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목교

1978년-1980년 언저리

by 서완석

제35화(최종화) 남산에 내리는 비(2)


영석은 남산의 가파른 계단을 딛으며 구두 앞코를 내려다보았다. 한 걸음씩 뗄 때마다 주머니 속의 소집 통지서가 빳빳하게 허벅지를 긁어댔다. 그것은 마치 “너는 이제 국가의 것이다”라고 선언하는 서슬 퍼런 포고문 같았다.


하늘은 잔뜩 부풀어 오른 잿빛 솜뭉치처럼 낮게 가라앉아 있었다. 금방이라도 무거운 빗줄기를 쏟아낼 듯 어두컴컴한 날씨는 서울 시내의 소음을 먹먹하게 집어삼켰다. 영석은 우산을 가져오는 게 좋았을 거라는 후회가 들었다. 그리고 이 불길한 정적 속에서 문득 민우를 떠올렸다. 형은 지금 어디에 있을까, 살아 있기나 한 것일까, 밥은 먹고 있을까 등등. 역사의 수레바퀴는 무수한 꽃들을 짓밟으며 굴러간다던 헤겔의 말이나 한 사람의 죽음은 비극이지만, 백만 명의 죽음은 통계라고 했던 스탈린의 말, 그리고 어디선가 읽었던 역사는 승자들의 기록이며, 그 기록 속에서 개인의 비명은 생략되곤 한다던 말도 생각났다. 또 다시 헤겔이 그의 ‘역사철학 강의’에서 말한 “역사란 국가의 행복, 지혜, 그리고 개인의 덕성이 희생되는 도살대(slaughter bench)와 같다.”던 말도 떠올랐다. 헤겔이 말하고자 하는 바가 ‘세계사는 위대한 이념의 발전 과정’이라는 점은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수많은 개인, 민족, 국가가 희생된다는 말인데 그렇다면 역사는 도덕적으로 온화한가, 개인의 행복은 역사적 필연 앞에서 희생되어도 좋단 말인가, 이념이 인간보다 우위에 있는가, 역사적 필연이라는 이름의 폭력은 정당한가, 내가 수아를 사랑하는 일조차 무시될 수 있는 게 역사의 힘인가 등등 별의별 생각이 다 떠올라 가슴 한구석에 납덩어리가 들어앉은 느낌이었다.

‘장엄하고도 비극적인 시대의 아픔에 비하면, 내 발걸음은 얼마나 남루하고 사소한가. 누나의 통곡을 등 뒤로 하고, 오직 한 여자의 살구색 편지에 매달려 숨이 턱에 닿도록산을 오르는 내 모습은 영락없는 도망자의 그것은 아닐까?’

‘시대라는 거대한 파도 앞에 선 지식인이라면 마땅히 광장으로 나가야 할 것인데, 내 심장은 자꾸만 나 개인의 방 한구석, 수아라는 이름의 좁은 영토로만 파고들어 급기야는 너무나 왜소해지다 못해 사라져 버린 것 같아.’

하지만 영석은 차마 자신을 다그칠 수 없었다. 거대한 폭력이 온 세상을 정화하겠다며 빗자루를 들고 설치는 이 광기의 시대에, 한 사람을 향한 지독한 그리움은 어쩌면 인간이 품을 수 있는 최후의 저항선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국가가 개인의 이름을 지우고 숫자로 분류할 때, ‘누구의 연인’이고 싶어 하는 이 간절한 마음이야말로 박제되지 않은 유일한 진실일 것 같기 때문이다. 시대의 통증이 아무리 거대해도, 당장 내 가슴을 후벼 파는 이별의 예감보다 더 아플 수는 없다. 사랑은 때로 시대보다 무겁고, 한 여성의 눈빛은 혁명의 구호보다 더 절실하게 영혼을 흔들 수 있는 일 아닌가.

