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8년-1980년 언저리
1980년 5월 22일, 서울의 아침은 기이할 정도로 고요했다. 오목교에서 가리봉동으로 이어진 영석의 삶의 여정은 여전히 눅눅한 곰팡이 냄새가 지배하고 있었다. 오늘은 태종이가 이사 온 집을 방문하겠다고 해서 영석은 정희가 출근한 후 방과 부엌 청소를 했다.
오전 11시쯤 영석은 약속대로 가리봉 제1동 사무소 앞으로 나갔다. 저 멀리서 성큼성큼 걸어오는 태종의 모습은 잿빛 공단 거리의 풍경과 지독하게도 어울리지 않았다. 빳빳하게 풀기를 먹인 남색 체크무늬 셔츠에 베이지색 면바지를 입은 태종은, 마치 금방이라도 명동 미도파 백화점 앞을 산책하다 온 사람처럼 매끈했다. 그의 한쪽 손에는 이사 집 방문의 필수품인 ‘하이타이’ 대용량 박스 한 통과 ‘나일론 끈으로 묶은 두루마리 휴지 10 롤’ 세트가 들려 있었다.
“야, 인마. 가리봉동 오다가 사람 잡겠더라. 멀기도 하지만, 뭔 놈의 공장이 이렇게 많냐? 공기가 아주 걸쭉해.”
태종은 특유의 능청스러운 웃음을 지으며 영석의 어깨를 툭 쳤다. 그가 영석을 따라 벌방이 다닥다닥 붙은 골목 안으로 들어서자, 골목의 밀도가 순식간에 변했다. 태종이의 모습은 가리봉동과는 너무나 어울리지 않는 모습이었다. 마침 야간 근무를 마치고 퇴근해 수돗가에서 세수하던 여공들과 출근 채비를 하던 여공들의 시선이 약속이라도 한 듯 한 곳으로 쏠렸다.
“어머, 저 남자 좀 봐. 탤런트 아냐? 노주현 닮은 것 같기도 하고….”
“야, 노주현보다 훨씬 젊고 훤칠하구먼. 저런 오빠가 이런 집에 웬일이래?” 마당 수돗가에서, 혹은 열린 문틈 사이로 여공들의 수군거림이 번져나갔다. 가리봉동 여공들에게 잘생긴 서울내기 대학생의 등장은 회색빛 일상을 깨뜨리는 작은 사건이었다. 태종은 그런 시선이 익숙한 듯, 오히려 여공들을 향해 살짝 눈을 맞추고 부드러운 미소를 날리며 장발 머리를 오른손으로 쓸어 올렸다.
“안녕하세요. 좋은 아침입니다.”
태종이 수돗가에 앉아 있던 한 여공에게 가볍게 목례를 건네자, 얼굴이 발그레해진 여공은 비누칠하던 손을 멈춘 채 멍하니 그를 바라보다가 수줍은 듯 얼른 고개를 숙였다. 영석은 그런 태종의 뒷덜미를 잡아채듯 이끌며 좁은 복도로 밀어 넣었다.
“야, 이 바람둥이 놈아. 여긴 네 놀이터가 아냐. 애들 마음 흔들지 말고 빨리 들어오기나 해.”
“야, 영석아. 인사하는 게 죄냐? 쟤들도 꽃 같은 나인데, 이런 삭막한 데서 나같이 잘생긴 얼굴도 좀 보고 살아야지. 그게 보시(布施)라는 거다.”
좁은 벌방 안으로 들어선 태종은 짐을 내려놓기 무섭게 방 안을 훑어보았다. 눅눅한 벽지와 곰팡이 냄새, 그리고 두 남매가 몸을 비틀어 누워야 할 만큼 비좁은 공간을 확인한 그의 눈에 잠시 안쓰러움이 스쳤다. 하지만 그는 이내 특유의 장난기 어린 얼굴이 되었다.
“미안해 이런 누추한 곳까지 오라고 해서.”
솔직히 말해서 영석은 태종이에게 이런 곳을 보여주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그러나 태종이는 영석이의 그러한 태도가 아주 못마땅하다는 듯 말했다.
