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8년-1980년 언저리
1980년의 첫새벽은 희망보다 서늘한 금속성 냄새가 강하게 풍겨왔다. 12·12 군사반란으로 군권을 장악한 보안사령관 전두환은 전면에 나서기보다 희미한 안개 속에서 실타래 같은 권력의 가닥을 찾아 하나하나 엮어가고 있었다. 그는 ‘단결된 군부의 기반을 주축으로 지속적인 국력 신장을 위한 안정세력 구축’이라는 목적을 가지고 이른바 ‘K-공작 계획’을 가동하여 언론사 간부들을 포섭하고, 검열을 일상화하는 ‘언론 회유 공작 계획’을 실행했다. ‘대외비’로 되어 있는 K-공작 계획 관련 문서에는 “본 공작은 고도의 보안이 요구되므로 K-공작이라 약칭한다.”라는 문구가 적혀 있었다. 이를 통해 신문사마다 배치된 검열관들은 그들에게 주어진 빨간 펜을 사용하여 신군부에 비판적인 단어들은 가차 없이 그어버렸다. 따라서 활자나 소리는 오들오들 떨었고, 세상은 오직 전두환 세력이 허락한 소리만 낼 수 있었다.
중앙정보부를 사실상 장악한 신군부는 최규하 정부를 허수아비로 세워둔 채, 학원가와 노동계를 ‘불순분자’의 온상으로 규정했다. 대학 캠퍼스는 방학 중임에도 불구하고 곳곳에 사복형사들이 숨어들었다. 3월, 개강과 함께 ‘서울의 봄’이라 불리는 민주화의 열망이 고개를 들기 시작했으나, 그것은 이미 그물 안에 갇혀 파닥거리는 물고기의 몸짓과 같았다.
영석은 개강 후 며칠 동안 도서관에 앉아 있었다. 그러나 헌법 교과서 상의 ‘국민의 기본권’이라는 글자가 너무나 낯설고, 맥이 풀려 아무런 힘도 없는 단어로 느껴졌다. 그리고 창밖에서는 최루탄 냄새가 바람을 타고 스멀스멀 기어들어 왔다. 여기저기서 학생들의 기침 소리와 콧물 훌쩍이는 소리가 들리고, 하나 둘씩 가방을 챙겨 나가는 학생들도 보였다. 법학 교수가 되어 학생들에게 어떻게 사는 것이 올 바른 삶인지, 정의가 무엇인지를 신나게 가르치고 싶었던 영석의 꿈은 거센 바람 앞에 놓인 한 개의 촛불 같았다.
“영석아, 언제까지 이 두꺼운 책 속에 코를 박고 있을 거냐? 밖을 봐라. 지금 헌법이 유린당하고 있는데 법조문은 외워서 뭐 하게?”
언제 들어왔는지 태종이가 도서관에 앉아 공부하고 있던 영석의 헌법 교과서를 거칠게 덮어버렸다. 영석은 주저했다. 수혁이 형님과 수아의 얼굴이 떠올랐고, 옥수동의 지석이 형님과 정희 누나, 곰소댁, 그리고 시골에 계신 엄마의 기대 섞인 눈빛이 폐부를 찌르는 듯했다. 그러나 밖에서 들려오는 친구들의 구호 소리는 영석의 비겁함을 송곳으로 계속해서 더 세게 찔러댔다. 결국 영석은 가방을 챙겨 태종을 따라나섰다.
학교 정문 앞은 이미 아수라장이었다. ‘계엄령 해제’와 ‘전두환 퇴진’을 외치는 학생들 앞을 거대한 페퍼포그 차가 막아섰고, 하얀 최루 가스가 골목에 자욱하게 깔렸다. 영석은 태종의 뒤를 따르며 소리쳤다. 하지만 공포는 구호보다 빨랐다. 갑자기 골목 안쪽에서 전경들이 정문쪽으로 들이닥쳤고, 학생들은 사방으로 흩어졌다.
“뛰어! 영석아!”
태종의 외침을 들으며 영석은 골목길을 벗어나 죽을힘을 다해 다시 학교 정문 안쪽을 향해 달렸다. 하지만 젖은 대성로 아스팔트 바닥에 구두가 미끄러졌고, 영석은 그대로 고꾸라졌다. 3월이라지만 아직은 쌀쌀한 날씨에 아스팔트 바닥은 냉기가 느껴졌다. 바지가 찢어지고, 무릎과 손바닥이 까졌는지 쓰리고 아팠다. 태종이가 영석을 부축해 일으켜 세웠다.