마침내 약속한 벤치가 시야에 들어왔다. 그곳에는 그녀가 좋아하는 쥬시후레시 껌 색깔인 밝은 노란색 원피스를 입은 수아가 비현실적인 풍경처럼 앉아 있었다. 그녀의 어깨 뒤로 남산의 푸른 색 나무들과 회색 빌딩의 남산도서관이 안개처럼 흐릿하게 물러나 있었다. 영석이 그녀에게 다가갔을 때, 마치 신호를 보낸 것처럼 꾸무레한 하늘에서 툭, 하고 빗방울 하나가 영석의 손등에 내려앉았다. 비는 아직 쏟아지지 않았다. 다만 하늘이 참았던 숨을 아주 천천히 내뱉기 시작한 것처럼, 서늘한 물방울들이 예고도 없이 한두 방울씩 두 사람 사이의 공기를 가르며 떨어지고 있었다. 그녀가 우산을 펼쳐 드는 모습이 보였다. 수아가 고개를 들어 영석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동자 속에 담긴 것은 반가움일까, 아니면 이 비 오기 직전의 침울함일까. 영석은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영석은 수아에게로 향하는 마지막 다섯 발자국쯤을 남겨두고 멈춰 섰다. 구두 굽이 보도블록을 짓누르는 소리가 예민하게 고막을 건드렸다. 수아가 펼쳐 든 검은 우산은 비 내리기 직전의 잿빛 풍경 속에서 선명한 노란색 원피스와 어우러져, 마치 이 세상으로부터 격리된 작은 섬처럼 보였다. 그녀가 우산을 고쳐 쥐며 고개를 들었을 때, 영석은 숨을 들이켜는 법을 잊었다. 두 사람 사이에는 오랫동안 쌓인 침묵보다 더 무거운, 형체 없는 장벽이 가로놓여 있었다. 그 장벽은 ‘헤어지자’는 수아의 마지막 말로 만들어졌고, 광주의 핏빛 소문과 주머니 속 소집 통지서의 서늘한 촉감으로 굳어진 것이었다. 영석은 그녀의 눈동자를 정면으로 응시할 수 없었다. 그 눈 안에는 자신이 감히 침범할 수 없는 고결한 우울감이 서려 있었고, 그것은 영석이 품고 온 ‘살구색 편지의 환희’를 단번에 부끄러운 것으로 만들어버렸다.

“오랜만이야. 삼춘.”

수아의 목소리는 비 오기 직전의 공기처럼 낮고 습했다. ‘삼춘’이라는 호칭이 이토록 낯설고 아프게 들린 적이 없었다. 그 호칭은 과거 수아가 발랄하게 부르던 그런 것이 아니라 두 사람의 거리를 예의 바르게 규정짓는 동시에 영석이가 선뜻 다가설 수 없을 만큼의 거리를 만들고 있었다. 똑같은 단어인데 어떻게 이렇게 다를 수 있는지 영석은 알 수가 없었다. 그만큼 그는 온몸이 경직되는 느낌이 들었다. 영석은 젖은 손바닥을 바지에 문지르며 그녀의 옆, 그러나 한 사람이 더 앉아도 충분할 만큼의 거리를 두고 벤치 끝에 걸터앉았다. 수아의 우산 끝에서 떨어진 빗방울 하나가 영석의 구두 위에 얼룩을 남겼다. 두 사람 사이에는 팽팽하게 당겨진 활시위 같은 긴장감이 흘렀다.

영석은 무슨 말이라도 해야 했지만, 혀끝에는 헤겔의 도살대니, 역사적 필연이니 하는 거창한 단어들만 맴돌 뿐 정작 “보고 싶었어”라는 사소한 고백은 목구멍에 걸려 나오지 않았다. 수아는 무릎 위에 가지런히 모은 손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노란 원피스의 치맛단이 바람에 미세하게 흔들릴 때마다, 영석은 그녀를 붙잡고 싶은 충동과 도망치고 싶은 비겁함 사이에서 격렬하게 요동쳤다. 터질 듯한 어색함을 견디지 못한 영석이 주머니 속에서 소집 통지서를 꺼내려다 멈칫했다. 이 시국에 방위병으로 입소한다는 사실이 그녀에게 어떤 의미로 다가갈지, 혹여나 동정을 구걸하는 비굴한 모습으로 비치지는 않을지 겁이 났다. 수아는 우산대를 쥔 손에 힘을 주었다. 그녀 역시 영석의 시선을 피하며 벤치 너머에 있는 흐릿한 도서관 건물을 응시했다.

이별을 고한 자의 미안함과 여전히 그를 향해 흔들리는 마음이 충돌하며 만들어내는 기이한 정적이 두 사람을 짓눌렀다. 툭, 툭. 다시 빗방울이 우산 위를 때렸다. 이제 비는 예고를 끝내고 본격적으로 대지를 적실 준비를 하는 것 같았다.