“사람 사는 게 거기서 거기야 인마. 친구인 나한테까지 부끄럽냐? 그렇다면 친구라고 하질 말던가.”
그랬던 태종이가 방안에 들어서자마자 하는 소리가 달랐다.
“방 꼬락서니 보니까 하이타이 말고 향수라도 사 올걸 그랬다. 도배라도 좀 새로 하고 들어오지 그랬어. 그래도 이 휴지는 술술 풀리라고 사 온 거니까, 여기서부터 네 인생 다시 좀 잘 풀어봐라.”
태종이는 친한 친구일수록 더 예의를 지켜야 한다고 항상 말해왔다. 그러다 보니 영석이와 내남없이 친하게 지내지만, 가끔 영석이를 비판하더라도 예의에 크게 어긋나는 법이 없었다.
태종이는 휴지 꾸러미를 방구석에 던져두고는, 양복바지 주름이 상할세라 조심스럽게 무릎을 굽혀 좁은 장판 위에 앉았다. 그는 영석이 내민 식어버린 보리차 잔을 받아 들고는 진지한 눈빛으로 입을 뗐다.
“너, 내가 아까 방 꼬락서니 운운했다고 속으로 서운해하지 마라. 내가 너랑 허물없이 지낸다고 해서 아무 말이나 막 뱉는 줄 아냐?”
영석이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이자, 태종은 잔을 내려놓으며 말을 이어갔다.
“사람들은 보통 친하면 예의 같은 건 개나 줘버려도 된다고 생각하거든? 근데 내 지론은 반대야. 모르는 사람한테는 예의가 없어도 그냥 '재수 없는 놈'으로 끝나지만, 친한 사이에 예의를 놓치면 그건 ‘칼’이 돼. 상대가 어디가 아픈지, 어디가 곪았는지 제일 잘 아는 게 친구 아냐? 그러니까 더 조심하며 칼질해야 하는 법이지.” 태종은 빳빳한 셔츠 소매를 걷어 올리며 영석의 눈을 똑바로 응시했다.
“내가 너한테 '부끄러워하지 마라', '인생 좀 풀어보라' 하고 툭툭 던지는 건, 네가 가난해서가 아니라 네가 네 가난에 잡아먹히고 있는 게 보여서 하는 소리야. 친구라는 놈이 네 비위나 맞추고 '괜찮아, 다 잘될 거야' 같은 사탕발림이나 하면 그게 무슨 친구냐? 그건 기만이지. 진짜 예의는 상대의 못난 모습까지 직시하되, 그게 상대의 본질이 아니라는 걸 계속 일깨워주는 거다. 다만 친구 간에도 해야 할 말과 하지 말아야 할 말이 있는 거야. 그건 내가 조심하잖니? 말 한마디에 깨질 수 있는 것이 우정이야.”
태종의 목소리는 낮았으나 힘이 있었다. 장난기 가득했던 눈빛은 어느새 철학적인 깊이를 띠고 있었다.
“수아 문제도 그래. 내가 집착하지 말라고 모질게 말하는 게 너를 무시해서 그런 것 같냐? 네가 그 사랑에 예의를 지키길 바라니까 그러는 거야. 끝난 인연을 붙잡고 구질구질하게 구는 건 상대에 대한 예의도 아니고, 무엇보다 뜨겁게 사랑했던 '너 자신'에 대한 예의가 아니거든. 사람이 품격을 잃으면 그때부터는 가난보다 더 무서운 늪에 빠지는 거야.”
영석은 태종의 말을 들으며 가슴 한구석이 서늘해지는 것을 느꼈다. 태종은 바람둥이처럼 보여도 사람 사이의 '선'과 '도리'에 대해서는 누구보다 엄격한 잣대를 가지고 있었다. 그것이 그가 수많은 여공의 시선을 한 몸에 받으면서도 결코 가벼워 보이지 않는 이유이기도 할 것이다. 태종은 다시 특유의 능청스러운 표정으로 돌아와 장발을 쓱 쓸어 넘겼다.
