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댓국 한 그릇

by 서완석

요즘에는 동네마다 좋은 도서관들이 많지만, 정년퇴임을 한 나로서는 책을 읽다 기분 내키면 소주도 한 잔 마시고 라면도 끓여 먹을 공간이 필요했다. 그래서 집 가까운 하월곡동에 연구실이라는 명목으로 아주 허름한 방 하나를 얻었다. 이곳에 한 번 들른 제자 변호사는 너무 열악한 환경에 안타까와했다. 선생님 생각하는 제자의 마음은 갸륵하나 내게는 이만큼 행복한 곳도 없다. 집에서는 잠을 제대로 못 자는데 여기서는 의자에 앉아 있기만 해도 잠이 솔솔 오고 내가 세상에서 가장 좋아하는 7천 원짜리 순댓국집이 지척에 있다. 그런데 얼마 전 그 순댓국집 앞에 서 있던 어떤 늙수그레한 아저씨가 마침 나들이 다녀오는 것으로 보이는 아주머니에게 “밥도 안 차려 주고 어딜 댕겨 와?”라고 하였다. 아주머니는 “내가 밥으로 보여”라고 벽력같은 소리를 질렀다. 그는 무르츰하다 슬그머니 자리를 떴다. 마침 순댓국을 먹으려던 내 처지 또한 딱 그러해서 허락만 한다면 뜨끈한 순댓국 한 그릇에 소주 한잔 사드리고 싶었다.

나는 대학생 때 친구와 함께 남대문 시장에서 떼어 온 티셔츠를 가리봉동과 구로동 시장에서 파는 장사를 한 적이 있다. 나중에 대기업 임원을 지낸 친구는 넉살이 좋아 손뼉을 치며 “골라, 골라”라고 소리를 지르기도 하고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무람없이 말을 걸어 발걸음을 멈추게 하는 기막힌 장사수완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천생 서생은 입을 떼지 못한 채 기어드는 목소리로 입만 달싹일 뿐이었다. 게다가 서슬 퍼런 군사정권이 ‘정화’라는 노란 완장을 찬 사람들을 시켜 노점상을 단속하던 때라 노란색만 보이면 기겁하여 도망쳐야 했다. 어찌어찌하여 소주 한 병을 병나발 불고서야 조금씩 입을 떼기 시작했지만 정작 배고픔은 참을 수 없었다. 그러나 벌이가 시원찮으니 하루 세 끼를 다 먹을 수는 없어서 튼실한 건더기와 다채로운 고명이 어우러져 속이 든든한 순댓국 한 끼로 끼니를 때웠다. 문제는 이 순댓국이 참말로 맛있다는 것이었다. 밤새 고아 뽀얀 국물에 새우젓, 들깨, 다진 양념, 부추 등을 넣고 묵은김치를 곁들이면 천상의 맛인지라 장사는 뒷전이고 내 머릿속은 오직 순댓국만 가득했다.

내가 처음으로 교수 생활을 시작한 대학이 있는 익산에도 유독 맛있는 순댓국 맛집들이 있어 행복했다. 오죽하면 동료 교수들에게 죽을 때까지 하루 한 끼는 순댓국만 먹고 살 자신이 있다고 했을까. 이후 성남에 있는 대학교로 옮긴 후에도 나의 순댓국 맛집 사냥은 계속되었다. 그런데 언젠가 친한 선배 교수가 점심으로 먹을 음식을 추천해달라는 말에 순댓국을 추천했다가 “서 교수는 아주 촌티 나는 입맛을 가지고 있구먼”이라는 말을 듣고 입이 댓 발이나 나온 적이 있다. 순댓국이 얼마나 많은 시간과 정성이 들어가는 음식인지 알고나 하는 말이었을까? 그날은 일식집에서 초밥을 먹었지만, 저녁만은 일부러 순댓국으로 했다. 며칠 전 차량에서 내릴 때 주변 사람의 시선이 집중되는 데서 오는 심리적 만족감을 뜻하는 ‘하차감’이라는 신조어가 유행한다는 기사를 보았다. 이 용어는 “반포역 내릴 때 우쭐해”와 같이 집값이 비싼 강남 지역 지하철역에서 하차할 때 주변의 부러운 시선을 느끼는 것으로도 사용된다고 한다. 또한 이 기사에 실린 “2024 부동산 계급표”에는 최상위 등급에 강남구, 서초구가 있고 내가 사는 성북구는 하위권에 있었다. 물신주의 세태를 비꼬는 기사라지만 “요즘도 강북에 사는 교수가 있어?”라던 어떤 교수분이 떠올라 기분이 참 씁쓸했다. 강북에는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순댓국 맛집이 정말 많은데 말이다.

작년에는 번동에 순댓국 맛집이 있다는 정보를 입수해 오전 11시 반쯤에 갔다가 사람들이 긴 줄을 서 있어서 허탕 치고 돌아왔다. 오후 3시쯤에도 마찬가지였다. 세 번째 도전 만에 겨우 한 그릇을 먹을 수 있었는데 마늘 쌈장에 순대 한 점을 찍어 먹는 맛은 환상적이었다. 그런데 순댓국 1인분 포장에 마늘 쌈장도 꼭 넣어달라는 내 말에 주인장은 쌀쌀맞게 “마늘 쌈장은 안 돼요.”라고 했다. 쌈장 만드는 비법 때문이겠지 하는 생각을 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괘씸한 생각이 들어 “내가 다시 이 집에 오나 봐라.” 하고서 다시 가고 말았다. 내 입이 촌티가 나면 어쩌랴, 애초에 백화점보다 재래시장에 갈 때 가장 행복한 사람이니 촌티 나는 얼굴로 귀티 나는 사람들이 먹는 음식을 먹으면 동티가 날 것이다. 나는 며칠 전에도 정읍에서 한잔한 다음 날 아침에 습관처럼 친구랑 같이 가던 샘골 시장의 ’화순옥‘을 찾아 순댓국을 먹었다.

최근 TV를 시청하던 중에 요즘 최고의 인기를 누리고 있는 아주 잘 생기고 귀티나 보이는 가수 임영웅이 순댓국을 가장 좋아한다는 말을 들었다. 그 순간 주먹이 불끈 쥐어지며 그를 욕하는 사람에게는 대거리라도 할 수 있다는 결기가 났다. 제사를 지내는 중에 우리 두 딸에게 농담조로 “아빠가 죽거든 내 제사상에 오로지 순댓국 한 그릇만 올려다오”라고 말한 적이 있다. 아이들이 아직도 내 말을 기억하고 있을지, 참말로 순댓국 한 그릇을 사다가 제사상에 올려줄지, 내가 귀신이 되어 제삿밥을 먹으러 올는지는 모른다. 우리 두 딸은 내게 많은 것을 사주었지만, 아직 밥을 사준 일은 없다. 그러므로 귀신이 되어서도 악착같이 밥 한 끼는 얻어먹을 작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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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 ‘수필문학’ 천료 등단(2022. 12.)

현재 가천대학교 법과대학 법학과 명예교수


위 글은 수필문학추천작가회 연간사화집 제32권(2024.10)에 실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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