영석은 마침내 입술을 뗐다. 하지만 나온 목소리는 그의 마음과는 다르게 심하게 떨리고 있었다.

“비가 많이 쏟아질 것 같네.”

그 비겁하고도 평범한 한마디가 두 사람의 긴장을 깨뜨리는 대신, 오히려 이 만남이 얼마나 위태로운 벼랑 끝에 서 있는지를 증명하듯 공허하게 흩어졌다.

“그런데 우산도 안 가지고 왔단 말이야?”

수아가 고개를 돌려 영석을 바라보았다. 수아는 어이가 없다는 듯 눈을 가늘게 뜨더니, 자신의 우산을 영석의 머리 위쪽으로 비스듬히 기울였다.

“하늘이 이렇게 꾸무레한데, 비 올 줄 몰랐어? 삼춘은 꼭 이래. 머리 좋은 사람이 왜 그 모양이야? 그렇게 준비성이 없어서 이 험난한 세상을 어떻게 살려고? 자기 몸 하나 젖는 줄도 모르니 바보 아냐?”

수아의 말은 이어졌다. 그 이면에는 가시 돋친 냉소가 아니라, 어쩔 수 없는 안쓰러움이 눅눅하게 배어 있었다. 그녀가 우산을 든 손을 바짝 당겨 영석을 자신의 우산 속으로 깊숙이 끌어들였다.

순간, 우산이라는 좁은 원 안으로 수아의 살결 냄새와 달콤한 화장품 냄새가 훅 끼쳐 들어왔다. 영석은 심장이 입 밖으로 튀어나올 것만 같았다.

“세상이 삼춘 마음처럼 다정하고 논리적인 줄 알아? 비가 오면 피할 곳을 찾아야 하고, 젖을 것 같으면 우산을 챙겨야지. 맨몸으로 이 비를 다 맞고 서 있으면 누가 알아준대? 역사가 알아줘, 아니면 국가가 알아줘? 공부만 하느라 세상 돌아가는 꼴은 하나도 모르는 사람이 혼자서 무슨 짐을 다 짊어진 표정을 하고 있어. 삼춘이 안 챙기면 아무도 삼춘 안 챙겨줘. 알아?”

영석은 고개를 숙인 채 그녀의 구두 위에 튄 작은 흙탕물 자국을 보았다. 수아는 깊은 한숨을 내쉬며 우산 손잡이를 영석의 손등 위로 툭 밀었다.

“내가 이 무거운 우산을 계속 들고 있어야 해? 이거 잡아.”


영석의 손이 수아의 작고 차가운 손등 위를 스쳤다. 찰나의 접촉이었지만 전신이 파르르 떨렸다. 비는 이제 본격적으로 우산 위에서 타닥타닥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수아의 손 위로 포개진 영석의 손등을 타고 아릿한 온기가 전해졌다. 수아는 시선을 정면으로 돌리며 물었다.

“가리봉동 집은 살만해? 정희 언니는 어떻게 지내? 밥은 잘 챙겨 먹고 다녀? 삼춘 얼굴이 반쪽이 됐네. 학교생활은 어때? 그 잘난 공부는 여전히 재미있어? 정희 언니와 민우 오빠는 예쁘게 사랑하며 잘 지내고 있는 거지?”

수아의 물음은 영석의 가슴을 날카로운 칼날로 베어내는 것 같았다.

“민우 형 소식이 끊겼어. 광주로 간 이후로 아무런 연락이 없어. 5월 25일까지 연락을 못 하면 죽은 줄로 알라고 했다는데... 누나는 매일 밤잠도 못 자고 연락이 오기만 기다리고 있어. 신문도 방송도 믿을 수가 없으니, 그냥 죽은 듯이 살아 있을 거라고 믿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게 없어.”

수아는 한쪽 손으로 입을 가렸다. 그녀의 어깨가 미세하게 떨리기 시작했다.

“세상이 왜 이래? 왜 다들 이렇게 아파야만 하는 거야?”

수아는 울음이 섞인 목소리로 나직하게 읊조렸다. 영석은 이제 더 숨길 수 없음을 직감했다.

“나, 공군본부에 방위병으로 입소하라는 통지를 받았어. 7월 8일에 입소해야 해.”

