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에서 유학할 당시 경제적 빈곤도 그랬지만 어김없이 자라는 머리카락도 큰 문제였다. 미국의 이발소는 커트, 머리 감기, 면도, 스타일 주문 등, 수작업이 추가될 때마다 값이 올라가고 따로 팁까지 주어야 하니 도대체 갈 엄두가 나지 않았다. 다행스럽게도 당시 룸메이트였던 후배 완수가 가까운 거리에 한인이 운영하는 이발소가 있다고 했다. 그런데 삼색등이 달린 이발소가 아니라 가정집이었다. door knocker로 신호를 보내니 안에서 누군가가 구멍을 통해 나를 관찰하는 눈치였다. 이내 문이 열리고 검은 머리의 한인 이발사가 나타났다. 곱슬머리 때문에 항상 이발사에게 까다로운 주문을 하는 나로서는 너무 반가웠다. 평수가 커 보이지 않는 허름한 집 한구석에 이발소 의자 하나가 놓여있었다. 이발사 아저씨는 청량리 맘모스 백화점 부근에서 상당히 큰 이발소를 운영했고 돈도 남부럽지 않게 벌었는데 자꾸 미국으로 오라는 친구의 꼬임에 American Dream이라는 꿈을 품고 이민을 왔단다. 그런데 영어를 못해 미용사 자격증이 없으니 평생 배운 이발 기술을 써먹을 수 없어 낮에는 높은 빌딩에 매달려 페인트를 칠하고, 밤에는 찾아오는 한인 상대로 불법 이발을 하며 아주 고단한 삶을 살고 있다고 했다. “그럼 다시 한국으로 돌아가시지 왜 여기서 이 고생을 하십니까?”라고 물었더니 친척이나 지인들은 자신이 미국에서 성공해 아주 잘살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창피해서 돌아갈 수 없단다. 여하튼 단돈 10불의 이발은 귀국할 때까지 계속되었다.
내 어린 시절 시골 이발소 아저씨는 구레나룻이 있는 키 크고 잘생긴 멋쟁이로 노래를 아주 잘했다. 그리고 마을 대항 콩쿠르대회에서 공동우승을 한 동네 처녀와 결혼했다. 나는 지금도 귓가에 들리던 아저씨의 가위질 소리, 아저씨가 비누칠이 된 면도 거품솔을 뜨거운 난로에 슬쩍 터치할 때 나던 소리, 그리고 그 거품솔이 내 얼굴에 닿을 때의 촉감, 아저씨가 가죽으로 된 면도날 샤프너로 면도날을 다듬던 소리, 바리캉 소리, 시멘트에 타일을 붙여 만든 세면대의 비누 냄새, 그리고 면도하기 전 내 얼굴에 씌워지던 뜨거운 수건의 감촉까지 또렷하게 기억한다. 그런데 얼마 전 아저씨가 치매로 돌아가시고 아주머니도 치매에 걸려 요양원에 계시다는 소식을 들었다. 하지만 그분들의 아들 중 하나가 유명 가수 겸 작곡가로 성장해 내로라하는 엔터테인먼트 회사의 이사직을 맡고 있다니 유전자의 힘은 참 위대하다.
나는 어제 제주도에서 1년살이를 마치고 곧 돌아온다는 약사 친구 창혁이가 보낸 택배 물건을 받았다. 그것은 치과의사 친구 창용이가 창혁이에게 부탁해 보내준 크리스마스 선물로서 제주산 은갈치였다. 감사하고 기쁜 마음에다가 크리스마스를 맞아 몸도 씻고 이발도 할 겸 집 근처 사우나를 찾았다. 단 한 번 미장원에도 가보고 이발 체인업소도 가봤지만, 내가 이발소를 고집하는 것은 그 누구도 오랜 연륜을 가진 이발소 아저씨들의 솜씨를 따라가지 못한다는 신념 때문이다. 하지만 그 솜씨에 대한 믿음 탓일까? 이발만 시작되면 눈꺼풀이 천근만근 무거워진다. 아저씨는 내 턱을 슬쩍 치켜올리시기만 하면 내가 자세를 고쳐 앉는다는 것을 아신다.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시간이다. 그런데 어제는 은갈치 선물로 인한 흥분 때문인지 졸리지 않아서 이발사 아저씨의 삶에 대해 여쭤보았다. 아저씨는 전남 고흥에서 땅 한 뙈기는커녕 소작할 형편도 안 되는 가난한 집에서 태어나셨단다. 초등학교만 졸업하고 놀고 있던 차에 앞집 보성이네 아버지가 보성이와 함께 자신에게서 이발 기술을 배울 것을 권했고, 시간이 흘러 여차저차해 고흥 읍내에 이발소를 차렸다고 한다. 그리고 이 사실을 알게 된 보성이 아버지는 그길로 이발 가위를 손에서 놓으셨단다. 그 후 서울로 올라와 종암동에서 이발소를 차렸으나 큰 재미를 보지는 못했는데, 서초동에서는 주변 중고등학교 학생들을 상대로 이발을 해주며 상당한 돈을 버셨고. 그렇게 모은 돈으로 작은 집을 한두 채 샀는데 재개발로 인해 소유한 집이 서너 채로 불어났단다. 그렇지만 그놈의 종부세 때문에 그중 한 채를 팔아야 했고 엄청난 양도세와 종부세 6천만 원을 물고 보니 남는 게 없어 부아가 난다고 한다. “내가 투기를 한 것도 아니고 그저 성실하게 일한 죄밖에 없는데 이게 말이 되는 거여?” 나는 아저씨 화를 누그러뜨릴 작정으로 “아저씨 언제가 가장 행복하세요?”하고 물었다. 아저씨는 바로 “지금요”라고 대답하셨다. 임대료도 몇 푼 받고 있고, 부근에서 가장 저렴한 이발 삯을 받지만 79세의 나이에도 아직 일할 수 있기 때문이란다. “사람의 삶은 모두 거그서 거그여, 그라고 거그서 부르면 무조건 가야 혀?” “이건희와 정주영이가 돈이 없소, 병원이 없소? 거그서 부릉께 가부렀잖여? ”다만 나이가 듬서 참 감사하고 죄송시런 게 보성이 아버지여, 아 내가 제자 아녀? 근디 나 땀시 이발을 그만둬부렀어. 그라고 단 한마디도 내게 불평을 하지 않으셨응게.” 대학 졸업하고 처음으로 다니던 직장의 상사가 길동에 있는 이발소를 데려갔는데 퇴폐이발소임을 알고 뛰쳐나왔던 나는 다시 끼어들며 “아저씨도 퇴폐이발소를 운영해 보셨어요?” 하고 물었다. “아녀 그런 건 안했어” 화려한 강남에서도 주로 까까머리 학생들의 머리를 다듬으셨다니 당연히 그러셨을 것이다. 아무리 잘난 놈도 결코 혼자 살 수 없는 게 세상의 이치다. 나는 오늘도 친구들과 이발사 아저씨의 도움을 받았다. 잘난 놈 못난 놈이 어디 따로 있으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