영석은 태종이 건넨 식은 보리차 잔을 매만지며 고개를 숙였다. 태종의 말은 구구절절 옳았다. 그의 논리는 명징했고, 그가 말하는 '품격'이나 '자신에 대한 예의'는 영석이 지향해야 할 지식인의 태도이기도 했다. 하지만 머리로 이해하는 정답이 가슴의 통증까지 치료해 주는 것 같지는 않았다.
“태종아, 네 말이 다 맞아. 그런데 말이다. 사랑이라는 것이 이성의 힘으로만 되는 것 같지 않아. 특히 나처럼 상처를 많이 받는 사람은 더 그런 것 같아.”
영석은 잠시 말을 멈추고 눅눅한 벽지 위에 핀 곰팡이 자국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사랑이 무슨 칼싸움도 아니고, 그렇게 깨끗하게 칼질이 안 된다. 내 마음은 네 말처럼 잘 드는 칼날이 아니라, 녹슬고 무딘 톱날 같아. 한 번에 베어지는 게 아니라 슬슬 문지를 때마다 내 살점이 같이 뜯겨 나가는 기분이야. 너는 품격을 말하지만, 나는 지금 품격보다 생존이 먼저인 것 같아. 수아를 잊는 게 나를 지키는 길이라는데, 아이러니하게도 수아를 생각하지 않으면 내가 누구인지조차 알 수가 없어. 그만큼 수아는 나의 전부였어.” 영석의 목소리가 미세하게 떨렸다.
“너는 수아와의 관계를 끝난 사건으로 보지만, 나한테 수아는 여전히 진행 중인 문장이야. 마침표를 찍어야 한다는 건 알겠는데, 손이 떨려서 점이 안 찍혀. 자꾸 쉼표만 찍으면서 다음 단어를 기다리게 돼. 이게 구질구질한 집착이라 해도 어쩔 수 없어. 지금의 나한테는 이 구질구질함이 내가 살아있다는 유일한 증거거든. 수아를 깨끗이 도려내고 나면, 이 좁고 눅눅한 방 안에 남는 건 텅 빈 껍데기뿐일 것 같아서 무서워.”
영석은 차가운 잔을 단숨에 비워냈다. 태종이 말하는 '예의'와 '품격'은 아름다운 꽃길로 보이지만, 그 아래 진흙탕에 빠진 영석에게는 그 꽃길조차 전혀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친구로서 네가 해주는 칼질, 고맙게 받을게. 근데 내 가슴이 워낙 너덜너덜해서 그 칼날이 들어올 자리가 없다. 조금만 시간을 줘. 억지로 자르려다 내 심장까지 잘라버릴 순 없지 않냐."
태종은 대답 대신 담배를 하나 꺼내 물려다, 영석의 젖은 눈을 보고는 슬그머니 담뱃갑을 집어넣었다. 태종의 논리적인 ‘예의’와 ‘품격’이 영석의 절박한 ‘슬픔’ 앞에서 잠시 갈 길을 잃은 듯, 방 안에는 다시 정적이 내려앉았다.
태종은 무겁게 가라앉은 방 안의 공기를 휘저으려 일부러 큰 소리로 손뼉을 짝 쳤다.
“아따, 이놈 봐라. 역시 성대 법대생 아니랄까 봐 비유가 아주 논리적이다 못해, 처절하기조차 하네. 녹슨 톱날에 진행 중인 문장이라니 내가 살면서 수많은 꼴통을 봐왔지만, 너 같은 지독한 순정파는 처음이다. 야, 두 손 두 발 다 들었다!”
태종은 짐짓 과장된 몸짓으로 자리에서 일어나며 영석의 어깨를 꽉 쥐었다.
“야, 가슴 너덜너덜한 놈 붙잡고 사랑학 개론 읊어봤자 내 입만 아프지. 야, 일어나! 이 눅눅한 곰팡이 소굴에 있다가는 나까지 정신병 걸리겠다. 나가서 기름진 짜장면에 고량주나 한잔하자. 독한 술로 그 너덜너덜한 가슴 확 지져버리면 좀 나아질 거 아니냐. 돈 많은 내가 한잔 살게.”
영석이 못 이기는 척 몸을 일으키자, 태종은 문을 열고 마당으로 성큼성큼 나갔다. 아까보다 더 많은 여공이 수돗가와 빨래터 주변에 모여 있었다. 태종은 기다렸다는 듯 다시 그 눈부신 미소를 가동하며 장발 머리를 오른손으로 쓱 쓸어 올렸다.
