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쓰기와 나

by 서완석

과거의 국민학교를 이제는 초등학교라 부르니, 나도 초등학교 시절이라 일러야겠다. 초등학교에 들어가기 전, 나는 한글보다 한자를 먼저 익혔다. 대도시에 살던 우리 가족이 첩첩산중 마을까지 흘러 들어간 사연은 구구절절하여 여기에서 다 밝힐 순 없으나, 그 굽이진 길 끝에 내 유년의 문장이 시작되었다.


그 마을에서 내가 네 살 되던 해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벌써 예순두 해 전의 일이다. 나는 어느덧 그때의 아버지보다 훨씬 많은 나이를 살고 있다. 갑자기 비어버린 아버지의 자리는 컸고, 어머니의 고생은 이루 말로 다할 수 없었다. 그런 며느리가 안쓰러웠던 할아버지는 전북 정읍의 시내 생활을 정리하고, 고창군 아산면 반암리 탑정이라는 시골 마을에 서당을 여셨다. 근대와 전근대의 문명이 묘하게 뒤섞여 있던 시절이었다. 머슴을 두고 사는 집이 여전히 존재했고, 20분 거리의 아산국민학교 대신 서당을 찾는 이들도 제법 있었다.


할아버지는 동네 부잣집인 월곡댁네 사랑방을 빌려 훈장이 되셨고, 네 살배기 나도 형들 틈에 끼어 제자가 되었다. 베잠뱅이를 입은 열 살 위의 형들과 나란히 앉아 어깨를 좌우로 흔들며 '하늘 천, 땅 지'를 읊조리던 기억이 선하다. 제시간에 외우지 못하면 목침 위에 올라가 회초리를 맞아야 했던 엄한 교육이었으나, 다행히 머리가 말랑말랑했던 나는 가장 빨리 천자문을 떼었다.


보통 천자문을 떼면 '책거리'라 하여 떡과 식혜를 동네 사람들과 나눠 먹는 풍습이 있었다. 형들의 책거리에 음식을 얻어먹은 기억은 생생한데, 정작 내 책거리의 기억은 머릿속에 없다. 그때 마무리를 제대로 못 해서 평생 어리바리하게 사는 건 아닌가 싶다가도, 나이 들어 보니 그때 익힌 한자 실력이 지금 내 문해력의 든든한 뿌리가 되었음을 실감한다.


초등학교 입학 이틀 전, 누이에게 배운 한글로 간신히 망신을 면한 뒤, 공부는 곧잘 해서 소규모 학교지만 전교 1등을 놓쳐본 적은 없다. 책 읽기는 무엇보다 달콤한 낙이었다. 만화책이고 뭐고 닥치는 대로 읽었다. 학교 운동장에는 일제강점기에 심었다는 아름드리 벚나무가 꽃구름처럼 피어났고, 그 옆으론 넓은 뽕나무밭이 있었다. 우리는 퇴비 증산을 위해 풀을 베어 나르고, 뽕나무를 가꾸는 중노동에 동원되곤 했다. 그리고 잠실에서는 우리가 키우는 누에가 "사각, 사각" 소리를 내며 잘도 컸다. 그리고 그 노동의 산물인 고치를 팔아 도서실에 구비한 2,500여 권의 책은 내 영혼의 양식이 되었다. 뽕나무밭 가꾸기는 싫어도 도서실에서 책읽는 일은 너무나 행복했다. 그런데 도서실에 있던 책을 다 읽고 난 뒤 책에 대한 갈증이 너무 심해졌다. 그래서 나는 내가 살고 있던 동네는 물론이거니와 이웃 마을까지 책 구걸을 하러 다녔고, 그때의 독서 열정은 40여 년간 학생들 앞에서 떠들 수 있었던 생명력의 원동력이 되었다.


가난한 집에는 책상이 없었다. 팔꿈치에 굳은살이 박이도록 엎드려 책을 읽는 내 모습이 안쓰러웠는지, 담임이셨던 고종석 선생님은 부서진 책상들을 모아 하얀 페인트를 칠한 '세상에 하나뿐인 책상'을 직접 메고 우리 집까지 오셨다. 그 책상에서 내 글쓰기 재능도 자라났다. 각종 백일장과 휘호대회에서 최고상을 휩쓸었고, 그림도 잘 그려서 사생대회에서도 많은 상을 받았다. 정읍의 큰 학교로, 다시 인천의 중고등학교로 전학 가서도 내 이름은 늘 학교 대표로 불려 나갔다. 다만 내가 받은 수많은 상패가 내 손이 아닌 학교 교장실이나 중앙 현관 전시실로 직행해버린 것은 지금 생각해도 못내 서운한 일이다.


중학교 시절엔 영화라는 또 다른 갈증이 찾아왔다. 할아버지께 이미 참가해서 상을 받았는데도 다시 '고전 읽기 대회' 참가비가 필요하다며 5원을 타내는 '효심 어린 사기'를 쳤다. 1원으로 오거리 시장에서 건빵 한 됫박을 사서 양쪽 주머니에 가득 채우고, 남은 4원으로 중앙극장에서 삼본 동시 상영 영화를 보던 그 시간은 불효막심했으나 황홀했다. 인천으로 전학을 오면서 너무나 가난했던 자취 생활 덕분에 영화관과의 밀월도 끝이 났다. 그러나 독서와 영화가 남긴 잔상은 내 글쓰기에 있어 영혼을 뒤흔드는 자양분이 되었다.


그 후 대학과 대학원을 거치며 글쓰기는 다시 시작되었으나, 그것은 남을 비판하고 논리를 세우는 딱딱한 법률 문장의 연속이었다. 쓸수록 허기가 졌다. 가슴 내밀한 곳까지 충만해지는 느낌이 없던 차에, 은사이신 이범찬 교수님의 권유로 수필가로 등단하게 되었다. 그러나 1년에 서너 번 오는 원고 청탁은 글 쓰는 흥을 돋우기엔 부족했다.


그러다 만난 '브런치 스토리'는 내게 시절인연과도 같았다. 정년퇴임 후 소주 한 잔 값이나 벌어볼까 하고 자격증 공부를 고민하던 찰나, 덜컥 작가 승인을 받고 글쓰기에 중독되었다. 내 글을 기다리는 친구들의 성화를 핑계 삼아 밤을 새우는 일이 즐겁다. 내 독자층인 50대 이상은 눈이 침침해서, 혹은 회원가입이 번거로워서 '좋아요' 하나 누르는 것도 힘겨워하지만, 가만히 생각해보니 글을 쓰는 이 순간 내가 즐겁고 행복하다면 그것으로 충분한 것 아닌가.


글쓰기는 내 숙명인지도 모른다. 예순이 훨씬 넘은 지금도 팔꿈치에 박였던 옛 굳은살의 기억으로 나는 여전히 뭔가를 적고 있다. 그렇게 나는 오늘도 내 안의 갈증을 문장으로 채워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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