수아는 대답 대신 짧은 숨을 들이켰다. 우산 속의 좁은 공간은 순식간에 진공 상태처럼 변했다. 타닥타닥 우산을 때리던 빗소리가 갑자기 거대해진 것처럼 두 사람 사이의 정적을 메웠다. 수아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영석의 손 아래서 그녀의 손은 눈에 띄게 떨리기 시작했다.

“군대 가는구나.”

수아는 짧은 한마디를 내뱉고는 한참 동안 말이 없었다. 그녀는 이제 막 시작된 빗줄기가 그녀의 노란 원피스 밑단을 적셔가는 것을 멍하니 바라보며 나지막이 덧붙였다.

“그래, 어쩌면 그게 나을지도 모르겠다. 이 지옥 같은 서울에서, 아무것도 못 하고 비 맞는 것보다는......”

수아의 속눈썹 끝에 매달린 것이 빗방울인지 눈물인지 알 수 없었지만, 비는 이제 제법 굵어져 우산 밖의 세상을 하얀 장막으로 가려버렸다. 수아의 마지막 말은 비수가 되어 꽂혔지만, 동시에 영석의 가슴 속 어딘가에 가느다란 온기를 남겼다. 냉정하게 들리는 말속에 숨겨진, 자신을 향한 지독한 안쓰러움과 염려를 영석은 본능적으로 느꼈기 때문이다.

영석은 우산을 들고 있는 자신의 손에 조금 더 힘을 주었다. 수아가 세찬 비바람에 흔들리는 우산이 신경이 쓰였는지 영석이가 쥐고 있는 우산의 손잡이 밑동을 엉겁결에 잡았다. 맞닿은 손 사이로 미세하게 맥박이 전해졌다. 영석에게 그것은 두 사람 사이의 시간이 아직 완전히 멈추지 않았다는, 생생한 신호처럼 느껴졌다.


“아까 올라오면서 역사가 어떻고 이념이 어떻고 하는 생각들로 가슴이 무거웠는데, 막상 네 옆에 앉아 있으니까 다 사라졌어. 그냥 이 우산 안이 내 유일한 세계처럼 느껴져.”

비는 이제 우산 밖의 세상을 완전히 지워버릴 듯 거세게 쏟아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영석의 가슴 속을 짓누르던 납덩어리 같은 무게는 조금씩 가벼워졌다. 7월의 입소도, 소식이 끊긴 민우 형의 비극도 여전히 그대로였지만, 적어도 이 잿빛 비의 장막 너머에 자신이 다시 돌아와야 할 ‘노란색 희망’이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막연한 확신이 영석의 마음에 싹트기 시작했다.

영석은 손등을 통해 전해지는 수아의 미세한 떨림과 온기를 놓치지 않으려 애썼다. 그 온기는 갈기갈기 찢겨져 있던 그의 자아를 다시금 하나의 인간으로 이어 붙여주고 있었다. 그리고 지금 이 우산 안에서만큼은 영석은 다시 ‘누군가의 연인’으로 살아가고 싶다는 욕망이 고개를 들었다.


영석은 수아의 손이 닿아 있는 우산 손잡이를 조금 더 꽉 쥐며, 빗줄기 사이로 흐릿하게 보이는 남산 아래를 가리켰다.

“비가 너무 많이 온다. 여기 계속 앉아 있으면 감기 걸릴 것 같아.”

수아는 대답 없이 여전히 빗물에 씻겨 내려가는 보도블록만 바라보고 있었다. 영석은 용기를 내어 한 걸음 더 다가갔다.

“어디 가서 따뜻한 거라도 먹자. 국수도 좋고, 뭐든 따뜻한 거. 밥 안 먹었잖아?”

영석의 제안에 대답 대신 빗소리만 듣고 있던 수아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런데 영석을 바라보는 그녀의 눈동자엔 조금 전의 온기 대신, 무겁고 딱딱한 결정체가 들어앉은 듯했다. 수아는 영석이 겹쳐 쥐고 있던 우산 손잡이에서 제 손을 천천히, 그러나 분명하게 빼냈다.


손끝에 남은 온기가 채 식기도 전에 수아는 결심한 듯 입술을 깨물더니, 저 멀리 남산도서관 입구 쪽 도로변을 가리켰다. 자욱한 빗줄기 너머로 광택이 도는 검은색 승용차 한 대가 마치 두 사람의 대화가 끝나기를 기다렸다는 듯 위압적인 정적을 지키며 서 있었다.

