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년 2월 말이면 정년퇴임이라 정든 연구실을 떠나야 한다. 그래서 요즘은 매우 바쁘고 초조하여 마음마저 종종걸음을 하고 있다. 정리할 것들이 너무 많기 때문이다. 제자 중에 아직 박사학위를 받지 못한 학생이 2명이나 남았다. 그리고 학교에서 지원금을 준다기에 덜컥 지원했던 저술 작업도 마무리 지어야 한다.
내가 이번에 손을 댄 것은 ‘상법총칙·상행위법’이라는 강의교재이다. 저명한 교수님들이 이미 저술한 책을 너덜너덜해질 정도로 보면서 수많은 학설과 판례를 살피고 내 의견을 집어넣는 일이 결코 쉬운 일은 아니다. 글을 쓰다가 생각이 떠오르지 않거나 타인의 글을 읽다가 이해가 되지 않아 글쓰기가 중단되는 일이 허다하기 때문이다. 그럴 때면 나는 무조건 걷는다. 걷다 보면 생각이 정리되고 막힌 실타래가 풀리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그러나 외국 문헌 속 단어의 정확한 의미나 적절한 우리 말 표현을 찾지 못할 때는 정말 난감하다.
최근에는 상법 제46조에 새롭게 들어온 상행위 유형 중 하나로서 프랜차이즈(franchise)로 더 알려진 ‘가맹업’에 관한 글을 쓰다가 시간을 허비한 일이 있다. 프랜차이즈 시스템의 원류에 관한 내용을 검색하던 중 일본 자료에서 찾은 “프랜차이즈의 원류는 1850년대의 シンガー‧ミシン(싱가미싱)에 있다”고 하는 내용 때문이었다. ‘미싱’이 내가 아는 재봉틀인지, 일본 말인지 정확히 알 수 없어 자료를 한참이나 뒤지고 나서야 그것이 영어의 Singer sewing machine의 일본식 표현이고 ‘미싱’의 어원이 ‘머신’임을 알게 되었다. 한국인 누가 ‘싱가’에서 ‘싱어’를, 그리고 ‘미싱’에서 ‘머신’을 떠올릴 수 있었겠는가? 여하튼 1850년대의 Isaac M. Singer가 만든 재봉틀 회사인 Singer sewing machine이 재봉틀 판매업자들로부터 라이선스 수수료를 받고 재봉틀 사용법을 가르쳤던 것이 바로 세계가 인정하는 가장 오래된 프랜차이즈 사업모델이라고 한다.
이러한 과정에서 나는 어린 시절 어머니가 사용하시던 재봉틀을 떠올렸다. 아마도 ‘부라더 미싱’이라는 이름이었을 것이다. 도회지에서 살다 시골로 이사와 남편과 사별하고 홀로 삼 남매를 키우는 며느리가 안타까워 정읍 큰집에서 시골 우리 마을로 들어와 서당을 여신 할아버지가 삯바느질이라도 해서 먹고살라고 사주신 것이었다. 어머니는 여러 가지 면에서 솜씨가 뛰어나셨는데 특히 바느질 솜씨가 일품이셨다. 알록달록한 밥상 덮개용 상보며, 양쪽 끝을 둥글게 하거나 각지게 한 후 각종 길상문을 수놓은 베갯모는 너무나 아름다웠다. 동네 처녀들이 어머니로부터 그런 솜씨를 배우기 위해 자주 찾아왔던 기억이 있다. 외갓집 땅을 밟지 않고는 마을에 들어설 수 없었고, 당시 쌀 세 가마니 값을 치러야 살 수 있었던 인장표 미싱을 소유한 부잣집 딸이 나의 아버지께 시집을 왔는데, 6.25 전쟁 때문에 큰외삼촌과 이모의 생사를 모르고 이러저러한 사유로 친정의 가세가 기울면서 남편마저 저세상으로 가버리셨으니 그 고생이야 말해 무엇하겠는가? 시골 마을에 집 한 칸이 없는지라 셋방살이를 해야 했고, 허드렛일이며, 품앗이가 일상이었다. 어느 날은 우리 삼 남매를 남겨 놓고 강을 건너 장사를 가셨는데 비가 억수같이 내렸다. 어머니로부터는 아무 소식이 없었다. 며칠간 내린 폭우로 초가지붕에서 계속 물이 새니 어린 누나와 나는 세숫대야며 요강 등에 가득 차는 물을 비워가며 밤을 꼬박 새웠다. 그런데 당시만 하더라도 이웃의 정이 도타울 때니 아침에 이웃집 아주머니가 우리의 안위를 살피러 오셨다가 갑자기 “문지방이 돌아간다. 어서 나와”라고 소리치셨다. 나는 비에 젖을까 노심초사하던 방학 책을 찾다가 아주머니로부터 호된 지청구를 듣고서 마지막으로 뛰쳐나왔는데 그 순간 집이 무너졌다. 강물이 빠지고 나서 집으로 돌아온 어머니는 한없이 우셨다. 전화가 없을 때니 얼마나 발을 동동 굴렀을까 싶다.
그런데 내게 그보다 더 슬픈 기억은 할아버지께서 사주신 재봉틀을 빚쟁이들이 와서 가져간 일이다. 큰집에서 중학교에 다니던 내가 방학을 이용해 시골집을 찾았을 때 어머니는 재봉틀을 뺏긴 일을 이야기하시며 우셨다. 재봉틀을 이용해 할아버지의 흰색 두루마기나 바지, 저고리 등을 만드신 후 정성스럽게 다리미질이나 인두질을 하시던 어머니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누나는 예쁜 드레스를, 나와 동생은 호피 무늬 옷감으로 만들어 주신 근사한 외투를 입고 학교에 다녔다. 재봉틀은 어떤 집에는 사치품이었을지 모르지만, 평화시장이나 창신동 등의 재봉사나 나의 어머니에게는 미래로 가는 강력한 끈이자 희망이었을 것이고 생계를 이어가는 밥줄이었을 것이다. 내 어머니는 지금도 재봉틀에 욕심을 내신다. 당신 청춘의 전부였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중고제품이라도 한 대 사드려야겠다는 마음만 먹고 차일피일 미루던 중에 어머니는 좌측 고관절 골절로 장애 판정을 받으셨다. 그리고 10여 년이 흐른 얼마 전에 화장실에서 넘어지시며 우측 고관절마저 골절이 되어 수술을 받으셨다. 침상에 누워계신 93세 어머니의 발은 한 장의 종이처럼 가볍다. 진즉 재봉틀 발판을 밟게 해드릴 걸 하는 아쉬움이 너무나 크다. 어머니는 재봉틀을 돌리고 나는 “빨간 꽃 노란 꽃 꽃밭 가득 피어도 하얀 나비 꽃나비 담장 위에 날아도 따스한 봄바람이 불고 또 불어도 미싱은 잘도 도네, 돌아가네.”라고 신나게 ‘사계’를 부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참 불효막심한 자식이다.
이글은 월간 수필문학 2023년 4월호에 실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