 마친 후, 수아와 영석은 버스를 타고 도곡동 동신아파트까지 갔다. 동신아파트는 작년에 세워졌는데 최신식으로 지어졌다. 어둠이 내리기 시작하고 가로등 불빛이 희미하게 비치기 시작했다. 수아의 섬세한 배려에 영석은 고마움을 느꼈다.

“도착했네. 고마워, 덕분에 오늘 하루 즐거웠어.”

영석이는 마음이 무거웠지만 애써 즐거웠다고 말했다.

영석이 수아에게 손을 흔들며 동신아파트 정문을 향해 돌아서려고 했을 때였다.

“잠깐만.”

수아가 작지만 단호한 목소리로 외쳤다.

영석이 고개를 돌리기도 전에, 수아가 기습적으로 영석에게 몸을 기울였다. 그의 얼굴을 두 손으로 감싸더니, 입술이 영석의 입술에 부드럽게 닿았다.

따뜻하고 달콤한, 짧지만 강렬한 입맞춤이었다.

영석은 눈을 크게 떴고, 몸이 경직되었다. 수아는 곧바로 입술을 떼고는, 얼굴을 붉힌 채 숨을 몰아쉬었다.

“이건 삼춘이 오빠에게 당한 수모, 그리고 오빠가 자신을 스스로 낮춘 것에 대한 보상이야.”

수아는 부끄러움을 감추려는 듯 장난기 어린 목소리로 속삭였지만, 눈빛은 진심이었다.

영석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의 심장은 격렬하게 요동쳤고, 수길에게 느꼈던 모든 모욕감과 비관은 이 짧은 순간의 충격과 설렘으로 인해 깨끗이 씻겨 내려가는 듯했다.

“늦겠다. 어서 가.”

수아는 더 이상 영석을 바라보지 않고 말했다.

영석은 입술을 매만졌다. 수길의 냉정한 현실과 수아의 뜨거운 위로가 교차하는 순간이었다. 이제 그는 아파트 정문을 들어서야 한다. 수길이가 한 말과 수혁이가 한 말을 되씹어 보며 영석은 수아와 함께 하기 위해 자신이 선택해야 할 길이 무엇인지 다시 한번 생각했다.

수아가 갑자기 손을 흔들더니 뒤돌아 달려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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