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몇 년 전 남양주의 오남읍이라는 곳의 아주 작은 방에 잠깐 머물며 글을 쓴 적이 있다. 정년퇴직을 앞두고 있다 보니 자꾸 싱숭생숭해지고 앞으로 어떻게 살아갈 것인지를 고민하게 되면서 저지른 일이다. 연구실에 나가는 것에 익숙해 있던 삶이 갑자기 바뀌었을 때의 충격을 고려하여 혼자만의 공간이 필요하기도 했고, 임대료가 비싼 서울을 벗어나 시골 분위기를 느껴보고 싶고 내가 사는 서울 성북구 길음동에서 전철로 이동이 가능한 곳이면 좋겠다는 내 나름의 계산도 있었다. 4호선 전철이 남양주 진접까지 연장 운행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오남역은 진접역 가기 바로 한 정거장 전으로 내가 사는 곳까지는 대충 27분 정도가 소요된다. 그리고 논문작업이나 다른 저술 작업을 하기에는 연구실보다 거기가 더 좋을 것이라는 판단도 했다. 우선 연구실에서는 끼니 해결이 쉽지 않은데 거기에서는 작업을 하다 배가 고프면 간단히 식사를 해결할 수 있는 시설이 마련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한 생활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은 날, 슈퍼마켓에 다녀오는 길에 아주머니 두 분이 한 식당을 가리키며 하는 대화를 우연히 듣게 되었다. 그분들의 대화 내용은 대충 “이 집 장어탕이 아주 맛있어.”, “그래? 한번 가서 먹어 봐야겠네” 등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이곳은 낯선 곳이라 어디에 맛집이 있는지 잘 모르던 터라 옳다구나 싶었다. 바로 그날 저녁에 그 식당을 찾아갔다. 체구가 아주 건장한 주인은 자기 고향인 충청남도 보령시 천북면에서 가져온 수산물과 장어 등을 판매한다고 하였다. 서울의 다른 식당보다 저렴하고 양도 많은 장어구이가 아주 맛있었고, 얼큰한 장어탕은 소문대로 일품이었다.
그 후 제자들과 지인들을 여러 번 그 식당에 초대했다. 중학교 교사 시절 제자인 김관중 변호사가 찾아왔길래 우럭회와 해삼으로 소주 한잔을 대접하기도 했다. 그런데 헤어지는 길에 김변호사가 나 몰래 10만 원을 그 식당에 맡겨 놓고 왔다면서 선생님 소주 한잔하고 싶을 때 가서 드시라고 했다. 얼마 전에는 음료 사업과 곱창집을 운영하는 다른 제자 노민철이가 공인중개사 시험에 합격했다며 찾아와 또 그 식당에서 소주 한잔을 하게 되었다. 그런데 평소 주방에서만 일하며 무뚝뚝해 보이던 주인이 직접 우리 자리에 우럭회를 들고 왔다. 그리고 주인은 대뜸 “두 분은 어떤 관계시죠?”라고 물었고, 민철이는 뜨악한 표정을 짓고 있다가 마지못해 “이분은 제 중학교 은사입니다”라고 하였다. 그러자 주인은 다시 “죄송하지만, 어느 학교인가요?”라고 물었다. 참 괴이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민철이가 퉁명스럽게 “광운중학교입니다”라고 대답하자, 주인은 바로 나를 향해 허리를 굽히며 “선생님 준학입니다.”라고 하였다. 순간 나는 너무나 놀라서 젓가락을 놓칠 뻔했다. 그 식당에 여러 번 방문했지만, 주인이 설마 내 제자일 것이라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무려 35년의 세월이 흘렀으니 그럴 만도 하다.
준학이는 중학생 시절 유명한 학생이었다. 학생 중에서 준학이만큼 주먹이 센 친구가 없었으니 말이다. 이제 어엿한 사장이 되어 그런 음식점을 여러 개 운영하며 돈도 많이 벌고 행복하게 살고 있다니 너무나 기뻤다. 내 옆에 앉아 내 술잔을 받은 준학이는 다리가 벌벌 떨린다고 했다. 처음에는 내가 살도 찌고 많이 변해서 얼굴을 알아보지 못했는데 내 목소리를 듣고 자기 처에게 혹시 우리 선생님일지 모른다고 했단다. 만일 내가 소주 한잔 마시고 실수라도 했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 싶어 소름이 돋았다. 김관중 변호사조차 자기 동기를 몰라보았으니 말이다.
내가 미국에서 유학하던 시절 중학교 제자이자 내 밑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남기욱이라는 제자가 당시 유명했던 ‘아이 러브 스쿨’이라는 사이트에 중학교 제자들을 불러 모아 260여 명의 제자가 활동하고, 그 후 이익숙이라는 제자가 네이버에 카페를 만들어 많은 제자와 정기적으로 소식을 주고받으며 만나고 있지만, 그날처럼 기분 좋은 날은 없었다. 바로 며칠 후 준학이 동기인 김관중 변호사와 천문학을 전공한 김도균이가 오남에 찾아와 또다시 준학이와 보람 있는 시간을 가졌다. 그 후 그곳을 떠났지만, 지금도 가끔 준학이네 가게에서 제자들과 만나고 있다.
대학에서 여러 보직을 맡고 많은 대외 활동도 했지만 내게 남은 것은 제자들과 논문뿐이다. 이제 내 은사님들 중에 세상을 떠나신 분도 많다. 어찌 어찌하다 보니 나도 강단을 떠나 은사님들처럼 늙어가고 있다. 수많은 은사의 가르침 덕분에 대과 없이 이만한 삶을 살아왔을 것이다. 준학이는 나도 기억하지 못하는 나의 말들을 기억하고 있었다. 선생의 말 한마디가 제자의 삶을 바꿀 수도 있을 것이라는 생각에 오늘도 말 한마디, 행동거지 하나에 신경을 쓰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