넘어지고 깨진 무릎의 통증보다 더 강렬한 것이 영석의 가슴을 치고 올라왔다. 그것은 평생을 ‘모범생’이라는 울타리 안에 갇혀, 체제에 순응하며 법전을 금과옥조로 여겼던 영석이 난생처음으로 느낀 생경한 해방감, 즉 카타르시스였다. 아니 어쩌면 지금까지 그의 가슴 속에 암 덩어리처럼 남아 있던 부채 의식에서의 해방감이었는지도 모른다.
태종의 거친 손에 이끌려 다시 일어선 영석의 입안에서는 비릿한 피 맛이 났다. 넘어지며 입술도 깨진 것 같았다. 그러나 손바닥의 껍질이 벗겨져 진물이 배어 나오더라도 이상하게도 아픔보다는 형언할 수 없는 뜨거운 기운이 전신을 감돌았다.
법학을 배운 지 1년여가 지난 지금껏 영석에게 법은 ‘지켜야만 하는 차가운 명령’이었고, 책 속의 활자는 ‘머릿속에 구겨 넣어야 할 출세의 도구’였다. 하지만 최루 가스 자욱한 대성로 한복판에서, 그는 자신이 그토록 매달렸던 법전 속의 ‘기본권’이 종이 위의 글자가 아니라, 바로 이 매캐한 연기 속을 뚫고 터져 나오는 학생들의 외침과 구둣발 속에 살아있음을 느꼈다.
“가자, 영석아! 쫄지 마!”
태종의 외침에 영석은 흙먼지 묻은 바지를 털어낼 생각도 잊은 채 다시 구호를 외쳤다.
“계엄령을 해제하라! 전두환은 물러가라!”
처음 내뱉은 목소리는 어색하게 갈라지고 미약했다.그러나 두 번째, 세 번째 구호는 가슴 깊은 곳 단전에서부터 끓어올랐다. 그 순간, 영석을 억누르던 수많은 시선, 즉 지석이 형님이 자신이 이루지 못한 꿈을 사촌 동생이 대신 이루어줄 것이라는 기대, 이제는 고생 끝났다고 생각할지도 모르는 엄마의 기대, 법대생이라면 당연히 고시에 합격해 출세의 길을 걸을 것이라고 하는 보이지 않는 족쇄, 법전을 들고 다니면 선망의 눈빛으로 바라보던 뭇사람들의 시선, 사회적 신분을 보장해 주리라는 법학도의 무게감이 최루 가스에 깨끗이 씻겨 내려가는 듯했다.
단순히 시위에 참여했다는 뿌듯함이 아니었다. 그것은 태어나서 처음으로 자신의 의지로 금지된 선을 넘었다는 ‘쾌락’이었고, 비겁하게 침묵하던 자아를 깨부수고, 세상의 불의에 직접 몸을 부딪치고 있다는 ‘실존의 확인’이었다.
쏟아지는 돌멩이와 최루탄 소리 속에서 영석은 아이러니하게도 가장 강렬한 생의 활력을 느꼈다. 차디찬 아스팔트 위에 흩뿌려진 학생들의 핏자국이 무서운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피가 자신과 같은 온도로 흐르고 있다는 동질감이 그를 전율케 했다. 도서관의 묵은 먼지 냄새가 아닌, 화약 냄새와 땀 냄새가 섞인 이 아수라장이 그에게는 비로소 ‘진짜 세상’처럼 다가왔다. 그리고 이 짧은 순간의 카타르시스는 영석에게 잠시나마 법전보다 뜨거운 진실이 존재함을 가르쳐주었다.
영석은 다시 입안에 고인 핏물을 뱉어냈다. 코끝을 찌르는 최루 가스 때문에 눈물과 콧물이 범벅이 되었지만, 이상하게도 정신은 그 어느 때보다 맑아졌다. 주위를 둘러보니 금잔디 광장을 가득 메웠던 동기들이 학교 정문을 벗어나 스크럼을 짜고 경찰의 저지선과 맞서고 있었다.
법전이라는 좁은 틀 속에서 '정의'를 활자로만 배웠던 영석에게, 지금 이 현장은 생생한 법정이다. 교실에서 들었던 헌법 제1조가 명륜동의 매캐한 공기 속에서 비로소 육성을 얻어 터져 나오고 있었다. 영석은 태종과 어깨동무를 하며 다시 한번 목이 터져라 구호를 외쳤다.