“아이고, 다들 아직 안 들어가셨네? 이 친구가 여기 새로 이사 온 제 친군데, 보시다시피 법전만 파느라 좀 숫기가 없어요. 법대생이라고 하면 되게 딱딱할 것 같죠? 근데 얘 마음 하나는 비단결 같은 놈이니까 우리 영석이 잘 좀 봐주세요. 밤에 헛기침 소리 좀 커도 너그럽게 봐주시고, 혹시 연탄불 꺼지면 번개탄이라도 좀 빌려주시고요. 아셨죠?”
태종의 넉살 좋은 멘트에 여기저기서 킥킥거리는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어머! 법대생 오빠예요?”
“걱정 마세요!”
“우리가 잘 챙겨줄게요!”
태종은 한술 더 떠 대문 쪽으로 걸어가다 멈춰 서서 뒤를 돌아보며 손을 흔들었다.
“제가 이 친구 보러 여기 자주 놀러 올 거거든요. 그때 우리 다 같이 마당에서 소주라도 한 잔 하는 거 어때요? 제가 안주는 기가 막힌 거로 사 오겠습니다!”
순간, 벌방 마당은 마치 인기 가수의 공연장처럼 변했다.
“어머, 진짜죠?”
“꼭 오셔야 해요!”
여공들의 환호성이 좁은 마당을 가득 메웠다. 태종의 호기로운 약속에 잿빛 가리봉동의 오후가 잠시나마 분홍빛으로 물드는 듯했다.
영석은 얼굴이 벌게진 채 태종의 등을 떠밀며 골목을 빠져나왔다. 뒤편에서는 여공들의 까르르 웃는 소리가 파도처럼 밀려왔다. 태종은 영석의 어깨에 팔을 두르며 윙크를 보냈다.
“봤지? 이게 바로 여자들을 무장 해제시키는 접근방법이다. 인마. 너도 이제 좀 웃고 살아라.”
영석은 어처구니가 없으면서도, 태종의 그 천연덕스러운 활기에 마음속 깊이 박혀 있던 수아라는 이름의 못이 아주 조금은 헐거워지는 기분을 느꼈다.
“그나저나 민우 형이 광주로 들어가면서 25일까지 소식이 없으면 자기 신상에 문제가 생긴 걸로 알라고 했다는데. 너는 광주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에 대해 뭐 아는 게 없니? 정희 누나가 지금 애가 닳아 입술이 다 부르트고 난리야.”
가리봉동 오거리 ‘안동장’에서 각자 짜장면 한 그릇과 깐풍기 하나를 시켜놓고 고량주를 태종이가 들고 있는 작은 잔에 따르던 영석이가 아주 진지한 태도로 물었다.
태종은 영석이 따라주는 고량주 잔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투명한 술잔에 안동장의 낡은 형광등 불빛이 일렁였다. 아까까지 여공들 앞에서 날리던 그 가볍고 화사한 미소는 간데없고, 태종의 얼굴에는 차갑고 무거운 그늘이 내려앉았다. 그는 한입에 고량주를 털어 넣고는 목을 타고 넘어가는 뜨거운 화기를 견디듯 잠시 미간을 찌푸렸다.
“광주….”
태종이 나직하게 읊조렸다. 그는 주위를 살피듯 고개를 살짝 돌려 안동장 홀의 분위기를 살폈다. 낮술을 마시는 중년 남성들의 왁자지껄한 소리와 주방에서 들려오는 칼질 소리만이 가득했지만, 태종은 본능적으로 목소리를 낮췄다.
“나도 정확히는 몰라. 신문이나 뉴스 나오는 꼴 봐라. 전부 폭도니 간첩이니 도배를 해놨잖냐. 보도검열단 놈들이 신문사마다 상주하면서 활자를 난도질하고 있으니, 우리가 보는 건 박제된 가짜 뉴스뿐이야. 전남일보 같은 현지 신문들도 이미 계엄군 구둣발 아래 짓밟혀서 제작 거부에 들어갔거나, 검열 때문에 지면 절반이 백지로 나오고 있다는 이야기가 있어.”
