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친구 병후는 마장동에서 식육판매업을 한다. 나와는 정읍에 있는 초·중학교 동창이다. 내가 중학교 1학년을 마치고 인천으로 전학을 온 후 친구들과 연락이 거의 끊겼다가 나이 50을 훨씬 넘겨 다시 만난 친구들은 40여 년의 단절에도 불구하고 마치 어제 만난 양 친하게 지낸다. 병후도 그들 중 한 명이다. 작년 11월 11일에는 서울 종로에서 ‘50년간의 만남 새로운 시작’이라는 펼침막을 걸어 놓고 중학교 동창들이 모였다. 나는 3년 과정을 온전히 마치지 못해 모임에 나가는 것이 좀 께름칙하고 쭈뼛거려졌다. 그러나 막상 모임에 나가서는 서먹서먹한 것은 잠시였다. 서울은 물론이거니와 정읍과 군산, 그리고 양양 등지에서 달려 온 친구들까지 모두 27명의 벗들이 모였다. 모임이 끝나갈 즈음에는 분초를 다투어 가며 사는 서울의 현 구청장, 전 구청장인 친구들도 참석하였다. 용산 전자상가에서 돈을 많이 친구, 판사 친구, 금융감독원 조사국장과 한국예탁결제원 전무를 지낸 친구, 치과의사, 수의사, 카페나 전통 찻집을 운영하는 친구 등 직업들이 아주 다양했다.
꾀벅쟁이 친구들이 모이면 통속적인 사회적 출세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상대적 비교가 힘을 잃어버리기 때문이다. 나이 60이 넘은 친구들에게는 세월이 지나고 사회적 환경이 변하면 사라지는 권력, 재력, 그리고 명예와 같은 외형적인 충족보다는 그동안의 체험을 통해 형성된 만족, 보람, 자긍심 등이 깊게 뿌리 내리고 자존감이 뒷받침해주는 내면적 성공이 더 부러워지기 때문이다. 내가 입은 옷은 어느 재봉사의 손을 거쳤을 것이고, 내가 먹은 쌀 한 톨과 김치는 어느 농부의 손을 거쳤을 것이며, 버스나 지하철 기관사의 도움이 없다면 내 출근길은 매우 어려울 것이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사회적 출세(careerism)를 인생의 성공(success)과 동일시하여 인간의 값어치를 매기려는 우를 범한다.
소문에 따르면 과거에 정읍에서 상경한 친구들은 식육판매업을 하며 장만한 병후네 집에 머무르며 많은 덕을 보았다고 한다. 그런데 문제는 심성이 착한 병후가 식육 도소매를 하며 판매한 고깃값을 제대로 받지 못한다는 점이다. 한번은 돈을 받을 길이 없자 “이런 돈 있어도 살고, 없어도 살 수 있어”라고 아내에게 말한 후 40여억 어치나 되는 어음을 모두 불태워버리고 함께 소주 한잔 마셨다고 내게 담담하게 말했다. 몇 년 전에는 병후 아내가 곗돈 사기를 당해 또 곤경에 처한 일도 있다. 내 제자 변호사를 통해 사기당한 돈 일부를 회수했지만 왜 세상은 착한 사람 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때가 많다.
앞에서 말한 친구 중에서도 6명은 따로 정기적인 만남을 지속하고 있다. 나는 40여 년 만의 해후를 위해 설레는 마음으로 똑같은 옷 6벌을 사서 친구들과 나눠 입은 적이 있다. 비싼 옷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친구들 모두는 즐거워하며 이를 교복이라 불렀다. 그런 일이 두어 차례 있었는데 아직도 그 옷을 입는 친구들이 있다고 하니 고마울 따름이다. 그리고 추운 겨울 새벽 3시에 오토바이를 타고 출근해 냉동고 속에서 정육 작업을 하느라 추위에 떨 때가 많다는 병후에게는 따로 겨울 스웨터를 사주었다. 스웨터가 아주 따뜻하고 아주 마음에 든다던 병후는 다음 날 내게 전화를 걸어 그 스웨터를 잃어버렸다고 하였다. 같이 옷 잘 챙기라며 병후네 집까지 바래다주었기에 허망한 생각이 들었지만 아무리 뒤져보아도 찾을 수가 없었다는 말에 똑같은 스웨터를 다시 사주었다. 그런데 얼마의 시간이 지나서 병후는 처음에 사준 스웨터를 장롱 속에서 찾았다고 했다. 아직도 ‘해괴한 일’이라는 생각이 든다.
올봄에는 생필품을 사러 이마트라는 곳에 들렀다가 의류 할인매장에서 병후가 입으면 참 좋겠다 싶은 검은색 윗도리가 있기에 사 들고 즐거워할 병후의 얼굴을 떠올리며 마장동에 갔다. 병후는 매우 좋아하며 같이 있던 후배에게 “이제는 이 옷이 내 외출복이야”라고 소리쳤다. 주는 기쁨은 받는 기쁨에 비할 바가 못 된다. 비록 비싼 옷은 아니지만 좋아하는 친구의 모습에 너무나 행복했다. 나는 “겉옷이 어두운 색깔이니 안에 밝은 색깔의 옷을 받쳐 입으면 훨씬 더 멋있을 거야”라고 말해주고 돌아왔다.
그런데 그다음 날 병후가 전화를 걸어오더니 다짜고짜 “야! 너 때문에 우리 마누라한테 야단을 맞았어”라는 게 아닌가. 싸구려 옷을 받아왔다고 병후가 야단을 맞았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 찔끔한 기분이 들었다. 그런데 병후는 “제기랄!” “우리 마누라가 왜 당신은 진즉 이런 스타일의 옷으로 멋을 내지 못하는 거야? 라고 꾸중하잖아”라고 하였다. 그제야 안심이 된 나는 다시 한번 “밝은 색깔의 옷을 받쳐 입으면 네 아내가 더 좋아할 거야”라고 했더니 병후가 “아이 씨, 그러면 밝은 색깔의 옷도 같이 사줘야 할 거 아냐”하고 냅다 소리를 질렀다. 무척 당황스러웠다. 며칠 후 흰색 줄무늬 셔츠를 산 후 전화를 해서 옷을 사놓았는데 언제 가져다주면 좋겠느냐고 물었더니 병후는 건조한 목소리로 “나 오늘은 매우 바쁘니 나중에 전화해”라고 한다. 참으로 당당한 녀석이다. 얼마 전 병후는 몸이 아픈 우리 어머니를 위하여 최상품의 소고기와 사골을 보내왔다. 식사를 거의 못 하시던 어머니는 잡냄새 하나도 없는 뽀얀 사골국물에 밥을 말아 맛있게 드셨다. 옷값보다 몇 배는 더 비싼 것이니 내가 이문을 남긴 셈이다.
이 글은 수필문학 추천작가회 연간사화집 제 32권(2023.10)에 실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