“전두환은 물러가라! 계엄령을 해제하라!”
그것은 스무 해 이상을 순종하며 살아온 ‘착한 아들’, ’샌님‘ 영석이가 세상의 불의를 향해 내뱉는 최초의 사자후였다. 가슴 밑바닥에서부터 뜨거운 것이 울컥 치밀어 올랐다. 이 거대한 흐름의 일부가 되었다는 일체감, 그리고 금지된 선을 제 발로 넘어섰다는 해방감은 계속해서 영석의 온몸을 전율케 했다.
“영석아! 오늘 종로까지 가는 거야!”
태종의 외침과 함께 성균관대 정문을 뚫고 나온 학생 대열이 원남동 로터리를 향해 쏟아져 들어갔다.
1980년 3월 말, 대학가의 학내 시위가 비로소 담장을 넘어 도심 가두 시위로 번지기 시작했다. 최루탄 소리가 천둥처럼 울리고. 페퍼포그 차가 뿜어내는 하얀 안개가 시야를 가렸지만, 옆 사람의 어깨에서 느껴지는 체온이 영석을 지탱했다.
하지만 그 카타르시스는 짧고 강렬했다. 대열이 종로 4가 인근에 다다랐을 때, 길목을 차단하고 있던 전경들과 사복 체포조인 ’백골단‘이 무자비한 진압을 시작했다. 그들은 곤봉을 들고 사방에서 달려들었다.
“이 새끼들, 다 잡아! 한 놈도 놓치지 마!”
그러나 학생들의 대열은 백골단의 저지선도 뚫었다.
학생들의 대열은 거대한 파도처럼 종로의 심장부를 파고들었다. 원남동 로터리를 지나 종로 4가에 접어들자, 공기는 더욱 팽팽해졌다. 선두에 선 학생들이 깃발을 흔들며 목소리를 높였다.
“비상계엄 철폐하라!”, “유신 잔당 물러가라!”, “정치 일정 단축하라!”
1980년 3월 초의 서울은 흡사 축제 전야와 같았었다. 2월 29일, 마침내 김대중의 복권 소식이 전해지자 명동과 종로 일대는 금방이라도 민주화라는 이름의 꽃이 만개할 듯 들썩였다. 7년 만에 정치적 족쇄를 풀고 대중 앞에 선 김대중의 동교동 자택에는 연일 인산인해를 이룬 지지자들의 환호가 담장을 넘었고, 신민당 총재 김영삼은 '새벽이 오고 있음'을 확신하며 가파른 대권 행보를 이어갔다. 유신 체제의 중심에 서 있던 김종필조차 낡은 옷을 갈아입고 '새로운 시대의 조류'를 논하며 3김(三金)의 각축전에 불을 지폈다. 그러나 신군부의 속셈은 다른 데 있었다.
이를 눈치 챈 대학생들은 신군부가 민주화 일정을 미루며 권력을 공고히 하려는 야욕에 맞서서, 날 선 구호를 외치기 시작했다. 영석은 생전 처음 느껴보는 군중의 위압감과 연대감 속에 휩쓸려 있었다. 명륜동의 좁은 교정을 벗어나 넓은 종로 한복판에 섰을 때의 그 기묘한 해방감은 영석의 심장을 터질 듯 뛰게 했다. 대열이 퇴계로와 이어지는 삼일로 입구에 다다랐을 때, 마침내 운명의 벽과 마주했다. 남산 방향과 명동 성당 방향에서 쏟아져 나온 전경들이 도로를 빈틈없이 메우고 있었다. 시커먼 진압 방패들이 벽을 만들었고, 그 위로 최루탄 발사기가 불을 뿜었다.
“퍽, 퍼펑!”
사방에서 하얀 연기가 피어오르며 앞이 보이지 않는 안갯속으로 변했다. 영석은 눈이 타들어 가는 고통에 비틀거렸지만, 누군가 등 뒤에서 밀어붙이는 힘에 떠밀려 전진했다.
“돌을 던져! 밀리지 마!”