“저기 서있는 차 보여?”

수아의 목소리는 이제 습기를 머금은 슬픔 대신, 억지로 날을 세운 서늘한 소리를 내고 있었다. 그녀는 영석의 시선을 피하며 검은 차를 응시했다. 수아의 머릿속은 이미 지독한 전쟁터였다. 오빠의 죽음을 밝히기 위해 교수의 꿈도 접고 사법고시에 매달리려는 영석을 보며, 수아는 그를 이 늪에서 빼내야 한다고 수천 번 다짐했다. 자신이라는 짐을 지고서는 영석이 결코 그 험난한 고개를 넘지 못할 것임을 누구보다 잘 알았기 때문이다.

“저 안에 나를 기다리고 있는 사람이 있어. 아마 우리가 앉아 있는 이 모습을 계속 보고 있을 거야.”


영석은 마치 투명한 벽에 가로막힌 듯 멍해졌다. 수아는 차마 말을 잇지 못하고 침을 삼켰다. 집안의 강요로 선택해야 하는 길이었지만, 한편으로는 권력과 자본이 있는 집안의 힘을 빌려서라도 오빠의 죽음에 얽힌 진실을 파헤쳐보고 싶다는 막연하고도 처절한 기대가 그녀를 지탱하고 있었다.

“삼춘이 조금만 더 조금만 더 부자였더라면 좋았을 텐데.”

수아의 입술을 타고 흘러나온 그 문장은 비 내리는 남산의 공기를 단숨에 얼어붙게 만들었다. 영석은 순간 자신이 무슨 소리를 들었는지 의심하며 멍하니 수아를 바라보았다.

영석은 마치 누군가 거대한 해머로 자신의 뒤통수를 내리친 듯한 강렬한 충격에 휩싸였다. 고막에서는 ‘웅’ 하는 이명이 들려왔고, 눈앞의 풍경이 미세하게 흔들렸다. 방금까지 손끝으로 전해지던 따스한 맥박도, 쥬시후레시 껌의 달콤한 향기도 모두 환상이었던 것처럼 아득하게 멀어졌다.


헤겔의 역사철학이나 스탈린의 통계학, 국가와 개인의 희생을 논하던 그 장엄한 고뇌들이 수아의 "부자였더라면"이라는 지극히 현실적이고도 비릿한 한마디 앞에 종잇장처럼 구겨져 발밑으로 추락했다. 영석은 숨을 들이켜려 했으나 목구멍에 딱딱한 돌덩이가 걸린 듯 답답했다. 가슴 속 한구석에 들어앉아 있던 납덩어리가 온몸으로 퍼져나가 발끝까지 무겁게 짓누르는 기분이었다.

수아의 얼굴은 단 몇 초 만에 영석이 만들고 싶어하는 ‘우리’라는 성벽을 무너뜨렸다. 영석은 그녀를 붙잡고 싶었지만,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었다. 방위병 소집 통지서가 든 주머니가 차가운 빗물에 젖어 허벅지에 쩍쩍 달라붙었다.

“부자였더라면...”

그 비겁하고도 투명한 진실 혹은 거짓이 영석의 영혼을 난도질했다. 영석은 수아의 눈동자 속에서 자신의 초라한 현실을 보았다. 가리봉동의 습한 단칸방, 실종된 민우 형, 통곡하는 정희 누나, 그리고 이제 곧 국가의 숫자가 되어 사라질 자신의 처지가 남산의 안개보다 더 흐릿하고 보잘것없게 느껴졌다.


영석은 입을 벌려 무언가 말하려 했으나, 혀는 이미 감각을 잃고 굳어버렸다. 배신감보다 먼저 찾아온 것은 지독한 무력감이었다. 수아가 가리킨 그 검은 차의 광택이 영석의 망막을 찌르듯 번뜩였고, 그는 자신이 서 있는 이 보도블록이 밑바닥부터 무너져 내리는 환각 속에 빠져들었다.

영석은 초점이 흐려진 눈으로 바닥을 적시는 빗물을 내려다보았다. "부자였더라면"이라는 말은 수아의 입술을 떠난 순간부터 그가 쌓아온 모든 가치를 비릿한 욕망의 찌꺼기로 변질시켜 버렸다. 그는 겨우 목소리를 쥐어짜 내어 물었다.