태종은 빈 잔을 만지작거리며 말을 이었다.
“그런데 광주소식이 하도 궁금해서 어제 사촌 형을 만났거든. 그런데 자신도 잘 모른다고 하면서도 정말 끔찍한 이야기를 하더라. 우리가 학교 앞에서 보던 최루탄 수준이 아니야. 공수부대 놈들이 대검을 꽂고 사람들을 짐승 잡듯 잡고 있대. 트럭에 시체를 싣고 다닌다는 소문까지 돌고 있다는 거야. 그리고 군인들이 시민을 향해 총을 쐈다는 말도 하더라고.”
“설마!”
영석의 손에 든 술병이 떨리면서 하마터면 술을 바닥에 쏟을 뻔했다. 태종의 낮은 목소리는 짜장면 냄새 가득한 식당 안을 비현실적인 공포로 채웠다.
“민우 형님이 25일을 마지노선으로 잡았다고? 영석아, 상황이 심상치 않다. 지금 광주는 완전히 봉쇄됐어. 들어가는 길도 나가는 길도 다 막혔고, 통신선도 다 끊겼대. 그 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세상 아무도 모르게 하겠다는 심산이지. 만약 형님이 말한 대로 그날까지 소식이 없다면….”
태종은 말을 끝내지 못하고 입술을 깨물었다. 그는 다시 한번 영석의 어깨를 꽉 쥐며 당부했다.
“이거, 정희 누나한테는 절대 말하지 마라. 누나 성격에 광주로 뛰어 내려가겠다고 나설지도 모르는데, 지금 내려가면 그건 죽으러 가는 길이야. 그냥 민우 형님이 워낙 강단 있는 사람이니까 어디 숨어서 기회를 엿보고 있을 거라고, 통신이 끊겨서 연락이 안 되는 것뿐이라고 그렇게만 말씀드려.”
태종의 눈동자에는 젊은 청년의 낭만도, 바람둥이의 재기 발랄함도 보이지 않았다. 오직 시대를 읽어내는 지식인의 서늘한 예감만이 서려 있었다.
“누구도 말하지 않는 밤이다, 영석아. 다들 눈을 가리고 귀를 막고 있어. 민우 형님도, 광주도… 지금은 그저 살아남기만을 빌어야 하는 처지야.”
두 청년 사이로 독한 술 향기가 흩어졌다. 깐풍기의 붉은 양념이 마치 누군가의 핏자국처럼 번져 보였다. 영석은 목구멍이 꽉 막힌 듯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영석은 태종이 뱉은 '총격'이라는 단어를 차마 뇌리에 담지 못한 채, 애써 고개를 가로저었다. 머릿속에서는 법전에서 배운 국가와 국민의 정의, 그리고 훈련소 교정에서 보았던 군인들의 늠름한 모습들이 태종의 잔인한 증언과 격렬하게 충돌했다.
“태종아, 네가 잘못 들은 것 아닐까? 아니면 사촌 형님이 유언비어에 속고 있거나.”
영석은 떨리는 손으로 빈 술잔을 다시 채웠다. 고량주의 알싸한 향이 코끝을 찔렀지만, 가슴속에 차오르는 서늘한 의구심은 지워지지 않았다.
“공수부대라니, 그들이 누군데? 우리 형제고, 삼촌이고, 이웃집 형들이야. 어떻게 군인이 자국 시민을 향해 총을 쏘고 대검을 휘둘러? 그건 있을 수 없는 일이야. 일제 강점기도 아니고, 동족상잔의 비극을 겪은 지 얼마나 됐다고...”
영석의 목소리는 스스로를 설득하려는 듯 유난히 높고 빨라졌다. 법학도인 그에게 국가는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는 최후의 보루였다. 그 신념의 기둥이 흔들리는 것을 영석은 본능적으로 거부하고 있었다.
“민우 형님도 그래. 그 형이 얼마나 영리하고 신중한 사람인데. 아마 통신이 끊겨서 발이 묶인 것뿐일 거야. 25일이 지나도 연락이 안 오면, 그건 길이 막혀서 그런 거지 결코 무슨 일이 생겨서 그런 건 아닐 거야.”