누군가의 외침과 함께 보도블록을 깬 돌덩이들이 허공을 갈랐다. 학생들은 도로 위로 쏟아져 나와 깨진 보도블록 조각을 전경의 방패 벽을 향해 던졌다. 1980년의 삼일로는 최루탄 연기와 투석전으로 인해 전쟁터나 다름없었다. 버스와 택시들은 꼼짝없이 길 위에 멈춰 섰고, 도심의 동맥은 완전히 마비되었다.
하지만 그 혼란 속에서 영석의 눈에 들어온 것은 시민들의 얼굴이었다. 길가에 멈춰 선 버스 차창 밖으로 시민들이 고개를 내밀었다. 평소라면 교통 체증에 짜증을 낼 법한 상황이었지만, 그날의 공기는 달랐다. 육교 위에 멈춰 선 행인들은 학생들을 향해 박수를 보내고, 상가 건물 2층 창문에서는 학생들을 응원하는 손수건이 흔들렸다.
“학생들, 힘내라!”
어디선가 들려온 중년 남성의 외침이 영석의 귓가를 스쳤다. 옆에 멈춰 선 시내버스 안의 승객들은 최루 가스에 눈물을 흘리면서도 가방에서 손수건을 꺼내 창밖의 학생들에게 건넸다. 인근 상인들은 가게 앞에 물 양동이를 내놓으면서 최루 가스를 씻어내라고 했다. 영석은 깨달았다. 이 싸움은 소수 학생만의 고독한 외침이 아니었다. 침묵하고 있던 거대한 다수의 마음이 학생들의 어깨 뒤에 머물고 있었다. 시민들이 보내는 무언의 지지와 응원은 최루탄 연기보다 더 강렬하게 영석의 폐부를 찔렀다.
“영석아, 이쪽이야! 명동 성당 쪽으로 붙어!”
태종이 영석의 셔츠 깃을 잡아끌었다. 영석은 구두 한 짝이 벗겨질 뻔한 위기를 넘기며 좁은 골목으로 몸을 날렸다. 등 뒤에서 들려오는 거친 군화 소리와 비명, 그리고 시민들의 안타까운 탄식이 뒤섞인 삼일로의 오후는 뜨거운 함성으로 타오르고 있었다.
영석은 숨을 몰아쉬며 골목 벽에 등을 기댔다. 손바닥의 상처가 다시 쓰려왔지만, 누군가 손에 쥐어 준 주머니 속 돌멩이의 감촉이 뜨거웠다. 그러나 영석은 돌멩이를 던지지 않았다. 어린 시절 읽었던 마하트마 간디의 전기 ’진리를 찾아서‘라는 책을 읽고 엄청난 감명을 받았던 기억 때문이다. 간디는 자신의 비폭력 운동을 ’사티아그라하(Satiagraha, 진리의 힘)라고 부르며, 진실에 대한 집착과 비폭력적 저항을 결합한 정치·윤리 실천으로 이해했다. 그리고 그의 사상의 핵심은 상대를 ‘적’으로 간주하여 제거하는 것이 아니라, 폭력 사용을 거부한 채 불복종·단식·행진 등으로 도덕적 우위를 확보하여 상대의 양심에 호소하고 국제 여론을 자신들에게 유리하게 바꾸려는 것이었다. 1930년의 ‘소금 행진’에서 그와 민중은 ‘소금법’에 항의해 240km를 행진하며 폭력 없이 체포와 구타를 감수했고, 이는 전 세계에 인도의 독립 문제를 각인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그는 “비폭력은 약자의 변명이 아니라 강자의 무기”라고 했다. 어린 시절 읽었던 책 한 권이 영석의 가치관을 질기게 붙들고 있는 것이다.
영석은 태종과 잡은 손을 놓치지 않으려 애썼지만, 뒤에서 날아온 곤봉이 영석의 어깨를 강하게 후려쳤다.
“악!”
비명과 함께 영석은 다시 아스팔트 바닥으로 고꾸라졌다. 이번에는 태종이 부축할 틈도 없었다. 시커먼 군홧발들이 영석의 시야에 가득 들어왔다. 영석은 얼굴을 감싸 쥐었지만, 거친 손길이 그의 뒷덜미를 낚아채 개처럼 끌고 갔다.
“놔! 이거 놔!”