"이러려고... 이러려고 만나자고 한 거야?"

목소리는 빗소리에 씻겨 내려갈 듯 힘이 없었다. 그 비참한 물음에 수아는 우산을 쥔 손을 더욱 꽉 거머쥐었다. 그녀는 영석의 얼굴을 차마 정면으로 바라보지 못한 채, 그의 어깨 너머 허공을 향해 단호하게, 그러나 미세하게 떨리는 음성으로 대답했다.

“이렇게 하지 않으면... 삼춘이 혼자 힘으로 나를 떠날 수 없을 것 같아서. 내 미련에 발목 잡혀서 그 잘난 꿈도, 인생도 다 포기하고 살까 봐서.”


수아가 영석이 쥐고 있던 우산을 빼앗았다. 순식간에 차가운 빗줄기가 영석의 머리와 어깨를 무자비하게 때리기 시작했다.

“부디 잘 살아. 삼춘이 말한 그 거창한 역사니 이념이니 하는 것들 말고, 그냥 삼춘 자신을 위해서 살란 말이야. 꼭 성공해서, 나중에 나 보란 듯이... 아주 잘 사는 모습 보여줘. 그게 내가 삼춘한테 바라는 마지막 말이야. 그리고 내가 삼촌을 사랑했던 것은 거짓이 아니었음만 알고 가.”

그 말을 남긴 수아는 우산을 낮게 기울여 자신의 얼굴을 가린 채 검은 자동차를 향해 성큼 성큼 걷기 시작했다. 빗물에 젖어 무거워진 영석의 몸은 단 한 걸음도 떼지 못했다. 그는 고개를 떨군 채, 빗물이 구두 앞코를 타고 흘러내리는 것을 멍하니 지켜보았다.

멀리서 ‘탁’ 소리를 내며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이내 검은 자동차는 커다란 물보라를 일으키며 빗속으로 미끄러져 나갔다. 자동차가 떠난 자리에는 희뿌연 매연과 차가운 빗방울만이 남았다.

하지만 그 매연 섞인 빗줄기 너머, 짙게 썬팅된 차창 안의 풍경은 영석이 상상하는 것과는 전혀 딴판이었다. 문이 닫히자마자 수아는 마치 실 끊어진 인형처럼 뒷좌석 시트로 쓰러지듯 몸을 묻었다. 조금 전까지 영석의 가슴을 난도질하던 그 서늘하고 고압적인 눈빛은 간데없었다. 수아는 손바닥으로 입을 틀어막은 채 터져 나오는 통곡을 죽여내고 있었다. 어깨는 경련하듯 떨렸고, 눈물은 빗물보다 더 뜨겁게 뺨을 타고 흘러 노란 원피스를 적셨다.

‘미안해, 삼춘... 제발 나를 미워해. 나를 경멸하고 저주해서라도, 제발 그 늪에서 빠져나와. 나 같은 건 잊고 삼춘의 길을 가.’

수아는 차창 밖으로 점점 멀어지는, 빗속에 홀로 버려진 영석의 구부정한 뒷모습을 손톱이 하얗게 질리도록 유리창을 긁으며 지켜보았다. 그녀에게 이 이별은 배신이 아니라, 자신이 기꺼이 괴물이 되어 사랑하는 이를 지키려 한 가장 잔인한 방식의 제물이었다. 자동차가 코너를 돌아 영석의 모습이 완전히 사라졌을 때야 수아는 참았던 비명을 삼키며 가슴을 쥐어뜯었다. 영석에게 남긴 "부자였더라면"이라는 말은 사실 그녀 자신을 베어버린 가장 날카로운 비수였다.

영석은 여전히 고개를 들지 못했다. 주머니 속의 소집 통지서는 이제 완전히 젖어 그의 허벅지에 무겁고 서늘하게 밀착되어 있었다.

빗속으로 멀어지는 그녀의 뒷모습은 영석에게 절망을 안겨주기에 충분했다. 하지만 수아는 입술이 터질 정도로 꽉 깨물고 있었다. 그렇게 모질게 굴지 않으면, 당장이라도 뒤돌아 영석의 품에 안겨 울어버릴 것만 같았기에. 이 지옥 같은 시대에 자신이라는 짐까지 얹어줄 수 없다는 그녀만의 서툰 사랑이, 비 내리는 남산 길 위에서 잔인한 이별의 언어로 흩어지고 있었다.