영석은 태종의 눈을 피하며 식탁 위의 붉은 깐풍기 조각을 젓가락으로 이리저리 뒤적거렸다. “지금 세상이 어떤 세상인데 그런 천인공노할 일이 벌어지겠어. TV에서도 평온하다고 하잖아. 그냥 불순분자들이 좀 섞여서 소요가 있는 정도겠지. 총이라니, 태종아. 그건 네가 너무 앞서 나간 거 아닐까?”
하지만 그런 영석의 장담과는 반대로, 가슴 한구석에선 정체 모를 불안함이 독버섯처럼 피어오르고 있었다. 태종은 부정하고 싶은 현실을 외면하려는 친구의 모습이 안쓰러운 듯, 더는 반박하지 않고 그저 영석이 따라준 독한 술을 입안으로 털어 넣을 뿐이었다. 영석은 믿고 싶지 않았다. 자신이 배우는 법이, 자신이 지키고자 하는 국가가, 그리고 가장 존경하는 민우 형의 생사가 이토록 허망하게 무너져 내릴 리 없다고 주문처럼 되뇌었다. 안동장의 낡은 환풍기 소리가 심하게 귀에 거슬렸다.
영석은 애써 자신의 불안을 짓누르며 태종을 향해 다시 한번 목소리를 높였다. 그것은 태종에게 하는 반박이라기보다, 무너져가는 자신의 세계관을 붙들기 위한 처절한 자기 방어에 가까웠다.
“태종아, 너 이번 5월 초에 우리 학교 애들 삭발반대를 외치며 문무대 입소를 거부하다가 영천 3군 사관학교에 입소했다는 이야기 들었지? 아마 5월 4일이었지?”
태종이 술잔을 내려놓고 영석을 빤히 쳐다보자, 영석은 마치 법정에서 결정적인 증거를 제시하는 변호인처럼 말을 이었다.
“그때 우리 성대생들이 영천 들어가서도 기세가 등등했다는 거야. 사관생도들이랑 식사 차별한다고 부대 안에서 데모까지 했다는 거야. 군부대 안에서 학생들이 데모를 했다니까? 그런데 어떻게 됐는 줄 알아? 3성 장군이 직접 와서 애들한테 사과했대. 미안하다고, 개선하겠다고. 군대라는 조직이 그렇게 합리적으로 변해가고 있는데, 한쪽에서는 장군이 사과를 하고 다른 한쪽에서는 총을 쏜다? 그게 앞뒤가 맞는 소리냐?”
영석은 확신에 찬 눈빛으로 고개를 저었다. 그가 아는 군대는 학생들의 기개에 눌려 한발 물러설 줄 아는, 적어도 대화의 시늉이라도 할 줄 아는 집단이었다. 그런 군대가 광주라는 특정 도시에서 자국민의 가슴에 총칼을 겨눈다는 것은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괴담일 뿐이었다.
“영천에서도 그랬는데, 광주라고 다를 리가 없어. 민우 형님도 아마 거기서 시민들하고 군인들 사이를 중재하고 있을 거야. 형 성격에 가만히 있을 사람이 아니잖아. 군인들도 결국 사람이잖아. 위에서 쏜다고 쏜다 해도, 어느 제정신인 군인이 자기 부모 형제 같은 사람들한테 방아쇠를 당기겠어?”
영석의 말은 논리적이었으나, 그 논리를 뱉는 입술은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태종은 영석이 말한 ‘영천 3군 사관학교의 사건’이 지금 광주에서 벌어지는 비극과는 전혀 다른 차원의 이야기라는 것을 직감하고 있었다. 장군이 사과했던 것은 서울의 명문대생들이라는 ‘인질’이 전방 부대 안에 있었기 때문이었지, 그들이 인권을 존중해서가 아님을 태종은 사촌 형의 목소리를 통해 이미 깨닫고 있었다. 태종은 대답 대신 젓가락으로 깐풍기 조각을 집어 들었다. 바삭하게 튀겨진 고기 위로 걸쭉한 소스가 끈적하게 흘러내렸다.