영석은 발버둥 쳤으나 장정 셋이 달라붙은 힘을 당해낼 수 없었다. 삼일로의 아스팔트 위로 영석의 구두 한 짝이 벗겨져 덩그러니 남았다. ‘닭장차’라 불리는 호송차 안으로 처박히기 직전, 영석은 저 멀리서 전경들에게 포위된 채 끝까지 구호를 외치다 쓰러지는 태종의 모습과, 안개처럼 자욱한 최루 가스 너머로 희미하게 보이던 삼일로의 낡은 간판들을 보았다. 닭장차 안으로 끌려 들어간 영석이 뒤로 태종이 역시 붙들려 왔다.
영석이와 태종이는 등 뒤로 낚아채인 채 닭장차의 좁고 컴컴한 내부로 내던져졌다. 발버둥 칠 틈도 없이 옆에서 따라 들어온 백골단원들이 그의 어깨를 짓눌러 바닥에 엎드리게 했다. 이미 차 안은 최루액과 구토물, 그리고 피비린내가 뒤섞인 지옥이었다. 영석처럼 끌려온 수십 명의 학생들이 콩나물시루처럼 포개져 있었다. 대부분의 학생들은 등 뒤로 양손을 깍지 끼고 고개를 숙인 채 움직이지 못했다.
“야, 이 새끼들아! 뚫린 주둥아리로 어디 한 번 더 외쳐봐!”
백골단원들의 거친 욕설과 함께 닭장차 문이 ‘쿵’ 하고 닫혔다. 완전한 암흑 속에 영석은 숨쉬기조차 어려웠다. 고개를 들면 곤봉이 날아올 것이 분명했기에, 그는 옆 사람의 등짝에 얼굴을 묻고 온몸을 웅크렸다.
그때였다. 닭장차 안을 가득 채운 절망적인 침묵을 깨고, 끔찍한 소리가 들려왔다.
“터벅... 터벅... 터벅...”
날카로운 구두 굽이 시멘트 바닥이 아닌, 사람의 등 위를 밟고 지나가는 소리였다. 영석은 몸을 움찔 떨었다. 끌려온 학생들의 등 뒤로 깍지 낀 손을 짓누르고 고개 숙인 머리 위를 백골단원이 구둣발로 밟고 지나가는 것이었다. 한발 한발, 내디딜 때마다 학생들의 비명 섞인 신음이 터져 나왔다.
“으읍... 끄윽...”
“아가리 닥치고 있어! 이 새끼들아!”
잔뜩 날이 선 구둣발이 영석의 엉덩이를 강하게 걷어찼다. 이어 그의 등 위로 올라서더니, 뼈마디를 짓누르는 고통과 함께 날카로운 구두 굽이 그의 뒷머리 위를 스치고 지나가는 듯했다. 흙먼지와 함께 비릿한 핏물이 영석의 눈에 들어왔다. 죽을 것만 같았다. 간디의 사티아그라하를 읽으며 ‘비폭력은 강자의 무기’라 생각했던 영석의 가치관은, 이 무자비한 폭력 앞에서 마치 촛농이 흘러내리듯 무력하게 꺾여 내렸다. 간디의 비폭력 정신은 이 닭장차 안에서는 한낱 부질없는 이상에 불과했다. 저들은 진실이나 양심에 호소할 대상이 아니었다. 그저 고통을 가하는 것만이 목적이고, 굴종을 받아내는 것만이 저들의 방식이었다. 영석은 깨달았다. 이 폭력은 영혼을 부수고, 인간의 존엄성을 짓밟는 것이었다.
닭장차가 ‘덜컹’ 소리를 내고 출발하며 격렬하게 흔들렸다. 영석은 옆 사람의 피 묻은 옷깃을 움켜쥐고 눈을 질끈 감았다. 구둣발 소리는 여전히 닭장차 안을 맴돌았고, 으스러지는 고통 속에 학생들의 비명이 계속해서 터져 나왔다. ‘서울의 봄’은, 영석에게 이 닭장차 안에서 가장 잔혹한 겨울의 맛을 선사하고 있었다.
1980년 3월의 봄은 그렇게 영석의 손등에 피멍을 남긴 채, 동대문경찰서 유치장의 차가운 쇠창살 안으로 그를 밀어 넣고 있었다. 영석은 차가운 호송차 바닥에 얼굴을 묻으며 아까까지 느꼈던 그 뜨거운 해방감이 현실인지, 아니면 이 차가운 유치장 안이 현실인지를 생각했다.
