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대학 선배인 광수형과 동기동창인 태경이를 만나 태릉입구역 부근의 40여 년 된 갈비집에서 소주 한잔을 마시다 보니 문득 선운사의 겨울이 떠올랐다. 눈이 자주 내려 ‘설창’이란 별칭을 가지고 있는 고창에는 호남의 내금강이라고 불릴 만큼 뛰어난 경치를 가진 선운산 자락에 백제 위덕왕 때 창건된 선운사가 고요히 자리하고 있다. 본디 이름은 도솔산, “구름 속에서 참선하는 산‘, 혹은 ’미륵불이 머무는 도솔천 궁” 등 불심으로 물든 산이다.
고창은 조선시대에 양반 사족(士族)들이 많이 살았던 지역으로 특히 동학 농민운동의 근거지 중 하나이며, 조선 후기의 실학자이자 문인인 이재 황윤석, 독립운동가인 근촌 백관수 외에도 일일이 열거할 수 없을 정도의 걸출한 인물들이 많이 배출되었다. 따라서 예로부터 고창을 가리켜 “사발 만한 동네에 대접만 한 양반이 사는 곳”이라 했다. 사발보다 대접이 크고 깊이가 있으니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또한 고창은 삼국지 위서 동이전에 등장하는 마한 54개 소국 중 하나인 모로비리국의 수도로 추정되며 이 때문에 “한반도 첫 수도”라는 별칭으로도 불린다. 바다와 맞닿은 곳까지 펼쳐진 드넓은 평원이 있고, 그곳을 휘돌아 가는 강은 물 반 고기 반이고, 선운산 외에도 방장산, 문수산, 구황산, 고성산 등 깊고 아름다운 산들이 둘러싸고 있는 전략적 요충지이며, 농업 생산이 안정적이어서 계급이 형성되고 지배층이나 공동체 지도자가 많았을 것이기에 전 세계 고인돌의 40% 이상이 한반도, 그중에서도 고창에 1500여 기가 있는 이유를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아마도 1982년 겨울이었을 것으로 짐작한다. 선운사에 가서 조용하게 공부나 하자고 광수형을 꼬드겼다. 워낙 진중하고 명상과 고요함을 사랑하며 지금도 명상에 푹 빠져 사는 형이라 절 생활이 맞으리라 여겼고, 나는 공부보다도 그저 선운사의 품에 기대어 잠시 살아보고 싶다는 생각뿐이었다. 다행스럽게도 주지 스님과 어머니의 인연도 있고, 광수형도 절 생활이 자신의 체질에 맞기 때문에 몇 달도 견딜 수 있노라 호기롭고 자신 있게 말하여 바로 요사채로 들어갈 수 있었다.
그런데 절에서 지내는 겨울이 어디 그렇게 호락호락한 것인가? 얼마 전 선운사에 가보니 템플스테이하는 사람들이 머물 수 있는 아주 크고 멋진 건물이 있었지만, 1980년대에는 그러한 개념이 거의 존재하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추운 겨울에는 눈 내린 선운사의 풍경을 담으려는 사진작가들을 제외하고는 사람의 발길조차 드물었고, 지금은 끊었다지만 당시 광수형이 좋아하는 담배 한 갑도 사기 어려운 곳이었다. 오죽하면 서울에서 우편으로 보내온 ‘한라산’ 담배가 그렇게 반가웠을까. 절 입구에 미당이 ‘선운사 동구’라는 시에서 “선운사 골째기로/선운사 동백꽃을 보러 갔더니/동백꽃은 아직 일러 피지 않았고/막걸릿집 여자의 육자배기 가락에/작년 것만 오히려 남았습니다/그것도 목이 쉬어 남았습니다”라고 한 바로 그 막걸릿집일 것 같은 선술집이 하나 있지만 주지 스님이 무서워 그 좋아하는 술 한 방울이라도 마실 수 있었겠는가. 선운사에는 은행나무, 당단풍, 배롱나무 등 다양한 나무들이 있지만, 특히 감나무가 많아서 겨울 풍경의 명소로 꼽히는데, 누군가 선운사의 해풍 맞은 감은 껍질이 두꺼워 항아리에 두고두고 익혀 먹기에 좋다고 했다. 그러니 가끔 주지 스님이 불시에 점검하려는 듯 오셔서 주시는 홍시 하나가 그렇게 감사할 뿐이었다.
우리는 부근의 암자를 찾아다니며 적막을 달랬다. 선운사는 조계종 24 교구 본사로서 한때 89개의 암자, 189개의 요사(寮舍)가 산 중 곳곳에 흩어져 있어 장엄한 불국토를 이루었다고 하니 얼마나 큰 절이었는지 대충 짐작할 수 있다. 지금 남아있는 참당암, 도솔암, 동운암, 석상암 중에서도 가장 아름다운 곳은 역시 도솔암이라 할 수 있다. 도솔암의 신비로운 마애석불을 지나 산을 오르면 용문굴이 보이고, 이를 지나 한참 오르다 보면 낙조대에 이르게 되는데 해발 335m밖에 안 되지만, 도천저수지와 칠산 앞바다 그리고 곰소만, 변산반도 등이 한눈에 들어오는 명소다. 그리고 서해로 떨어지는 붉은 해가 세상을 집어삼킬 듯 장엄히 내려앉는 장면을 보고 있노라면 세상의 근심은 저만치 멀어진다. 그러나 자칫 낙조의 장관에 넋을 잃고 있다가는 밤이 어두워 산을 내려오기가 어려워진다. 과거 험준한 지형으로 인해 소를 팔고 재를 넘어가는 이들의 돈을 노려 공격을 한 도적들의 이야기도 많이 전해지고 있으니 그 무서움은 배가 된다.