“영석아, 세상에는 법전에도 없고 학교 수업 시간에도 가르쳐주지 않는 괴물들이 있어. 영천의 그 장군이 사과한 건 세상의 눈이 무서워서였을지도 몰라. 하지만 지금 광주는 그 ‘눈’이 아예 가려져 버렸단 말이다. 군인이라고 다 같은 군인이 아니야. 그들 중에는 쿠데타를 노리는 놈도 있고, 정치군인도 있는 법이야. 어쩌면 지역감정에 사로잡혀 있거나 극우나 극좌적인 성격을 가진 자도 있을지 몰라.”
태종의 낮은 목소리가 경고를 하는데도 영석은 고집스럽게 술잔을 채웠다. 영천에서 군단장의 사과를 받아내며 기세등등했다던 후배들의 목소리가 귓가를 맴돌았다. 영석에게 그 기억은 국가와 군대에 대한 마지막 신뢰의 끈이었다.
안동장에서의 술자리는 태종의 서늘한 경고와 영석의 위태로운 부정(否定) 사이에서 아슬아슬하게 끝이 났다. 영석은 태종이를 보낸 후 가리봉동의 습한 골목을 비틀거리며 걸었다. 고량주의 화끈한 기운이 뒤늦게 머리끝까지 차올랐다.
그 시각, 영석의 벌방은 왁자지껄한 온기로 가득했다. 곰소댁과 최사장 그리고 숙희가 찾아온 것이다. 가리봉동까지 먼 길을 찾아온 그들을 위해 정희는 좁은 방안에 신문지를 깔고 소반에 소박한 저녁상을 차려냈다.
“아이고, 서울 공기가 이렇게 매캐해서 어뜨케 산다냐. 영석이 총각은 공부하느라 아직 안 들어온 거여?”
곰소댁이 정희의 손을 꼭 잡으며 안쓰러운 듯 물었다. 정희는 입술의 부르튼 자국을 애써 가리며 억지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곧 올 거예요. 오늘 어디 간다는 말이 없었는데?”
바로 그 순간, 삐걱거리는 문소리와 함께 영석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러나 그의 초점 없는 눈동자에는 술기운이 가득했다.
“어머, 영석아!”
정희가 놀라 일어설 틈도 없이, 영석이 방으로 들어서면서 문턱에 걸려 밥상을 엎을 뻔했다. 이미 곰소댁 식구들이 자리를 잡고 앉아 있는 바람에 영석의 몸은 방 가운데로 고꾸라지듯 떨어졌다. 밥상 머리맡으로 술 냄새가 진동하며 영석의 몸이 툭 떨어졌다.
“영석아, 왜 이래! 무슨 술을 이렇게 마셨어?”
정희가 다급히 영석의 상체를 일으켜 세웠다. 그러나 영석은 누나의 목소리조차 들리지 않는 듯, 흙먼지가 묻은 바닥을 손으로 허우적거리며 신음처럼 한 이름을 뱉어냈다.
“수아야… 수아야…. 민우형!”
숙희는 젓가락을 든 채 코를 큭 틀어막고는 뒷걸음질을 쳤다.
“아이구, 오빠! 입에서 나는 술 냄새가 똥 냄새보다 더 지독해! 오목교에 왔던 그 예쁜 언니가 보면 진짜 창피하겠다.”
“가시낭년이 오빠한테 못 허는 소리가 없네.”
곰소댁이 숙희의 등짝을 찰싹 때렸지만, 숙희는 억울한 듯 입술을 삐죽거렸다.
최사장이 영석이를 붙들어 좁은 방 안 벽 쪽으로 비스듬히 눕도록 하자 방은 꼼짝달싹하지도 못할 지경이 되었다.
“어이구 곰소댁 이만 일어나는 것이 좋지 않겄능가?”
최사장이 서둘러 몸을 일으켰다.
“시방 우리 살고 있는 모습 봤제? 시상 살다 보면 좋은 날도 올 것잉게 힘내더라고.”
곰소댁이 정희의 어깨를 치며 다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숙희야 잘 가 또 놀러 와. 보고 싶을 거야.” 정희의 눈에 눈물이 맺힌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