영석이 끌려 들어간 동대문경찰서 취조실은 한 평 남짓한 좁고 폐쇄적인 공간이었다. 창문 하나 없는 사방은 두꺼운 방음벽으로 둘러싸여 외부의 소리를 철저히 차단했다. 방 안에는 낡은 책상 하나와 의자 두 개, 그리고 천장에 매달린 낡은 백열등 하나뿐이었다. 남영동 대공분실은 치안본부 산하 전문 대공분실로 고급 조사실과 특수 취조시설을 갖추고 있다면 일반 경찰서 취조실은 형사과나 보안과 내 유치장 연계 공간으로 전국 경찰서 표준구조다.
형사는 영석을 의자에 앉히자마자 천장의 전등갓을 영석의 얼굴 쪽으로 확 꺾어내렸다.
“야, 눈 똑바로 떠.”
백열등의 강렬한 빛이 영석의 시신경을 직접 찔렀다. 주변은 온통 칠흑 같은 어둠으로 변했고, 오직 영석의 얼굴만이 벌거벗겨진 듯 환하게 노출되었다. 이는 피의자가 주변 상황을 인지하지 못하게 하여 고립감을 극대화하고, 수사관은 어둠 속에서 피의자의 미세한 표정 변화를 관찰하며 심리적 우위를 점하기 위한 ‘조명 고문’의 전형이었다.
빛이 너무 강해 눈을 제대로 뜰 수 없었지만, 형사는 영석이 눈을 감으려 할 때마다 책상을 내리치며 호통을 쳤다. 열기를 내뿜는 백열등 아래서 영석의 얼굴은 금세 땀범벅이 되었다. 어둠 속에서 들려오는 형사의 목소리는 마치 벽 너머 귀신의 소리처럼 들렸고, 그가 휘두르는 손길이 언제 어디서 날아올지 몰라 영석의 공포는 극에 달했다.
“성대 법대생이면 머리 좋겠네. 이 종이에 네가 아는 주동자 이름들 다 적어. 그러면 바로 집에 보내줄게. 아니면 밤새워서 이 불빛 아래 있든지.”
사실 영석이가 아는 동료는 태종이 뿐이다. 그 이외에는 불고 싶어도 불 인물이 없는 것이다.
영석은 눈을 감고 싶었다. 하지만 감은 눈꺼풀 위로도 붉은 혈관의 잔상이 일렁였다. 그는 간디의 ‘사티아그라하’를 떠올리려 애썼다. 간디는 비폭력은 강자의 무기라고 했지만, 지금 그를 비추는 저 잔인한 백열등 빛은 영석의 신념을 비웃듯 그의 뇌신경을 갉아 먹고 있었다. 이 좁은 방 안에서 ‘진실의 힘’은 백열등의 열기 앞에 증발하는 땀방울보다 가벼웠다.
그렇게 이틀 밤을 지낸 후 영석은 유치장 면회실로 끌려 나갈 수 있었다. 비상계엄 아래서 시위 학생의 면회는 원칙적으로 금지였으나, 영석의 경우 ‘단순 가담’으로 분류된 데다, 태종이 아버지가 인맥을 동원해 경찰서 담당자에게 소위 ‘활동비’ 명목의 뒷돈을 찔러줬고, 태종이가 소낙비는 피하고 보자고 설득하는 바람에 마지못해 반성문을 쓴 덕에 간신히 성사된 면회였다.
쇠창살 너머로 마주한 수아는 영석의 얼굴을 보자마자 오열했다. 백열등 아래서 핏기가 가신 영석의 얼굴은 종잇장처럼 하얗게 질려 있었고, 초점 잃은 눈은 허공을 떠돌았다.
“삼춘! 어쩌다 이 꼴이 됐어.”
정희는 차마 울지 못하고 창살을 움켜쥐었다. 영석의 떨리는 손등 위로 정희의 눈물이 떨어졌다.
사흘째 되는 날, 영석과 태종은 ‘학원 소요 사태 재발 방지’ 서약서에 지장을 찍고 경찰서 정문을 나섰다. 경찰서 정문을 나오며 그가 느낀 것은 자유의 기쁨이 아니라, 자신이 그토록 신봉하던 법과 정의가 국가 폭력 앞에 얼마나 무력한지에 대한 뼈저린 자괴감이었다. 그의 손등에 남은 시퍼런 피멍은 1980년 3월의 ‘봄’이 사실은 얼마나 지독한 ‘겨울’인지를 철저히 증명하고 있었다. 새벽 공기는 차가웠지만, 영석은 그 차가움이 반가웠다. 취조실의 그 뜨겁고 끈적하던 백열등 빛에서 드디어 벗어났기 때문이었다.