그리고 우산이 사라진 남산의 벤치에는, 시대의 통증보다 더 아픈 이별을 정면으로 맞고 있는 한 청년의 구부정한 뒷모습 위로 끝을 알 수 없는 장대비만이 쏟아지고 있었다.

영석은 쏟아지는 장대비 속에 박제된 것처럼 앉아 있었다. 우산이라는 작은 지붕마저 사라진 자리에는 오직 무거운 수직의 빗줄기만이 그를 난도질했다. 머리칼을 타고 흘러내린 물방울이 눈을 찔러 눈물인지 빗물인지 모를 액체가 뺨을 타고 쉼 없이 흘러내렸지만, 그는 닦아낼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가슴 한복판이 뻥 뚫린 것 같았다. 그 구멍 사이로 남산의 습하고 차가운 바람이 휘몰아쳐 들어와 내장을 얼려버리는 듯했다.

‘사랑했던 것이 거짓이 아니었다니…….’

영석은 그 말이 더 잔인하게 느껴졌다. 사랑하면서도 "부자였더라면"이라는 말로 칼을 꽂을 수 있는 것이 여자의 마음이란 말인가? 남자가 목숨처럼 여기는 신념과 학문, 그리고 고결한 꿈을 단 한 대의 검은 자동차와 맞바꿀 수 있는 것이 현실의 무게란 말인가? 그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논리학으로도, 헤겔의 변증법으로도, 그가 배운 그 어떤 철학적 체계로도 수아의 이 양면성을 설명할 길이 없었다. 사랑하기 때문에 떠난다는 그 진부하고도 처절한 궤변이, 왜 지금 자신의 가슴에는 이토록 시린 독으로 퍼지는지 그는 알지 못했다.

‘이대로 모든 게 끝난다면…….’

문득 머릿속을 스치는 생각 하나가 있었다. 약국에서 제한적으로 판매하는 빨간색 알약인 세코날, 그 약 몇 알만 있다면 이 지독한 한기와 모욕적인 현실에서 영원히 잠들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약국마다 판매량이 제한되어 있어 약국을 돌아다니며 쇼핑을 해야 할지도 모르는 영석은 차라리 저 빗줄기가 독한 마취제가 되어 자신을 이 땅 밑으로 영영 가라앉혀 주기를 바랐다. 국가의 부름도, 죽음보다 더한 가난도, 그리고 사랑이라는 이름의 이 비참한 배신도 더 이상 겪지 않아도 되는 그 영원한 안식의 방으로 숨어버리고 싶었다.

그는 비틀거리며 벤치에서 일어났지만, 고개는 여전히 들지 못했다. 중력을 이기지 못한 그의 어깨는 한없이 굽어 있었고, 구두 앞코를 덮치는 빗물은 마치 그가 흘리는 피처럼 검게 번져갔다. 수아가 남기고 간 노란색 잔상과 검은 차의 광택이 망막에 박혀 떨어질 줄 몰랐다.

영석은 빗속을 걸어 남산길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아니, 그것은 걷는 것이 아니라 쓰러지지 않기 위해 몸을 던지는 행위에 가까웠다. 남산을 내려가는 그의 등 뒤로, 서울의 도심은 차가운 빗속에 갇혀 마치 거대한 무덤처럼 침묵하고 있었다.


꼭 그렇게 가야만 했니(노래)

제 친구 홍성한이 만들어 보내준 곡입니다.

그동안 '오목교'를 읽어주신 독자 여러분께 진심으로 감사의 말씀을 올립니다. 제 생애에서 최초로 써본 소설이라 부족한 점이 너무 많았습니다. 특히 1회분의 소설을 쓰는데 참 많은 시간이 걸렸습니다. 그러나 배운 점도 많았습니다.

소설은 당분간 쉬면서 다음 작품을 구상하고자 합니다. 그리고 준비가 되면 이방에 예고의 글을 올리겠습니다만, 오목교의 후속작이 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동안 느낀 점, 특히 비판의 글 올려주시면 겸허한 마음으로 반성하며 다음 글을 쓰는데 참고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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