아마도 선운사에 기거한 지 열흘쯤 된 날이었을 것이다. 눈이 조금씩 내리는데 우리는 절에서 제공하는 저녁 공양을 마치고 사대천왕이 무섭게 노려보고 있는 천왕문 앞에서 잠시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그런데 젊은 남녀 둘이 낙조대 가는 길을 물었다. 내 손가락은 방향을 가리키면서도 눈이 내리고 어두워지고 있으니 위험하다고 했지만, 그들은 살짝 웃으며 감사의 인사와 함께 서둘러 갔다. 그리고 며칠 후 젊은 남녀가 낙조대에서 뛰어내려 생을 달리 한 사건으로 경찰들이 찾아오고 흉흉한 소문이 돌았다. 가슴이 무너져 내렸다. 그들이 바로 그날의 사람들인지는 아직도 모르지만 추운 겨울에 낙조대를 찾는 사람들이 없을 것이기에 지금도 내 안에는 씻을 수 없는 부채로 남아있다.
그리고 바로 며칠 후 광수형이 산을 내려가자고 했다. 절 생활을 거뜬히 잘 해낼 수 있다던 사람이 채 2주도 안 돼 갑자기 내려가자니 정말 난감했다. 주지 스님이 우리를 어떻게 볼 것인지, 우리 어머니에게 뭐라고 말씀드려야 할지 몰라 전전긍긍하는 내게 광수형은 아주 단호했다. 도저히 못 견디겠다는 것이었다. 나는 공양을 하는 중에 올라온 고수 나물의 빈대 냄새마저도 3일 만에 극복하고 오히려 더 달라고 요구할 정도가 되었는데 말이다.
어쩔 수 없이 성화에 못 이겨 산을 내려오기로 한 날 아침에 일어나 보니 엄청나게 많은 눈이 내리고 있었다. 폐결핵을 치료하기 위해 선운사에 들어와 야생 복분자를 선운사 앞에 있는 밭에 옮겨 심은 부지런한 처사님도 빗자루로 쓸어낼 엄두가 나지 않을 정도였으니 말이다. 하루 네 번 정도 들어오던 버스마저 끊겼는데, 광수형은 죽어도 그날 내려가겠다고 하니 이를 어쩌랴. 결국 무거운 가방을 메고, 들고 약 16킬로 미터의 거리를 걸어가야 하는데 눈은 이미 무릎 위까지 차오르고 있었다. 씩씩거리며 눈을 헤치고 걸어가자니 살짝 부아도 치밀어 올랐지만 어쩌겠는가? 하늘 같은 선배이고 내가 먼저 들어가자고 한일이니 말이다. 흥덕까지 나가야 정읍으로 가는 버스를 탈 수 있는데 아무도 가지 않은 길을 헤쳐 가려니 죽을 맛이었다. 아침 일찍 출발해 죽을 동 살 동해서 흥덕에 도착하니 시간은 이미 늦은 오후였다. 다행스럽게도 흥덕 버스터미널에는 정읍으로 가는 버스가 있었다.
아버지 산소가 여전히 선운사 부근에 있고, 세 살 무렵부터 9년 정도를 산 곳이라 요즘도 자주 고창에 간다. 아버지 산소에서 바라보이는 병바위 부근은 유네스코 지질공원으로 지정된 곳이며, 조선시대 사람들이 혼란과 재난을 피할 수 있다고 여겨 십승지로 불렀듯이 여전히 피난처 같은 고요를 품고 있다. 그곳에서 나는 삶이 힘겹고 마음이 무너질 때마다 길을 찾는다. 그런데 얼마 전 가을에 선운사를 찾아 낙조대에 오르다 보니 드라마 ‘대장금’에서 최상궁이 자살하는 장면을 촬영한 곳이라는 푯말이 세워져 있었다. 불쑥 그날의 젊은 남녀가 떠올랐다. 세상은 왜 그들에게 관대하지 못했을까. 사람을 살리는 말 한마디를 나는 왜 내뱉지 못했을까. 그 무서운 일을 할 용기로 살 수는 없었을까. 시뻘건 해가 넘실대며 서해를 넘어가는 모습을 보는데, 두 영혼이 계속해서 내 마음을 흔들기에 서둘러 하산을 재촉했다. 가을의 선운사는 여전히 아름다웠지만, 내 마음의 부채는 눈처럼 겹겹이 쌓여 녹지 않고 있었다.