정문 앞, 밤새 이슬을 맞으며 정희와 수아가 서 있었다. 수아는 영석의 한쪽만 남은 구두를 보자마자 달려와 신문지에 싼 새 양말과 운동화를 내밀었다. 영석은 길바닥에 주저앉아 젖은 양말을 벗어 던졌다. 축축하게 젖어 있던 신발을 벗어 던지는 행위는, 그가 겪은 이틀간의 지옥을 털어버리려는 몸부림 같았다. 하지만 영석은 신발은 갈아신을 수 있어도, 백열등 아래서 무너져 내린 자신의 자존심과 부러진 신념은 다시 주워 담을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정희는 새벽 시장에서 사온 하얀 두부 한 모씩을 영석이와 태종이에게 내밀었다. 태종이 엄마도 태종이를 붙들고 울음을 터뜨렸다.
“엄마! 왜 이래? 창피하게.”
태종이가 자기 엄마 어깨를 붙잡고 소리쳤다.
영석이는 취조실에서 들었던 “야, 너 성대 법대생이라며? 공부나 할 것이지, 부모님이 고생해서 밥 먹여주고 가르쳐놓으니 빨갱이 흉내를 내? 네 놈 이름에 먹칠하고, 부모님 가슴에 대못 박고 싶어?”라는 말이 계속 생각났다.
한편 충남 예산의 수덕여관에 몸을 숨긴 민우의 하루는 새벽 예불 소리와 함께 시작되었다. 덥수룩하게 자란 수염과 낡은 옷을 입고 안경을 쓴 그의 얼굴은 고시생의 모습을 하고 있지만, 한편으로는 몸이 아파 절에 수양하러 온 사람으로 보이기도 했다. 그러나 그의 눈빛만은 형형하게 살아 있었다.
민우는 대웅전 뒤편 숲길에 앉아 멀리 내포 들판을 내려다보았다. 서울에 두고 온 정희의 얼굴이 시도 때도 없이 떠오른다. “당분간 저에게 연락하는 것도 위험해요.”라던 말이 다시는 볼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말처럼 느껴져 가슴이 아려왔다.
“부처님, 저 산 아래는 불바다인데 이곳은 어찌 이리 고요합니까?”
민우는 바닥에 떨어진 낙엽 위에 정희의 이름을 쓰다 지우기를 반복했다. 수배 중인 처지에 편지 한 장 쓸 수 없는 고통이 가장 견디기 힘들었다. 서울에서 들려오는 소식은 절망뿐이다. 동지들은 잡혀갔고, 도시는 군홧발에 짓눌려 숨죽이고 있다고 한다. 민우는 차가운 바위에 머리를 기댔다. 시국을 한탄하며 쏟아내는 그의 한숨은 수덕사의 저녁 종소리에 섞여 산 아래로 허망하게 흩어질 뿐이었다.
경찰서 문을 나선 영석은 서울 집으로 돌아왔지만, 그의 영혼은 여전히 그 취조실 의자에 묶여 있었다. 방 안에 불을 끄면 어둠 속에서 형사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고, 불을 켜면 백열등의 열기가 얼굴을 지지는 환각에 시달렸다.
영석은 책상 앞에 앉아 전공 서적을 펼쳤으나 글자가 보이지 않았다. 다른 학생들은 감옥에서 단식 투쟁하고 있다는 소식도 들리는데, 자신은 고작 서약서 한 장에 무너져 따뜻한 밥을 먹고 있다는 사실이 스스로를 역겹게 만들었다.
'나는 투사가 아니었다. 고작 빛 하나에 모든 걸 불어버릴 뻔한 겁쟁이였을 뿐이다.'
영석은 거울 속의 자신을 보며 실소를 터뜨렸다. 지식인의 고뇌니, 정의니 하는 말들이 얼마나 사치스러웠는지 뼈저리게 느꼈다. 그는 수아가 사준 새 운동화를 신지도 못하고 방구석에 밀어두었다. 그 깨끗한 신발을 신고 다시 거리로 나갈 용기도, 그렇다고 평범한 대학생으로 돌아갈 뻔뻔함도 그에겐 없었다.
“영석아, 병역 연기를 그만두고 군대에 갔다 오는 건 어때?”
정희가 정신적 고통에 시달리고 있는 영석을 보다 못해 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